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마을공동체 정책과 지역사회 시민생태계

 

 

유창복 柳昌馥

서울시협치자문관.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장. 저서 『우린 마을에서 논다』 『도시에서 행복한 마을은 가능한가』 등이 있음. 61bok@hanmail.net

 

 

왜 마을인가?

 

요사이 마을이 대세다. 여야를 불문하고 광역·기초자치단체장들이 마을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민선 5기를 거쳐 6기에 들어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다. 왜일까? 21세기 첨단 글로벌 시대에 농경시대로 시간을 되돌리자는 낭만적인 시도일까? 그렇다고 종교나 특정 이념으로 무장한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은 더더욱 아닐 터, 과연 마을이 뜨는 이유는 무얼까?

있는 집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기획력 있는 엄마와 돈 많은 할아버지, 거기에 무관심한 아빠가 삼위일체로 합작해야 애들이 공부 잘하고 ‘in 서울’이라도 한단다. 있는 집 애들이 인물까지 좋다는 푸념에 우스개로 넘겨보지만, 있는 집 애들이 성격도 좋다는 말에는 멍해진다. 씁쓸하다. 해방 이래, 국가가 주도한 압축적인 근대화정책으로 보릿고개가 없어지고, 통신강국의 반열에 오르고, 맹장염 수술에 천만원대의 병원비를 지불할 필요 없는 공공의료체계가 만들어졌다. 한 반에 80명 넘는 아이들이 드글드글 2부제로 돌아가던, 초등학교 가건물 교실의 기억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아 빈부격차는 훨씬 모질고 심각한 사회문제를 만들어낸다. 한 가족이 단칸방에 모여 자살하고, 소리 소문 없이 외로이 죽어가는 노인들이 허다하다. 공부, 공부…… 아이들은 시험과 경쟁에 절어 10대를 보내고, 대학생활 내내 취업준비로 푸른 청춘을 다 쓸어넣지만 취업은 난망하다. 어쩌다 일자리를 얻어도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이라 해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몰라 불안한 30대를 보낸다. 40줄에 들어서면 새끼들 대충 건사하는 것도 버겁기만 하다. 50대면 퇴직하지만, 자식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갔다 와도 집에서 죽친다. 이렇게 심란하게 살아가는 고단한 가장을 자식으로 둔 노인들, 자식 교육에 부모 봉양에 한 인생 다 바쳐온, 엊그제만 같이 생생하기만 한 지난 시절이 서럽고 허하다. 100세까지 산다지만 도리어 걱정이다.

이제는 성장을 해도 고용이 동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화와 구조조정으로 고용이 줄어들고, 그나마도 유연노동제로 갈수록 불안해지기만 한다. 이미 저성장 궤도에 진입한 한국 경제, 있는 사람들한테야 참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지만, 아예 없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좀 있어도 시원찮게 있는 사람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간당간당 매달리듯 버티는 그 수준에서 더 밀려나면 어쩌나 전전긍긍, 더 불안하기만 하다.

형편이 고만고만한 사람들, 어떻게든 살아낼 궁리를 해야 한다. 이웃끼리 함께 어울려 하소연하고 묘책 찾아 궁리하고, 그러다 십시일반으로 품앗이로 협동하여 해결하자고 나서보는 거다. 어쩌다 문제가 풀리면 풀려서 좋고, 비록 안 풀려도 푼다고 애쓰면서 맺은 살가운 이웃관계가 또다른 해법의 불씨가 된다. 그래서 마을을 ‘시급하고 절실한 생활의 필요를 함께 하소연하고, 궁리하고, 협동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웃들의 관계망’이라 한다.

그렇다. 전통사회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마을이 세상을 다 구원할 거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가 주도하고 관료들이 나선들 똑 부러지게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점점 줄어든다. 풀어야 할 문제들이 더더욱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시민단체가 나선다 해도 시민이 동행하지 않으면 역시 힘에 부친다. 동네에서 주민들이 이웃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고 스스로 직접 나서야 시민단체들도 힘을 받고, 국가도 시민의 행복을 위해 제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 혁신의 불씨이고, 희망찬 미래의 마중물이다.

 

 

등장과 연결

 

3년 전 박원순(朴元淳) 시장이 서울에 마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마을은 정부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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