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한국근대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정홍수 벌써 올해 마지막 좌담이네요. 오늘은 최원식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지난 세기 70년대부터 한국문학 현장을 가까이 또는 멀리서 지켜온 선생님께서는 최근 작품들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선생님의 혜안과 고견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최원식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우 통독한 형편이라 두분 말씀을 경청하고 혹 보탤 게 있으면 보태는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이하석 시집 『연애 間』

 

문초_연애 間_fmt

정홍수 이하석(李河石) 시인은 동년배이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최원식 또래를 만나서 우선 반갑고, 여전히 시에 정진, 이만한 규모의 시집을 낸 점에서 감사한 생각이 들었어요. 더구나 시에 분노가 있어요. 보도연맹 학살을 다룬 「가창댐」이나 동경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다룬 「붉은 강」, 옛날 일만이 아니고 요즈음 쟁점인 4대강을 비판한 「낙엽서」 「야적」 같은 시들이 그렇습니다. 그 연세에도 여전히 분노가 살아 있다는 점이 고마웠어요.

 

정홍수 그런데 전체적인 시의 정조로 보면 ‘분노’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최원식 따듯한 연민도 있어요.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용왕님께 기도하려고 절벽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실사구시로 그린 「태종대 굿당」에는 시인의 눈매가 선하게 떠오릅디다. 일생 밭일하던 어머니께 시를 한수 배우는 「별밤」도 재밌어요. “와, 여긴 별들이 많네요.” 했더니 “시인이 어째 그 정도밖에 안돼?” “아이고 무시라 별밭이네!” 하시는데, 느낌의 현재에서 발화하는 시적 순간이 절묘합니다. 민중으로부터 시적 영감을 길어올리는 하방을 기꺼이 수행한 7,80년대 민중시의 전승과 해후하는 기쁨이 저로서는 각별합니다.

 

정홍수 예, 저도 그런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매화우(梅花雨) 서사」는 재개발 이야기가 나도는 도시 한가운데의 섬 동네를 꽃비처럼 떨어져내리는 매화우를 전경화화면서 그려내는데, 그네들의 고달픈 삶에 다가가려는 애틋하고 따뜻하고 때론 익살맞은 시어 하나하나의 정감이 너무 생생합니다. 그런데 민중시의 속 깊은 서정을 충분히 품고 있으면서, 3연의 “온 동네에/매화/우 매화우가,/덧정 없이,/내린다.”에서 보듯 짧은 행과 행갈이의 묘미를 통해 시라는 것을 흠뻑 다시 맛보게 하는 진경을 펼쳐냅니다. 매화우 내릴 때 “순이가, 그만, 죄, 죄, 하며/발끝 오므린다.”의 ‘죄, 죄’도 그렇지만 시집 곳곳에 “팽창팽창” “첨벙!” “굴신굴신” “수북수북” “으앙!” 등등 의성어나 의태어의 돌연한 솟구침 하나로 시를 확 열어젖히는 대목들도 너무 좋더군요.

 

