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중편 특집

 

공선옥 孔善玉

1963년 전남 곡성 출생. 199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시절들』 『수수밭으로 오세요』 『붉은 포대기』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이 있음. hahan7@hanmail.net

 

 

은주의 영화

  

내가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영화관엘 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지금 그 영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버지와 함께 영화관이 있는 길모퉁이 찻집에서 아버지는 커피를 마시고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가 떠오른다. 창밖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아버지가 문득, 딱 저런 길모퉁이였다, 내가 너희 엄마를 처음 본 게,라고 말했다. 나는 저런 길모퉁이에서 파란 제복을 입고 호각을 불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길을 건너오던 너희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가더라.

예뻐서 나는 호각소리를 더 크게 냈다. 너희 엄마가 한번 더 돌아볼까봐, 가슴을 졸였지. 정말로 돌아보더라. 숨이 멎을 뻔했지.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돌아보면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했던 순간이 내 영화의 시작이었다.

내가 두번째로 아버지와 영화관에 갔을 때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졸업식 날 나에게 특별히 해줄 것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중국 지아장커 감독의 「스틸라이프」를 봤다. ‘삼협호인’이라고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아버지와 짜장면집에 갔다. 중국영화를 보고 났으니 자동으로 중국음식을 먹으러 가게 된 것이다. 짜장면을 비비며 아버지가, 야, 좋다 좋아, 감탄사를 연발했다.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

아버지의 그 말이 또 내 영화의 시작이다. 나는 대학을 떨어졌다. 영화는 대학에 가서 배워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카메라 한대만 있으면 되겠지.

카메라가 없는데?라고 했더니,

까짓 거 한대 사지 뭐, 하고서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카메라 가게로 갔다. 옜다, 우리 딸 대학 떨어진 선물이다!

아버지가 내게 캠코더를 선물한 것이 또 내 영화의 시작이다. 그 캠코더 값을 갚는 데 아버지는 꼬박 열달이 걸렸다. 아버지도 나도 영화라는 것이 돈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영화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대학 영화과를 다 떨어지고 영화와는 아무 상관없는 도서관학과로 점수 맞춰 들어갔지만, 영화는 내 천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영화의 길은 요원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적어도, 엄마의 언니, 그러니까 나의 이모가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이라든가, 이모가 세들어 사는 집 옆방 아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든가, 엄마가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고 집을 나갔는데 우리 아버지 오중철씨가 집 나간 우리 엄마 이상순씨를 찾으러 갔다가 근무지 무단이탈로 직장에서 짤린 이야기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이 영화도 아닌 영상물을 보며 골방에서 거의 혈거를 방불케 하는 생활로 시간을 죽였던 것은 물론 내가 백수여서였다. 그런데 내가 매번 이 영상물을 보면서 경험한 이상한 현상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상한 현상들을 겪으며 이 영상물로 시간을 죽이는 동안 엄마의 돈 없는 생활의 공포에서 오는 나를 향한 공격과 습격은 간단없이 이어졌고 아버지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동생은 나보다 더 늙어갔고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극에 달했다.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한 그 영상물의 첫 장면은 이모가,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어. 하늘의 해, 닭백숙이 끓고 있는 솥,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는 나, 양손에 닭날개를 잡고 햇빛 속을 뚫고 걸어오는 아버지, 장독, 나뭇잎, 흙도 다 뜨거워서 나는 숨을 다 못 쉴 지경이 되어부렀단다.

이모의 억양은 엄마처럼 세지 않고 부드러웠다. 나는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어부렀단다, 하고서 이모는 정말로 숨이 가쁜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내 카메라는 무심했다. 나도 무심했다. 나는 아직 카메라 밖에 있었다.

 

손님은 아예 없는 날도 있고 그날같이 산 쪽의 참나무 두그루, 벚나무 한그루, 마당의 감나무 한그루 밑에 아버지가 만들어놓아둔 평상이 다 찰 때도 있어. 마당 감나무 밑 손님들이 닭날개를 잡고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아버지를 부르더라.

아저씨, 여기 얼마요?

저어기 우리 가시내한테 계산하십쇼이. 내가 지금 보시다시피 닭 잡니라고 정신이 없어서.

나는 아궁이에 불을 밀어넣고 손님에게로 종종거리고 가서 돈을 받지. 얼마요? 삼만원이요. 삼만원? 머시 그렇게 비싸?

돈을 치른 남자가 내 위아래를 훑어봐. 그러고는 침을 뱉듯이 물어. 아가씨 몇살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지. 그러면 얼라, 예쁜 아가씨가 장애가 있네이, 장애가 있어. 아이고, 아까워라 아까워. 그러면서 가. 니가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머시 아깝냐 새꺄, 이빨을 쑤시면서들 간다고. 그다음엔 또 참나무 아래서 보양탕을 먹던 사람들이 급하게 아버지를 부르더라고.

