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황석영 黃晳暎

1943년 만주 창춘(長春) 출생.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황석영 중단편전집』(전3권)을 비롯해 장편 『무기의 그늘』 『장길산』(전12권)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이 있음.

 

 

만각 스님

 

그해 여름에 나는 글을 쓸 거처를 찾고 있었다.

십년 가까이 끌어오던 연재소설의 마지막 장을 끝내야 했지만 도무지 일손이 잡히질 않았다. 참사가 벌어진 뒤에 나는 다른 지방에서 일년 넘게 지내다가 광주로 돌아와 다시 한해를 허송세월로 보냈다. 시내에 나가보아도 아는 이들은 여전히 잠적하거나 구속된 상태였다. 운 좋게 화를 피하고 남게 된 사람들은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되도록 당시의 참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외출해서도 누군가를 만나기가 불편하던 시절이었다. 아내는 내가 광주의 후유증에 휘말리고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게 될 것을 염려했다. 최군이 서울에서 내려와 있었고 아내는 그에게 내가 집필할 마땅한 장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찾아낸 곳은 담양에 있는 절집이었다. 담양은 광주에서 차로 삼십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영산강 상류의 제법 너른 개천과 왕대밭이 어우러진 조용한 읍이었다. 나는 이삿짐을 용달차에 싣고 최군과 함께 담양에 갔다. 이삿짐이라야 책상으로 쓸 접이식 플라스틱 밥상과 자료와 책과 책장이 전부였다. 읍내 끝자락의 다리 건너편 언덕 위에 그 절이 있었다. 오솔길 모퉁이에 ‘호국사’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소리 내어 절 이름을 읽어보고는 말했다.

지킬 호()에 나라 국()이라, 어쩐지 제목이 수상한데?

최는 그냥 무심하게 대꾸했다.

호국불교라는 말두 있잖아요.

트럭은 숨 가쁘게 매연을 토하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 절 마당에 들어섰다. 초입에 있는 방 한칸짜리 집에서 스님이 나왔다. 연이어 나란히 붙어 있는 한옥의 대청마루에서 풍채 좋은 할머니가 내다보았고 부엌에서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절의 요사채라기보다는 남도 어디에나 있는 일자 한옥의 살림집으로 보였다.

앞서 찾아왔던 최군이 나를 스님에게 소개했고 나는 그와 마주 서서 어색한 합장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은 원래 대처승 절집이었다는데 주승은 죽고 그의 안사람이 권리를 물려받았다. 작은 보살이라 부르는 몸매가 뚱뚱하고 후덕하게 생긴 육십대 초반의 할머니가 이 절의 주인인 셈이었고, 공양주 보살이라는 칠십대의 꼬부랑 할머니가 부엌살림을 맡고 있었다. 이 절의 유일한 승려는 이제 갓 환갑을 맞은 만각이라는 중이었는데 작은 보살이 그를 모셔다 놓았다고 했다. 암자라고는 해도 읍내 안에 있어서 재를 지내거나 치성 드리려고 오는 신도들도 제법 끊이질 않아서 이들 두 할머니와 스님의 말년이 고생스러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 식구가 하나 더 있는 걸 빼먹을 뻔했다. 복실이란 아홉살 먹은 계집아이가 살림집에서 두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내가 기거할 집채는 살림집 옆의 법당인 극락보전과 기역자처럼 엇갈려서 마당과 절 입구를 향하고 있었는데, 창호지 바른 방문 넷이 보이고 앞에는 툇마루가 길게 일직선으로 달려 있었다. 이 집채의 방은 모두 네칸인데 내가 쓸 방은 오른쪽의 방 두칸을 튼 상하방이었다. 두 방 가운데 미닫이가 있었지만 좌우로 열어두고 한 방처럼 쓰게 되어 있었다. 내 방 옆의 두 방들은 빈 방이었다. 말하자면 이곳이 그야말로 손님이나 승려들이 기거할 요사채의 꼴을 하고 있었다. 얼핏 듣기로는 그전에 고시생이나 입시생이 더러 기숙을 했다고 한다. 툇마루의 널판이 아직 거칠고 기둥도 나무색이 선명하니 아마도 절집이 조성된 뒤 가장 나중에 지었을 것이다.

최군과 내가 이삿짐 중에 가장 큰 책장을 맞들어 방 안에 들여놓으려고 쩔쩔매는데 스님이 달려들어 방문을 좌우로 활짝 열어젖히고는 우리를 거들어주었다. 책장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간신히 문지방을 넘어갔다. 책을 꽂고 책상을 펴놓고 트렁크에서 옷가지를 꺼내어 벽에 대충 걸고 나니 어느 틈에 저녁때가 다 되었다. 읍내도 살필 겸해서 최군을 배웅하려고 함께 절 경내를 나서려는데 살림집 앞의 평상에 앉았던 스님이 말했다.

공양 들지 않고 어디 나가시오?

네, 오늘은 읍내 나가서 먹을라구요.

스님 옆에 앉았던 작은 보살과 부엌문 앞에 섰던 공양주 보살이 차례로 말했다.

선생님은 이제 매일 자실 테지만 손님두 절밥 한번 잡숴보구 가요.

시방 표고랑 가죽잎 맛나게 튀겨놨어. 손두부도 지져놓고, 오늘 찬이 걸은디.

우리는 그저 웃어 보이며 가볍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얼른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언덕을 내려가 다리를 건너자마자 뚝방을 따라서 오일 장터가 나오고 상가와 식당이 늘어선 중앙통이었다. 거처를 찾아주고 이사까지 도와준 최군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광주까지 알려진 떡갈비 전문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소주를 마시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친구 잘 있지?

