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의 문학, 이제 어디로

 

비평의 질문은 어떻게 귀환하는가

신경숙 소설과 90년대 문학비평담론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1. 표절 논란 이후, 비평의 질문

 

신경숙(申京淑)의 「전설」에 대한 표절 문제가 제기된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와 논평들은 차츰 정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논란의 확산 계기를 제공한 창비로서는 반성과 쇄신의 책임이 갈수록 무거워짐을 실감한다. 표절 문제에 대응하여 창비에서 내부논의 없이 나간 첫번째 보도자료의 잘못이 남긴 파장은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다음날 발표된 사과문을 포함하여, 『창작과비평』(이하 『창비』) 가을호의 머리말과 백낙청(白樂晴) 편집인의 페이스북 발언, 그리고 현재의 국면에서 객관적인 논의를 전개하려는 시도들에도 여전히 무거운 부담으로 드리워지고 있다.1) 지금의 상황에서 돌아보면 표절 논란의 과정에서 창비가 신속하고 활발한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 문제점도 크게 다가온다.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생산적으로 드러내면서 공론장과 소통하는 과정의 필요성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지속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신경숙의 「전설」이 작가 본인은 읽은 사실을 망각했다지만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우국」의 영향 아래 씌어졌으며 어떤 경위로든 해당 대목을 거의 그대로 재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표절 사실을 시인하며 사과하였고 출판사 역시 작가의 의사를 존중하여 해당 작품집의 출고를 정지하였다. 『창비』 가을호 머리말에서도 강조했듯이 이러한 조처는 문제에 대응하는 힘겨운 시작일 뿐이다. 단시간에 문제가 해결된다고 장담하기보다는 공론 속에 표출되는 불만과 질타를 환기하면서 생산적인 문학비평의 쟁점으로 연결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지난 계절의 논의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작품 자체에 대한 문학적 해석도 많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표절 논란이 작품에 대한 실질적인 해석들로 이동하는 전환점에 윤지관(尹志寬)의 중요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윤지관은 “기억하든 못하든 「전설」에는 「우국」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나 문장의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러나 유사한 문장이나 단어가 들어 있고 구성이 흡사하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2) 그가 주장하는 문학적 차용의 범위나 「전설」의 작품 평가에 대해서는 비평적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핵심적인 것은 이 글이 창작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창조와 모방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환기했다는 점에 있다. 장정일(蔣正一)은 윤지관과 다른 층위에서 “작가〓창조자”라는 낭만주의 신화를 비판하며 “작가의 창조성이란, 사회와 역사를 비롯한 외부와의 교섭에서 나온 산물이며 그가 받았던 교육과 독서 편력도 거기에 포함된다”3)라는 문학 창작의 기본 속성을 강조한다. “표절을 윤리적이게 하는 것은 명시성(출처 표시)이 아니라 원본을 빌려 쓴 사람의 원본과의 대결 의식이며 원작을 극복하려는 노력, 곧 작품성이다”라는 전언은 오래전 그 자신이 개입하여 이인화, 박일문과 벌인 90년대초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및 표절 논란을 떠오르게 한다.4)

윤지관과 장정일의 견해는 표절 논란이 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문제의 근본적인 발생 지점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문학의 영역에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될 수 있는 상대적인 참조가 되었다.5) 이처럼 문학작품의 창작원리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저작권과 표절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저작권 개념은 근대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소유권’을 지닌 상품으로 서게 되는가를 새삼스럽게 알려준다. 저작권의 측면에서도 표절 문제가 지닌 함의는 단순하게 정리되기 어렵다. 가령 장은수6)가 다양한 표현의 차용과 인용, 패러디, 오마주에 대한 섬세한 고려를 요구하면서도 표절은 “어떤 개성적 ‘문장’의 ‘인용부호’ 없는 절취(截取)일 뿐”(58면)이라고 단정하는 과정은 저작권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갈등과 혼란을 잘 보여준다. 그는 특정 문장의 ‘절취’를 표절의 근거로 제시하였다가 급작스럽게 “문학의 표절 기준은 내적 자율의 영역이지 외적 규칙의 영역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양심의 문제이다”(70면)라고 결론짓는 등 논지의 혼란을 보여준다. 장은수는 문자적 유사성을 추출하는 층위에서 표절 시비를 멈출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신 모티프나 구조적 유사성 등의 다양한 층위로 번져나가는 표절 논란을 경계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문장 레벨’로 한정된 표절 범위는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는 안전한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절취’의 개념을 담고 있는 한 표절에 대한 판단은 문장의 동일함에서 끝나기 어려우며 모티프, 주제의 유사성까지 수많은 층위의 유사함을 판정의 시험대에 올리게 된다.7)

문학의 원천인 창조와 모방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부터 저작권과 표절 문제의 관계, 그리고 문학권력론의 제기라는 광범위한 주제들은 단시간에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풀어나가야 할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뼈아프게 와닿았던 것은 창비 문학비평담론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문예비평』 가을호 좌담에서 구모룡(具謨龍)은 표절 문제가 창비 담론의 문학적 발현이라는 층위에서 사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단체제론’이나 ‘87년체제의 극복’ ‘동아시아담론’ 등은 냉전체제의 와해 이후 창비 담론의 생산적인 국면입니다. 문제는 창비가 자신의 주도적인 담론에 상응하는 작품을 옹호했느냐 하는 점입니다”(40면)라는 그의 발언은 그동안 창비의 문학비평담론이 사회담론과의 연계 속에서 어떤 쇄신을 시도해왔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그것은 작품이나 현실을 담지 못하는 경직된 담론이 있다면 그것을 점검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요청으로 다가온다.8) 그런 점에서 90년대 이후의 창비 문학비평담론이 신경숙의 소설을 포함한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무차별하게 수용해왔다는 지적들을 상투적인 비판으로 외면해온 적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이번 표절 논란 과정에서 그러한 비판은 신경숙의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와 문학사에 대한 해석으로 확장되어 터져 나왔다. 특히 ‘리얼리즘의 퇴화’로 거칠게 토로되는 방향성에 대한 질타는 1980년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