선천성이요, 다쳤소?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고는,

선천성은 아닌 게 다쳤다고 봐야제. 안 그러냐이?

다쳤다고 본다면 그 시점이 언젭니까? 내가 왜 시점을 묻냐면 요새는 의술이 좋아져서 저 정도 장애는 얼마든지 고칠 수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오늘 이 집 음식도 잘 먹고 내가 한번 좋은 일을 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다친 시점이……

오일팔 때 그랬습니다. 오일팔 때.

아, 그럼, 총 맞았어요?

어어어, 그것이 아니고오, 맥없이 맥없이 그랬단게애. 그냥 군인들이 퇴각험시로 뿔따구가 좀 났던개비여어. 왜 안 글겄소. 군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진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퇴각을 하니까 군인들 심정이 좀 안 좋았던갑서. 그래서 좀 화풀이를 한다고 한 것이 지나는 길에 장독아지도 좀 깨고 총질도 좀 하기는 했제이. 시내서는 뭐 많이 죽기도 죽었지마는 우리 동네서는 그저 닭 몇마리, 개새끼 몇마리 죽고 거 머시냐, 하여간 그뿐이여. 소소허다면 소소허제. 아, 근디 저것이 방에서 나오다가 달구새끼 죽는 것을 좀 봤던 모양이여. 그것이 뭣이 어쩐다고 심적 타격을 좀 얻었던 모양이라. 한창 예민한 사춘기 때라이, 그럴 수도 있어. 충격을 먹었는가, 그뒤로 저러요 안.

아버지가 그날따라 내가 다리 절게 된 사연을 길게 말하더라고. 날은 뜨겁더라. 날이 뜨거워서 내 속도 뜨거웠지. 꼭 아버지 때문은 아니라고.

오일팔 피해자그만, 피해자여.

앗따 그런 말 하지들 마쑈. 저 아래 누구집, 누구집 해서 죽은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디 우리집 가시내는 직접적 피해를 입은 것도 없고 단지 달구새끼 때문에 충격을 좀 먹은 것을 가지고 무슨 피해자는 피해자여. 어어어, 당최로다가 그런 말은……

사람들이 갑자기 ‘오일팔 이야기’에 열을 올리더라. 자기는 그때 어디 있었다, 무엇을 했다, 광주서 뭔 일 난지도 모르고 라면 끓여먹고 춤췄다, 라면 먹고 왜 춤을 추냐, 나도 모른다, 그냥 그랬다, 와글와글와글, 참나무 아래서 아주 신이 났더라. 신이 나 죽겠다가 또 아버지를 불러.

군인들이 그럴 때 아저씨는 뭐했어요?

나는 요아래 주막에서 술 묵고 있었지라.

앗따, 딸이 지금 죽게 생겼는디 너무 무심했던 것 아녀어?

참나무 아래 신난 인간들은 어느새 반말이야.

내 잘못이 많지라, 내가 죄가 많어노니.

딸은 이쁘게 생겼그만.

지 에미 닮아서 이쁘긴 이뻐라.

아줌마는 어딨어요?

진작에 가부렀어라. 쟈들 어려서 가부렀어.

새장가도 안 가고 아저씨 혼자 애들을 키웠어?

누가 이런 데 와서 고생하고 살라고 할랍디여?

아저씨, 여기 얼마야?

삼만 오천원인디, 삼만원만 줏쇼.

어이, 아가씨 일롸바, 오천원은 아가씨 줄게, 이뻐서 주는 거야이.

당최로다가 그러시면 안되는디이.

당최로다가 그러먼 안되는디이.

내가 집을 나서자, 아버지가 바쁜데 어디 가냐고 하더라. 그냥 간다고 했지. 아버지가 빨리 오너라 하더라고. 그럴게요, 했어. 아버지는 내가 진짜로 집을 나가는 걸 몰라서 그랬겠지. 가겟집 앞에까지 내려왔다가 아무래도 돈을 가지고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산중턱 집으로 다시 올라갔지. 아버지가, 왔냐? 얼른 보양탕 솥에 불 좀 너라. 나는 다시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땀을 흘리며 불을 땠단다, 오살할. 나에 비하면 니 엄마는 용감한 년이여.

 

오살할,이라고 이모가 말했을 때인 것 같다. 카메라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는 것 같았다. 아마 술기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한순간, 내가 카메라 속으로 쑤욱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카메라 속에서도 이모를 찍어야겠다고 카메라를 찾고 있었다.

