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 제5회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

 

세월호 이후 정치적인 것의 ‘세속화’

 

 

정현 

1979년생. 독립연구자로서 현재 정치철학 및 매체사를 중심으로 공부.  refur1343@gmail.com.

 

 

세월호참사는 단순한 ‘참사’ 이상의 시대적 징후의 성격을 갖는다. 이 사건이 정부의 완전한 무책임에 의해 야기된 ‘참사’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재론의 여지없음’과는 달리 참사 이후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이 시대 대중의 사고 패러다임을 근본적인 물음 속에 빠트리고 있다. 세월호참사가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라면, 세월호 이후의 사태는 그 ‘죽음’과 관련해 오늘날 우리에게 공적 ‘책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죽음은 사적으로는 소멸을 의미하겠지만, 공적으로는 하나의 화두로 발전할 수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역사적으로 죽음은 일정한 시대적 계기와 만나며 대중의 저항과 정치적 운동으로의 전환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전환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유가족을 비롯해 많은 이들을 좌절시키는 것은 역으로 ‘공적 책임’ 자체에 대한 사회 전반의 무감각과 망각이다. 어떤 무기력감이, 그리고 우울감이 세월호참사 이후의 정세를 지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무기력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혹은 ‘죽음의 공적 성격 상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현상은 오늘날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존재 일반에게 나타나는 어떤 변화를 암시하고 있는가?

 

 

1. ‘세월호’ 이후의 멜랑꼴리

 

세월호 1주기를 경과하며 한 유가족은 참사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 바 있다.1) 시간이 멈춰버렸다는 것,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시간이 지속되었다는 것이 야기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사회 전반을 덮친 무기력과 우울감의 대중화다. 예컨대 르뽀작가 김순천은 참사 이후 자신의 정서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뒤로 나의 시간은 뒤엉키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또 어떤 때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버려 날짜를 셀 수가 없었다. 나는 바보가 되었다. 멍한 순간이 많아졌다. (…) 한편으로는 예민해졌고,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사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가 이렇게 인간들에게 잔혹한 것이라면 그게 굳이 필요한가.2)

 

참사 이후 쏟아진 수많은 물음 중 주된 하나가 바로 인간 정치공동체의 존재이유와 관련된 것이었다. 참사가 정부의 무책임한 모습과 함께 전개되자 사람들은 국가의 주권기능과 그것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의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변화 가능성의 부재라는 현실과 만나며 빠르게 혼란과 무기력감으로 전이되었다. 당대의 언론은 이러한 심리적 현상에 주목하며 참사 이후의 ‘전국민적 우울증’과 ‘힐링’의 필요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3) 언론은 대체로 정신의학자들의 말을 빌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대중매체를 통한 ‘부정적’ 소식과의 지속적인 대면을 대중적 우울증의 원인으로 지목했으나, 앞의 인용문처럼 문제는 좀더 근원적이고 복합적인 듯 보인다.

세월호참사로부터 많은 이들이 정치공동체의 몰락을 목격했다고 할 때, 이 몰락이 단순한 국가 행정기능의 오류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의 존재조건 일반의 더욱 근본적인 문제와 연관되었다는 데는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크게 두가지 측면이 주목되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효율성 논리와 관련된 것으로, 돈과 긴축의 생존논리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안전의 윤리적 책임이 설 자리를 근본적으로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명박정권기의 선박연령 제한선 조정과 선원 전반의 비정규직화는 이러한 신자유주의화의 직접적 결과였으며, 사건 당시 각자의 생존에만 매달린 선원들의 모습은 이로부터 파생된 윤리 일반의 상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하나는 사건 이후의 과정으로, 주로 언론과 정치인들의 행동을 통해 나타난 공론장의 기능장애와 관련된다. 주지하다시피 참사 이후 언론은 상호충돌하는 수많은 ‘증언’을 아무런 공적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정치인들은 어떠한 대책도 없이 팽목항에 나타났다가 ‘인증샷’만 찍고 사라지는 무책임한 모습을 반복했다.4)

비슷하지만, 다소 다른 데 초점을 둔 것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 진태원(陳泰元)의 해석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국가가 이 사건을 통해 책임의 ‘주체성’을 결여한 자신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했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세월호참사에서 국가는 어떠한 공적 책임의 주체성도 결여한 ‘검은 구멍’으로 나타났다. 국가는 사태 자체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하려 하지 않았고, 따라서 애초에 인명을 구조할 의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진상을 흐리며 유가족의 움직임이 사회적 운동으로 전화하는 것만을 막고자 했다는 것이다. 주체성을 결여한 국가는 그 주권의 구성원인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증할 수 없는 빈 공간, 어떤 능동적 결정도 행위도 할 수 없는 무의미의 사물 그 자체와 같다(그러므로 국가는 ‘우리 편’이 아니다). 진태원은 세월호참사로 인한 대중적 충격의 내용과 원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국가가 검은 구멍이라면, 이는 국가가 우리 편이, 나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호사건에서 대중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처럼 국가가 피해자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하고 사고 수습 및 사후 처리에서도 무능력을 보이는 것이 단순한 무능력이 아니라 무의지의 표현이라는 점. 곧 국가는 단지 구조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조할 생각이나 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사건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치안 기계로서의 국가가 가장 큰 관심과 공력을 기울이는 것은 더이상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5)

 

국가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보증한다고 할 때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국가의 상은 사회의 최종적 위기에 대해 책임져줄 주체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관련한 근대철학의 오랜 논쟁을 통해서도 이러한 가정은 대체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17세기의 홉스(T. Hobbes)로부터 18~19세기 혁명기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국가론을 정초한 강력한 가설 중 하나는 국가가 사회에 외재하는 권력으로서, 필요와 이해관계에 얽힌 각 개인의 갈등이 최종적 위기로 폭발하지 않도록 하고 내외부의 압력이나 위협으로부터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지켜줄 초월적 기관이라는 것이다.6) 반면 세월호참사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이 초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