나는 윤의 서울 은신처를 아내가 주선한 것을 알고 있었고 최가 그의 마지막 행적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윤은 이미 동료들의 도움으로 마산에서 밀항선을 탔고, 언젠가 아내는 윤이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했었다. 최는 짐짓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누가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별호를 말했다.

합수 말야.

강이나 냇물이 합친다는 한자겠지만 전라도 곁말로 합수는 뒷간 거름을 뜻하는데 윤이 스스로를 잔뜩 낮춘 별명이었다. 최는 긴장한 표정으로 변하면서 얼른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손님 서넛을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건강하게 잘 있대요.

짧게 대답한 그가 내 술잔을 채웠다. 서로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동시에 마셨다. 최가 화제를 바꾸려고 딴소리를 했다.

인철이형이 입원했답니다.

김인철은 상원이가 죽던 날 도청에 함께 있었다. 그는 옆방에서 창문 전방을 지키고 있다가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칼빈 총을 층계 아래로 던지고 기어 내려갔다. 군인들이 사정없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짓찧었다. 상무대에서 응급치료만 받았고 달포 넘도록 거친 조사를 받았다. 우리는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지난 겨울 사면 때에 중죄인을 빼고는 거의가 교도소에서 나왔는데, 그는 나오자마자 아내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친정집이 있는 섬으로 가서 요양을 했다. 그런 중에 몇번이나 가출을 해서 그의 아내와 동네 사람들을 애먹였다고 한다. 육지로 나가는 부두 뱃머리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산을 타넘어 갔다가 섬의 반대편에서 방황하는 그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는 언행이 좀 이상하기는 해도 주위 사람들의 얼굴은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최군을 보내고 나는 절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아홉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사방이 고즈넉하고 풀벌레 소리만 어둠 속에 가득 찼다. 나는 모처럼 절에 왔으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생각이었다. 예불은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 참례하지 못하더라도 아침밥은 먹을 작정이었다. 일곱시쯤이라면 속세에서 출근하기 전에 아침 먹는 시간이지만 절에서는 늦은 시간이다. 나는 아침밥을 일주일에 두세번 먹을까 말까 하면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나마 그만둬버렸다. 역시 일상에 익숙해지면서 올빼미 같은 평소의 생활습관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열시쯤에 나는 침실로 정한 상하방의 아래 칸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호국사에서의 첫날 밤, 아마 새벽 두시가 넘었을 것이다. 소변이 마려워서 저절로 잠이 깼다. 사방이 캄캄한데 형광등의 점등 줄을 잡으려고 허공을 휘저어보다가 그냥 창문을 밀고 툇마루로 나섰다. 툇마루 아래 섬돌에 발을 딛는데 잠결에 잘못 디뎠는지 삐끗하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일어서려니 발목에 힘이 빠지고 아파서 땅을 디딜 수가 없었다. 변소는 그 집채의 왼편 끝에 있었다. 처마 밑에 잇대어 달아낸 헛간이었다. 안에는 목물을 할 만한 넓적한 구둘돌을 놓았고 함지도 있어서 나는 여름내 거기서 땀을 씻었다. 맨 안쪽 구석에 쪽문이 있는데 그게 변소였다. 헛간 문을 열었다가 어둠 속에서 전구를 어떻게 켤지 몰라 얼른 포기하고 돌아서서 풀숲에 오줌을 누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발목이 부어올라 복사뼈가 펑퍼짐해 보일 정도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욱신거리고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툇마루를 내려와 깨금발로 껑충거리며 외발뛰기를 하다가 잠시 쉬고 다시 그러는 양을 보고 만각 스님이 쫓아와서 부축해주었다. 그는 나를 평상에 앉혀주었다.

아니 어쩌다가 이리 되었소?

간밤에 변소 가려다 섬돌을 잘못 디뎠어요. 택시 좀 불러주십시오.

스님은 읍내 차부로 전화를 걸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여튼 여기 터가 쎄요.

제가 실수로 넘어졌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했지만 그는 더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통증도 견딜 수 없었지만 발목의 겉모양으로도 심상치 않아 보여서 나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어볼 작정이었다.

 

내가 절뚝이며 집에 들어서자 아내는 놀란 모양이었다.

좀 삔 거 같아. 별건 아닐 거요.

아내와 함께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다. 평소에 잘 아는 의사가 있어서 그의 주선으로 진찰도 받고 엑스레이도 찍었다. 결과가 나왔는데 골절이라고 했다. 발목을 삐끗한 것치고는 제법 중상을 입은 셈이다. 발목이 부러졌다고 말하면 모두들 놀랄 테지만 사실은 뼈에 살짝 금이 갔다고 한다. 깁스를 하고 달포쯤 지나서 다시 경과를 보자고 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한쪽 다리에 석고덩어리를 매달고 목발까지 짚게 되었다. 진찰과 치료가 끝나자 아내는 갑자기 생각난 듯 병원 로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참, 김인철씨가 입원했다던데.

우리는 원무과에 문의해서 그의 병실을 찾아갔다. 신경정신과의 병실 번호를 확인하고 아내가 먼저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고 안에서 오메,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철의 아내가 쫓아 나왔다. 그녀는 먼저 내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어디 다치셨어요?

아내가 내 대신 말했다.

넘어져서 골절됐답니다. 인철씨는 어때요?

그냥 그렇죠 뭐. 들어가보셔요.

그녀는 물기가 가득 고인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가만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