 

엄마는 잘 기억나지 않아. 내 생각에 엄마도 아마 선한 사람이었을 거야. 사람들이 보통 악하기보다 선하기가 더 쉬운 법이니까. 아닌가? 악하기가 더 쉬운가? 나한테 엄마 사진이 있었어. 우리 버리고 간 나쁜 년 사진 보지 말라고 오빠가 빼앗아가서 갈기갈기 찢어버렸지만 사진 속 엄마 얼굴이 동글납작한 게 채송화같이 생겼어. 채송화같이 생긴 엄마가 악할 리가 없지. 채송화같이 생긴 엄마를 두들겨 패서 집 나가게 한 아버지도 나쁜 아버지는 아니야. 착해. 너희 아버지는 징그럽게 착한 사람이라고 동네사람들이 다 말했어. 그렇게 착한 아버지를 버린 너희 엄마가 복을 찬 것이라고.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말했지.

나의 실수였제. 그렇다고 나가버리냐, 어린 자식들이 울고 기다리는 줄 번연히 알면서이. 오면 좋겠지야만서도 와야 말이지. 인자 올 수도 없어. 니 엄마가 시집을 갔다더라는 말은 내가 했을 것이다이.

우리는 아버지한테 엄마가 시집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어. 그날 처음 들은 거야.

그런디 니 엄마가 시집가서 애기 낳고 잘 살다가 죽었다더라. 누가 가서 본 게 느그 엄마 애기들이 아직 어린디, 서럽게 울더란다.

아버지가 그 말을 했을 때 우리는 다 함께 울었단다. 엄마가 죽은 것은 별로 실감이 안 나. 엄마가 그리운지 아닌지도 무감각해. 근데 엄마 아이들이 서럽게 울었다는 대목에서 난데없이 서러워지더라고. 아부지와 나와 상순이가 그렇게 울고 있을 때 중학생인 오빠가 미친년 죽은 것이 뭐가 슬프다고 우냐,고 바가지를 집어던지더라.

오빠도 겉은 거칠지만 고운 속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어.

춥냐? 뭐가 춥다고 지랄이냐, 어깨 안 펴?, 스을, 펴라고 했다이. 안 피네, 일루와 콱 그냥, 피라면 피란 말이야.

우리 어깨를 잡아당기고는, 어디선가 구해온 빵이나 오징어다리 같은 것을 쓱 건네주곤 했단다.

니 엄마 상순이도 착했다이. 남의 것을 잘 훔치긴 했지만 인정은 많았지.

내가 언니 줄라고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갖고 왔으니까 먹어이.

가겟집에서 훔친 과자를 나한테 주는 거여, 저는 안 묵고 나한테. 가시내 망할 것 같으니라고. 흐흐흐.

 

이모가 웃었다. 분명히 카메라 속에서 이모가 웃었는데 현실에서의 나도 웃고 있었다.

돈도 못 버는 것이 뭐가 좋다고 처 웃냐, 웃기를. 내 등 뒤에서 언제 들어왔는지 엄마가 내 등짝을 후려쳤다.

카메라 꺼 이년아. 나가서 돈 벌려면 기어나와서 얼른 밥이나 처먹어.

엄마의 거친 언사는 날이 갈수록 그 도를 넘고 있다.

이력서 넣어놨으니 연락이 올 거라고.

연락 올 때까지 카메라만 들여다보고 있으시겠다?

그럼 어떡해. 딱히 할 일이 없는데. 밥 맛있네, 흐흐흐.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슬슬 미쳐가는구나.

내가 정말 미쳤나? 나는 정말 미친 척하면서 밥만 먹고 내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야이, 미친 가시내야, 니가 먹은 밥 설거지는 해얄 거 아녀어. 저년 수발 드니라고 쉬는 날 쉬지도 못해.

내 밥그릇 씻는 설거지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숨을 곳이 없다. 카메라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숨을 쉰다. 카메라가 큰 숨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카메라 속에서 카메라를 찾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카메라 속에서는 카메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카메라 속에서는 내가 카메라고 카메라가 이모다. 나는 이제 이모가 되었다.

 

나는 엄마를 집 나가게 한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아버지가 미워서 공부를 잘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내 머리가 원래 공부머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는 몰라도 초등학교 육학년 가을에 학교에서 돌아와서 작대기를 가지고 개와 함께 놀고 있는 나를 아버지 있는 쪽으로 오라고 손짓해서는 조용히 말했다.

