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의 문학, 이제 어디로

 

근대의 이중과제, 그리고 문학의 ‘도’와 ‘덕’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최근 저서로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사실주의와 근대성

 

이념 또는 문예사조로서의 사실주의(寫實主義)는 호소력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러나 사실주의가 강조한 사실성(寫實性) 내지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은 최근의 문학에서도 여전히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한다. 훌륭한 작품이 되기 위해 사실주의적 기율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타당한 이유 없이 무시하기도 힘든 것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문학에서 비사실주의적 장르들의 발달이 지체된 까닭만도 아니다. 뒤에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사실주의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근대성’의 무시 못할 일부인 것이다.

이에 관해 나는 졸고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의 ‘다시 생각하는 사실주의’ 대목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 있는데,1) 거기에 부연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할까 한다. 이는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작업의 연속이기도 하다.

‘사실주의적’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 곧바로 반사실주의 이론가들이 비판하는 통념적 사실주의, 곧 ‘투명한 언어를 통한 객관적 현실의 재현’에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2) 한국소설의 우수한 최근 성과들에서도 고지식한 사실주의와 무관하면서도 선택된 소재의 범위 안에서의 충실한 현실재현이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김애란(金愛爛)은 소설집 『비행운』(2012)을 포함한 그의 단편 대부분이 사실주의적 표면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으며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2011) 또한 발상이 특이하고 서사기법이 다채로울 뿐 사실주의적 기율을 현저히 벗어난 대목은 만나보기 힘들다. 한강(韓江)의 장편 『소년이 온다』(2015)도 제2장의 망자의 1인칭 진술은 사실주의 소설에 충분히 포함될 만한 서술기법이라 할 수 있다.

박민규(朴玟奎)와 황정은(黃貞恩)은 전자의 소설집 『카스테라』(2005)와 『더블』(2010), 후자의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2008)와 『파씨의 입문』(2012)이 보여주듯이 사실주의와 반사실주의 기법을 그때그때 자유롭게 구사하는 작가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최근 업적으로 주목할 만한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2009)나 『계속해보겠습니다』(2014)에 오면 사실주의적 요소가 지배적이 된다.

사실주의 전통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면서 좋은 소설을 계속 써온 작가라면 전성태(全成太)를 꼽아야 할 듯하다. 자신도 사실주의적 기율에 충실한 작품을 여럿 써낸 동료작가 권여선(權汝宣)은 전성태의 최신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2015)을 두고, “읽고 나서 우리에게 전성태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어서, “정통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도 좋았고, 거기에서 은근슬쩍 빠져나와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는 작품도 좋았습니다”3)라고 하는데, 이때의 ‘정통 리얼리즘’은 꽤나 좁게 해석한 사실주의를 뜻한 표현일 것이다. 예컨대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지금껏 나는 삶이니 세계니 하는 것들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소설을 써왔”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겪은 명백한 세계만을 그리려고 애써왔”4)다고 하는 화자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던 신기하고 더러 허황된 이야기를 해드리면서 어린 그가 겪었던 이상한 체험들을 되새기기도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겪은 명백한 세계”를 아주 벗어나지 않고 ‘은근슬쩍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는’ 정도다. 어머니가 이야기를 끝내며 해주시던, “신기하지 않니? 그러나 하나도 신기한 얘기들이 아니란다. 내가 하는 얘기들은 모두 사실이니까”(322면)라는 말이 화자의 서술에 관한 한 문자 그대로 사실인 것이다.5)

그런데 사실주의적 작품이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처럼 판타지의 세계에 속할 법한 이야기를 포용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는 경우가 아닐 때는 역시 낡았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 위험이 따른다. 『두번의 자화상』을 읽은 나의 개인적 소감으로는 지루할 것 같은데도 아주 지루해지는 법은 없는 게 전성태 소설의 묘미인데, 그 점에서 「소풍」은 좋은 생각거리다.

「소풍」은 평범한 한 가족이 주인공 세호의 장모를 모시고 나선 평범하다면 평범한 나들이 경험을 들려준다. 특별히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으려니와 낯익은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화자의 개입도 없다. 하지만 공원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어 되돌아 나올 때부터 무언가 제대로 안 풀리고 있다. 아이들이 찾겠다는 네잎클로버는 끝내 발견되지 않고, 보물찾기가 재미있어서 한번 더 해보다가 돈 숨겨놓은 곳을 기억 못하는 장모의 치매기를 확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소설은 세호가 “괜찮아요, 장모님. 아무 문제 없어요”(36면)라고 위로하는 말로 끝나지만, 애당초 숙취상태로 의욕이 없이 따라와서 가족들이 안 보이자 미니위스키병을 단숨에 들이켜는 세호 자신이나, 부부 사이가 아주 나쁘진 않지만 내내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아내 지현과의 관계도 “아무 문제 없”다고는 하기 어렵다. 이렇듯 시종 담담하며 자칫 지루해질 수조차 있는 풍속화 같은 소설에 무언가 불안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줄곧 서려 있는 것이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이다.

