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우리의 폐허를 직시하라

 

 

정우영 鄭宇泳

시인. 시집으로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살구꽃 그림자』가 있음. jwychoi@hanmail.net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4년 『민중시』 1집에 「지옥선」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으며,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오장환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가 써내는 시의 눈빛은 아직도 성성하다. 짓무르거나 낡지 않았다. 요즘 흔히 보이는 자폐의 시들에 비하면 그의 시는 얼마나 패기에 차 있는가. 백무산. 이름만으로도 이미 뜨거운 시인. 나는 그의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2015)를 읽다가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일상에 매몰된 게으른 타협들이 어찌나 환히 비치는지. 내 수치를 모르고 남의 그늘을 어둡다 하고 있었다. 그의 시가 밝혀주는 내 허물이 적나라하다. 그와 마주 앉는다는 게 그런 면에서 좀 멋쩍다. 더욱이 그의 시를 본격적으로 살피자니 낯익어 보였던 시들마저 왜 그리 새로운지.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시인처럼 그와 그의 자취들을 챙기면서 그를 떠올린다. 그는 여전히 호기심을 번득이고 있다. 그렇지, 호기심이다. 그의 바탕에는 저 호기심이 짙게 깔려 있어서 온전히 그의 시적 면모를 들여다보는 게 쉽지 않다. 이다음엔 또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의 시적 탐구는 생명체처럼 스스로 자활(自活)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에도 의탁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자활적인 사람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그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아무리 가혹한 곳에 데려다놓아도 너끈히 자기 삶을 영위해갈 것이다. 그는 환경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환경을 호흡한다. 나는 그가 물길 잡고 터를 앉혀 혼자 지었다는 절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산자락과 물길과 절집이 오묘하도록 다정하게 펼쳐져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 그렇게 함께 지내온 존재들처럼 자연 속에 깃든 자활의 조화로움이 따사로웠다.

그런데 그의 자활은 독특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채워가기 위해 자활하지 않는다. 그가 세운 저 절집들이 그렇다. 이 절집은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 너와 함께 살기 위해 지어진 집이다. 너를 들여앉히는 집이다. 절집은 스님이 주인이 아니라, 손인 네가 주인이다. 나는 그의 이타성이 최적화된 게 이 절집이라 여긴다. 그의 시집 또한 이같은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너인 우리의 자활을 돕기 위해 시집을 또한 짓는다고.

그래서일까. 그의 시집들을 찬찬히 넘기다보니 자활은 처처인데 포옹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라, 포옹이 없네?’ 난 사뭇 놀랐다. 시에는 대개 대상을 껴안는 포옹의 포즈가 있게 마련인데 그의 시에는 드물었다. 아니,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시들은 있는데, 어떤 대상을 폭 끌어들이거나, 심장과 심장이 맞닿는 포옹의 자세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포옹보다 연대를 더 좋아하는 걸까. 나는 말머리를 포옹으로 열었다.

 

정우영 포옹을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는가봐요? 시에서 잘 찾을 수가 없는데요.

 

백무산 포옹이라? 내 시에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모르겠는데요?(웃음) 그런데 어떤 부정성(否定性)을 앞세웠다거나 그런 건 있지요. 사회성을 얘기할 때 부정성이 앞서는 게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어떤 것은 강하게 포옹하고 또 어떤 것은 배제하는 그런 전달을, 나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긴 해요.

낙관이란 말 있잖아요. 난 포옹이 인간에 대한 낙관이라고 봐요. 인간에 대한 낙관 없이, 어떤 회의적인 시각과 부정의 방식으로는 포옹이 성립하기 곤란하잖아요? 이때 낙관이라면 인간에 대한 믿음, 신뢰 같은 것인데, 그런 문제는 의도적으로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껴야 할 지점에서도 그걸 붙잡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포옹이 실은 개인적인 끌림이잖아요. 그렇잖아도 지난번에 황현산(黃鉉産) 선생이, 제 시에는 연애시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연애를 앞세우면 현실이 죽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죠. 강박적입니다.

현실조건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겠죠, 아직까지는. 난 ‘아직까지’라고 생각하는데, 아직까지는 내가 마음껏 나의 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껏 나는 사회와 우리 현실을 주로 얘기해왔지요. 그러다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사적 의지와 감정의 노출을 자제하거나 혹은 노출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나 개인에 관해서든 뭐든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다뤄보려는 의지가 셌다는 겁니다. 시로서는 문제가 많죠.

 

정우영 흠, 아마도 황현산 선생은 제가 말하는 포옹을, 연애시로 지칭하신 것 같군요. 저는 시가 어떤 사물과 서로 마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물을 보고, 사물도 나를 바라보는. 그런데 형의 시에는 내가 사물, 혹은 너를 바라보는 시선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했는데 형 말을 들으니 알겠군요. 아직까지 현실이나 사회, 내가 아닌 타자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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