니 오빠 공부시킬라니 할 수가 없구나, 상순이는 아직 어리고 니가 아부지를 도와줘야제,

나는 말 잘 듣는 딸처럼 순순히 그러겠다 했다. 순순히 그러겠다 해놓고 나는 벽장에 올라가 서럽게 울었다. 집 나간 엄마도 밉고 아버지도 밉고 오빠도 미웠다. 밉지만 그 미움을 나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산중턱에 있는 우리집 아래 도시를 내려다보곤 했다. 한낮에도, 저녁에도, 오밤중에도, 새벽에도. 새벽에 변소에 가려고 나온 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고, 거기서 뭔 생각을 그리 하냐,고 대수롭잖게 물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내 곁에 오지 않고 방으로 그냥 들어가버리는 것이 나는 견딜 수 없이 또 미워져서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산중턱 우리집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를 가만히 노려보고 앉아 있는 수밖에는, 노려보고 앉았다가 가슴 한복판을 꽝꽝 치거나 득득 긁는 수밖에는. 아무리 꽝꽝 치고 득득 긁어봐도 뭔가 스멀거리거나, 뭔가 따끔거리는 증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검정 페인트로 토종닭, 보양탕이라고 씌어진 나무 간판은 진작에 없어져버렸어도 사람들은 우리집에 토종닭과 보양탕을 먹으러 왔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 토종닭, 보양탕 솥에 불을 때고 손님들이 먹고 나간 그릇을 씻었다. 일을 다 끝내고 나면 돌아서서 개처럼, 아무 곳에나 대고 컹컹 짖었다. 으르릉, 혹은 가르릉도 해보다가 아무 데나 확, 침을 뱉었다. 그러면 가슴 한복판의 스멀거림이라든가 따끔거림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골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이가 생겼냐? 왜 득득 긁냐, 긁기를. 가슴은 또 왜 쳐, 맨날 처박혀 소화가 안되는 거여? 나는 아직도 내가 내 가슴을, 득득 긁다가 꽝꽝 치고 있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엄마의 비명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내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절대로 그러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이빨을 쑤시면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가다가 아깝다고 흰소리하는 인간들을 향해 침을 뱉었다고 말하는 이모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고 이모처럼 나도 저절로 그런 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엄마는 절규했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딸년이 엄마한테 침을 뱉네애, 침을 뱉아아. 나도 내가 당황스러워 이번에는 아예 문을 잠그고 말았다. 언제 온지도 모르게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나를 공격해오는 엄마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겁이 났다. 엄마 말대로 카메라만 들여다보고 살아서 내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인가. 취직을 하자, 취직을 해. 그렇지만 어디서 연락이 와야 취직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그러고 보니 내가 이 골방에서 목적도 없이 찍어온 이모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틀어박힌 지도 한달이 다 되어간다. 그 한달 동안 내게는 어디서도 연락이 없었다. 한달 전 아버지는 아침부터 술에 취해서 말했다. 고향이란 것은 돌아갈 곳이 못돼. 노래도 안 있냐, 돌아갈 갈 곳 못돼드라 내 고향이라고. 사는 게 지랄 맞아 부모 제사에 고향 한번 못 간다고 식전 댓바람부터 한 엄마의 잔소리가 아버지를 아침부터 술 마시게 한 이유가 되었다. 묵묵부답으로 술만 마시는 아버지한테 말이 통하지 않자 엄마의 잔소리는 결국 내게로 튀었다. 돈 벌기가 어디 쉽냐이, 니 나이 이제 서른이다, 나는 너를 열아홉에 낳았다, 남들 다 있는 애인이 너는 왜 없냐, 니가 무슨 돈으로 영화를 하냐, 회사에 취직을 해라, 고등도 안 나온 나도 살았다, 대학 나온 니가 뭣이 무섭냐…… 거의 융단폭격이었다. 내가 반응이 없자,

그놈의 카메라만 딜다보고 있는 것이 숫제 누집 개가 짖냐 식이제이? 뭣이 이쁘다고 카메라를 사줘, 사주길. 저놈의 카메라 때문에 헛바람이 들었어, 오중철이가 딸년을 베래놨어어, 베래놔아. 내가 저 웬수놈의 카메라를 그냥 콰악.

엄마가 카메라를 부실 기세로 돌진해왔고 나는 내 유일한 재산인 카메라 한대만 챙겨들고 집을 나와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던 것이다. 내가 광주 가는 버스에 막 몸을 실었을 때, 대학동기 경화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인터넷방송 <현장>에서 석달치 임금을 받지 못했다. 임금을 못 받았을뿐더러 어느 순간, 내 호주머니에서 취재비가 나가는 것이 분해서 <현장>을 그만두었다. 내가 그만둔 걸 모르는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나 하나쯤 그만둬도 상관없다는 건지, <현장>을 나온 지 일주일이 넘도록 <현장> 사람들 중 나한테 연락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화는 해외 다큐멘터리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구상중이라고 했다. 자본 위주의 도시에서 농업이 가지는 가치와 의의를 찾아서 도시농업을 하는 사람들을 취재하다가, 그들 중 게릴라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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