하지만 세태소설에 흔히 던져지는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질문이 나올 가능성은 남아 있다. 체홉(A. Chekhov)을 연상시키는 수준으로 잘 쓴 단편이지만 「소풍」이 세태소설의 한계를 과연 얼마나 벗어났는가. 이 물음에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어찌 보면 체홉을 끌어들이는 것이 과찬일 수 있으나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시대의 진실과 인생의 섬세한 기미를 포착한 체홉의 성취와 전혀 무관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든 것이다. 다만 체홉의 시대와 또다른 오늘에는 사실주의적 재현이 기법 자체로 참신성을 자랑하기 어렵게 되어 있으며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물음에 항상 노출되게 마련이다. (물론 사실주의 아닌 그 어느 작품이라도 이 물음이 일단 제기되면 난감해진다. 아예 질문이 안 나오도록 독자를 사로잡고 압도하는 작품의 위력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성묘」나 「망향의 집」처럼 분단현실을 직접 다루면서 그것이 얼마나 정면으로 다루기 힘들고 그래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지를 실감케 해주는 작품의 경우는 좀 다르다.6) 이런 주제를 무슨 ‘첨단기법’으로 다뤄달라는 요구가 도리어 독자나 평자의 오만일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는 소년시절에 드라이저(T. Dreiser) 등 자연주의 소설가들을 읽고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고 자신의 인생경험 때문에 자기도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경도되기에 이르렀다고 자서전 『검둥이 소년』(Black Boy, 1945)에 기록한 바 있는데,7) 사실주의 문학의 경우 재현을 하더라도 억압된 현실, 독자에게 절실한 현실을 재현하느냐 여부가 성패의 한 관건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라는 이미 다분히 익숙해진 기법으로 익숙한 현실을 재현해서는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물론 저자의 기교가 워낙 뛰어나서 독서층에 의해 널리 소비되는 작품이 있지만, 이는 결국 속임수에 불과하며 나아가 사실주의 자체가 원칙적인 속임수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더욱 실감나게 만든다. 곧, 사실주의 예술은 온갖 관습화된 예술기법과 달리 현실을 마치 투명한 창문을 통해서 보듯이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자체도 하나의 예술적 관습임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공공연하게 ‘비현실적’(내지 초자연적)인 환상세계를 그리는 장르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수 있으며, 서사구조 자체를 파괴 또는 교란하는 실험소설이 기존의 서사물들이 은폐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일 수 있다.

여기서 그러한 시도들을 개관하고 평가하는 일은 나의 능력 밖이다. 다만 비사실주의 소설가로서는 사실성에 드물게 충실하면서 사실주의의 문제점에 깊은 경각심을 견지하는 이장욱(李章旭)의 소설세계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소설집 『고백의 제왕』(2010)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2015)의 독자라면 그가 사실주의자가 아님을 쉽게 알아차린다. 다른 한편 그는 서사 자체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타고난 이야기꾼이랄 만한 솜씨로 서사를 꾸려나가곤 한다. 사실주의적 표면을 유지함에서도 『고백의 제왕』 중 표제작 같은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 다만 얼핏 사실주의 소설로도 간주될 법한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흥미진진한 고백 내용에 빠져들다가도 문득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곧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핍진한 서술(내지 고백)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나아가 적어도 유럽에서 18세기 이래 문학의 본질처럼 이해되어오기도 한 ‘영혼의 진솔한 고백’이 반드시 바람직하고 값진 행위인지를 묻는 ‘수수께끼’8)를 대면하게 된다. 더구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오면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을 빼고는 사실주의적 기율에서 현저하게 이탈하는 예가 거의 사라진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은 사실주의가 아닐뿐더러 명백히 반사실주의적인 성격이라 말할 소지가 충분하다. 문학작품이 ‘투명한 재현’과는 거리가 먼 인공적 가공품임을 분명히 해주는 일이 소설마다 큰 비중을 차지하며, ‘사실(事實)’과 ‘사실성(寫實性)’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중요한 주제를 이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