대화

 

해방/종전 70년,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민족문학사연구소 공동대표,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등 역임. 최근 저서로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 등이 있음.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특임교수, 토오꾜오대학 명예교수. 저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나의 한국사 공부』 등이 있음.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 창비 편집주간. 최근 저서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사회인문학의 길』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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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 창비 편집주간. 최근 저서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사회인문학의 길』 등이 있음.

白永瑞

백영서 무더위에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두분을 모신 대화를 어떻게 준비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야지마 선생님께서 임형택 선생님이 작년에 내신 두권의 책에 대한 긴 서평논문을 본지에 쓰셨죠(「근대극복의 실학연구란 무엇인가: 학인(學人) 임형택, 그 배움의 궤적」,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임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은근한 비판을 곁들인 격조있는 글이었습니다. 나중에 두분이 더 깊이있는 논의를 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격의없는 학술적 토론의 장을 만들어서 독자들께 선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오늘의 현실 문제를 보는 데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리고 학술적·사상적인 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너무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편으로 듭니다. 그런 걱정 속에서 돌아보니까 올해가 아시다시피 종전 70주년, 또는 한국에서 쓰는 용어로 하면 해방 70주년이고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50주년입니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 계기도 있는 만큼 학술적·사상적인 문제의 토론이 결국 오늘의 현실 문제를 바라보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다시 세우는 데도 어떤 암시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 이 좌담을 열게 됐습니다.

한일관계는 요즘 아주 나쁜 상태에 가 있죠. 한일 언론의 공동여론조사에 의하면,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최악의 상태가 됐다고 해요(한국일보 2015.6.9. 참조). 다들 실감하듯이, 동아시아에서는 경제 영역의 상호의존이 심화되는 것과 달리 정치·안보 영역에서 국가주의가 위세를 떨치는 불일치를 보이고 있지요. 그와 중첩되어 정체성의 영역에서 집합적 역사기억의 유산이 작동하고 있어 커다란 혼동을 겪고 있어요. 더욱이 그 혼동이 지역 밖의 미국에 의한 균형잡기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이런 지역구조를 동아시아 국가들은 각자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계산해서 현상을 타파하려 나서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특히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분쟁, 그리고 상호불신은 날로 커지고 거세지고 있지요.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에 처한 만큼 오늘의 한일관계에 대한 인상이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먼저 간단히 말씀 듣고 본격적인 얘기를 풀어가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해방/종전 70년, 동아시아 지식인의 현주소

 

임형택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은 지난 70년 이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돌아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외형적인 반일, 내면적인 친일의 구도를 그려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악화된 양국관계는 지금까지 쭉 그려왔던 그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다만 중국의 전지구적 부상이 현 상태를 초래한 근본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종래와 같이 볼 수 없겠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중국을 가리켜 대국(大國)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이란 나라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 거대한 위협적 존재로 있었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으로도 상대가 없는 대국이었던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런 중국이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말에 이르는 동안에 형편없이 쇠퇴해서 서방세계와 일본에 유린당했던 것 또한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21세기로 들어오는 이 지점에 거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 꼴이지요. 이에 따라 세계질서의 재편이 일어나는 중인데,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역사적으로 긴밀한 동아시아의 중국과 한국과 일본, 세 나라가 상호관계를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지금 서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현재 한일 간의 악화된 관계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또 내면의 친밀한 관계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본다면 지금은 미봉을 하고 넘어갈 때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근원적인 성찰, 역사적 반성이 필히 요망되는 때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사고하고 인식함에 당해서는 주체적 자세가 필수요건이지만 동시에 역지사지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미야지마 선생의 고견을 듣게 되어 매우 소중한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특임교수, 토오꾜오대학 명예교수. 저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나의 한국사 공부』 등이 있음.

宮嶋博史

미야지마 제가 일본에서 서울로 직장을 옮긴 2002년은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가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한일관계가 어느 때보다도 제일 좋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앞으로도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만 현실은 반대로 점점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십몇년 동안 계속 나빠지는 것을 보면 쉽게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서,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임선생님은 주로 세계질서 같은 객관적인 상황 속에서 한일관계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양국 지식인들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말에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일본에서는 맑스주의의 영향력이 크게 쇠퇴했는데 특히 일본 역사학계는 맑스주의의 영향이 아주 컸기 때문에 그후 일본의 역사학계 전체가 표류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 상황 속에서 현실에 대항하는 비판적인 의식, 그리고 일본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려고 하는 연구들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 지식인들이 방향상실이라고 할까요, 민주화된 이후 한국사회가 장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제시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습니다. 민주화 이전에 한국의 지식인들이 현실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면서 그런 현실 문제와 연구가 아주 깊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는데요. 민주화 이후 일본도 한국도 지식인들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약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내셔널리즘이 점점 커지게 됐고 그것에 대해 적실하게 비판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이렇게 악화시킨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영서 임선생님은 객관적인 동아시아 질서 변화의 중요성을 말씀하셨고 미야지마 선생님은 한일 양국 지식인의 주체적인 역할을 지적하셨는데요, 미야지마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창비’의 역할을 되돌아보게 되고 오늘의 대화가 갖는 의미의 핵심도 그쪽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일 양국 지식인들이 더이상 비판의식을 유지하기 힘든, 즉 비판의식을 끌고 가는 동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지식인들의 사고를 규정하고 있는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미야지마 선생님이 서구 중심적인 역사인식이야말로 한일 역사인식의 대립을 낳는 요인이라고 쓰신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과연 그런 건지, 또 그게 양국의 이른바 비판적인 지식인한테도 여전히 적용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특히 한국의 비판적인 역사학자나 지식인에 대한 경각, 경고의 의미도 담으신 것 같은데요.