신용목 처음에는 세계의 폭력성에 맞물린 개인의 서사가 그려진 5,6부에 눈이 갔는데요. 나중에 뒤에서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니까 「사람들」 같은 시가 새삼 달리 느껴졌어요. 흐린 영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상처와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 근대사의 자궁”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끝내 왜 그런지, 당사자와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 처음엔 좀 의아했는데, 이야기하되 호명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심연을 만들어내는 저력이 느껴졌어요. 이제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투명함 속에 아주 맑은 ‘시대의 독’ 같은 것을 응축시키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대립과 대결을 통해 부각하기보다는 폭력성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그것을 자연으로 되돌려놓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정념이 포착하는 구체성의 세계가 결국 보편적인 세계로 치달아 함몰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안타까워했다가, 나중에는 그 무화된 세계에 각기 다른 배후가 스며 있는 것 같아 좋았어요. 「엉겅퀴」나 「수북수북」 같은 시에도 그 단서가 있고 「빈집」도 마찬가진데, 유추할 수 있는 역사가 있고, 유추할 수 있는 고통이 있겠지만 그것의 실체를 표면으로 불러들여 특수화하지 않으려는 태도? 궁극적으로 이름을 삭제함으로써 이름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 같았어요. 앞서 말씀하신 말을 운용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게 가장 직접 드러나는 시가 「봄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홍수 정말 그렇죠. 「봄색」에서 봄의 갖가지 분홍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아이처럼 맑아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달콤맵싸레연두비스무리분홍 밭머리.”라니요. ‘비스무리’라는 말이 이렇게 절묘하게 시에 들어올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시어의 한계랄까 표현의 한계를 어쩔 수 없이 수락하는 마음 한편으로 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신용목 「새5」나 「달」은 짧은 시인데, 하이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정홍수 「수달」은 짧지는 않은 시지만, 마지막 연을 “첨벙!/첨벙!”으로 끝내는 지점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행이 짧은 시들이 많은데, 말을 아끼고 행과 행의 여백을 품으면서 시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마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가운데 “나도 그렇게 비탈에 서 있음을.”(「나무」)이나 “검은 생각의/수면 위에/멍하니 떠 있는 배의”(「배」) 같은 구절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자기 좌표 점검이 떠밀린 기억들과 회환 속에서 밀도 높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최원식 이하석 시인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 그중에서도 후자에 더 가까운 시인으로 기억됩니다만, 이번 시집에서는 그 사이에서 슬그머니 이탈하여 서정시의 본령에 쓱 들어선 듯해요. 무심한 듯 유심히 시인의 감각과 사상에 무늬지는 삶의 결들에 자신을 너그럽게 열어두고 있어요. 이 양반도 확실히 은퇴한 것 같아.(웃음) 그중에 저는 「봄날」이 특히 좋았어요. 황사 속에 핀 꽃 한송이에서 봄의 핵심을 파악한. 이 시는 거의 지용(芝溶)이 재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정시의 명편입니다. 뭐 하나 더하고 뺄 수 없는, 침투 불가능한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가 그대로 툭 출현했어요.

 

정홍수 특히 마지막에 “그 소리의 언덕을 넘어가는//갈기 수런대는 말.”은 ‘말’의 이중적 의미를 충분히 살리면서 시인이 그 ‘갈기 수런대는 말’들과 함께 넘어가고 싶은 생의 어떤 진경, 시의 어떤 언덕을 깊은 울림으로 환기합니다. 정말 절창이죠.

 

최원식 이 시집 최고의 작품입니다.

 

정홍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룬 「가창댐」을 보면 “애비로서의 죽음을/그 아들딸로서 거두는 한”이라는 표현이 연마다 거듭 나옵니다. 얼핏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문장인데, 이념적인 차원에 기대지 않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장식이나 과장 없이 담으려는 마음이 무척 힘있게 다가왔습니다.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분노’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인이 자기 자신만의 눈, 생각, 언어를 오래도록 묵히고 담금질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용목 이하석 시인이 예전에는 대상을 내면으로 포획하는 시 쓰기를 했다면, 어느 순간에 대상을 그것이 떠나온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이 그 성공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식 그럼에도 불만을 얘기한다면, 분노·연민의 작품들과 「봄날」 같은 서정시 사이에 부조화가 있어요. 다시 말하면 전자가 「봄날」수준의 시적 성취를 이룬 것 같지는 않다는 거지요. 이 정도의 시력(詩歷)을 가진 시인이라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 묵직한 게 다가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보이네요. 마치 일기 쓰듯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힘 빼고 그날그날의 감각에 충성하는 것도 소중한 작업이긴 하지만, 대구에서 시 쓰는 중진시인의 다른 안목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욕심이 납니다.

 

정홍수 시집에서 많이 나오는 표현이 ‘어둠’ ‘바래다’, 시간으로는 ‘황혼’ 같은 것인데요, 「하얀 어둠」을 보아도 어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시인에게 특별히 중요한 무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나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얀 어둠’ ‘흰 어둠’이란 표현도 단순히 이미지의 차원에서 그려진 게 아니라 모종의 경계에서 모순과 맞서고 있는 시인의 현재적 긴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불만을 느끼신 지점이 이쪽도 보고 저쪽도 보는 그 경계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 싶은데요. 「대구탕」이라는 시가 있잖습니까. 대구라는 지역과 대구탕이 묘한 맥락을 갖고 시의 밑그림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사회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