 

 

서구중심성을 넘는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미야지마 서구 중심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은 학계에서도 공통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들이 아까 말씀드린 상황에 놓이게 된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역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 어떤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되는지가 불분명하고 애매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요새는 아마 한국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큰 패러다임에 대해 토론하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고 할까요. 그런 자리 자체가 별로 없고 학술논문에서도 개별 실증적인 연구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유교적 근대’라는 개념을 제기한 것도,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를 떠나서 아무래도 서구중심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면, 아까 임선생님도 지적하셨습니다만, 중국을 어떻게 보는가가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로, 지금까지의 중국, 지금의 중국, 미래의 중국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서구중심적인 패러다임으로는 중국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는 중국의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는 겁니다.

 

백영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얘기인데 그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해체주의에 그치고 있죠. 그럼 그다음에 무엇을 세울 거냐에 대해서는 얘기를 잘 안하는 분위기라고 지적하신 데 저도 동의하는데, 그에 반해 중국 지식계에서는 요즘 오히려 큰 얘기를 하고 있어요. 중국모델론뿐 아니라 새로운 보편성, 대안적 보편성을 찾아보고 싶다는 거죠. 한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논의가 적은 편이죠. 독자인 제가 보기에 두분 선생님은 그 나름대로의 대안적 보편성이랄까 패러다임을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전통사상 속에서 찾아내서 부각하려는 노력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미야지마 선생님은 동아시아적 근대, 유교적 근대, 그리고 중국적 근대와 통한다고 보이는 일련의 체계를 소농사회라는 물적 기반 위에서 세우려 하셨고, 임선생님은 신실학(新實學)이라고 해서 실학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하셨으니까 그런 걸 점검하는 가운데 필요할 경우 중국과 비교해보면 한결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임선생님의 그동안의 학술적인 성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을 둘러싼 논의로 얘기를 옮겨볼까 합니다.

실학을 새삼 지금 얘기한다는 것은 한국 학술계의 지형에서 보면 소수의 의견이 아닌가 싶어요. 실학이라는 게 보통명사냐 역사적 개념이냐 하는 논란이 있는데요. 실학은 말 그대로 헛된 학문이 아니고 쓸모있는 학문이라는 뜻인데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실학에 특별한 의미를 둬왔단 말이에요. 보통명사가 아니고 역사적 개념으로 써왔는데, 임선생님도 어느 글에서 말씀하셨지만 ‘실학을 무화하려는 여러 학술공작에 맞서서 외롭게 싸워’오셨다고 얘기할 수 있지요. 여기서 실학 개념과 그 의의에 대해 잠깐 짚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지금, 실학을 다시 고민하는 까닭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민족문학사연구소 공동대표,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등 역임. 최근 저서로 『한국학의 동아시아적지평』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 등이 있음

林熒澤

임형택 사실 실학이 보통명사인지 역사적 개념인지는 백선생 말씀처럼 논의할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역사적 개념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임이 물론이죠.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실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풍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독 한국에만 존재했던 게 아니고 동시기 중국, 그리고 양상을 좀 달리해서 일본에도 공존했습니다. 중국의 경우 명대에서 청대로 넘어오면서부터 발달한 학문인데 고거학(考據學, 고증학) 혹은 실사구시 학풍, 흔히 박학(樸學)이란 말로 일컬었던 겁니다. 우리의 실학과 기본적으로 성격이 상통하는 것인데 이를 실학이란 개념으로 파악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다가 근래 실학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명청실학사조사』(전3권, 齊魯書社, 1988~89) 같은 책도 발간됐지요. 일본도 대략 비슷해서 주로 고학파의 학문에 실학 개념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실학이란 개념이 성립하게 되는데 한국학술사에서 세운 인식틀이 중일 양국에 도입된 셈입니다. 문제는 중국 학계와 일본 학계에선 실학이란 용어가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폐기할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실학이란 인식틀을 적용해서 연구하고 이론화하는 학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백영서 1960년대 후반 학계가 부각한 실학을 일반인들도 관심 갖게 만든 데는 창비의 역할이 컸죠. 창비가 1967년 여름호부터 관련된 글을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