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화진
1960년 경기 파주 출생. 1987년 『전환기의 민족문학』으로 등단. 장편 『철강지대』, 소설집 『우리의 사랑은 들꽃처럼』 등이 있음. jhuajin@hanmail.net
기억하나요
바람이 모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그랬을까. 그저 제 길 가는 바람의 뒷목을 잡고 대거리라도 하려 했는가.
“응?”
옆자리의 동행이 고개를 내 쪽으로 잠깐 돌렸다. 그녀의 두손은 교과서적인 각도를 유지한 채로 얌전히 운전대 위에 놓여 있었다. 후두둑. 몇점의 빗방울이 부딪치더니 앞유리의 경사면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동행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 너머 어두운 하늘을 기웃거린다.
일기예보대로라면 태풍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물러가는 중이다. 차도 동쪽으로 가고 있다. 서울에서 출발할 즈음엔 바람 한점 없이 고요했는데 어느샌가 차가 태풍의 꽁무니 속을 파고든 모양이다. 바람과 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바람은 귓속이 울릴 만큼 난폭하게 차창을 두드리기도 하고 옆거울과 바퀴에 걸린 채로 새벽의 고속도로 위에 끌려가기도 한다. 쇳소리 비슷한 비명이 들리는 것도 같다. 내게 술기운이 남아 있는 걸 감안해도 분명 환청은 아니다. 바람이 뒤에서 밀면 차체가 살짝 좌우로 흔들리기도 했다. 간간이 비가 뿌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운전 중인 동행의 표정에 긴장감이 역력하다.
“교대할까?”
“농담이라도 고마워. 휴게소에 잠깐 들르지 뭐.”
동행이 마침 고속도로변 멀리 보이는 휴게소 표지판을 가리켰다. 살짝 웃는 입꼬리의 모양새가 그대로다. 소박하고 귀엽다. 우는 입꼬리도 변함없을까. 나는 잠시 그간 우리 사이에 비어 있던 세월의 거리를 잊을 뻔했다.
“어차피 여기서 잠깐 쉬어야 할 것 같아. 여기 지나면 두시간 동안 휴게소 없이 가야 하거든.”
동행이 가장자리로 차선을 바꾸며 말했다.
“커피 한잔해야겠어. 아니면 배도 부르니 졸음이 쏟아질지도 몰라.”
“그럽시다. 넉넉히 쉬었다 가지 뭐. 바람 잦아들 시간도 벌 겸.”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차 안에서 들리던 노래가사가 계속 귓전을 맴돈다.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듯 처음 들은 그 노래의 가락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휴게소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평일 새벽, 태풍이 지나간 고속도로 휴게소는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차만 몇대 있을 뿐 건물 밖으로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그래. 그래.
조금이라도 파인 곳마다 아직 흥건히 물이 고여 있었다. 웅덩이들 위로 듬성듬성 떨어지는 빗방울이 작은 파장들을 일으키고 있다. 갑자기 빗소리가 선명히 들린다. 어느새 곁에 와 선 동행이 내 머리 위에 우산을 드리웠다.
나는 그 우산을 대신 잡아 들고 한손을 뻗어 동행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기울어 있던 우산을 동행 쪽으로 숙였다. 마치 여태껏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순간 놀란 듯 잠시 멈춰 섰던 동행이 이내 내 등 뒤로 팔을 두르며 휴게소를 향해 종종거리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커피를 받아 들고 휴게소 밖으로 나왔을 때 빗줄기는 조금 더 굵어져 있었다. 사실 확실치는 않았다. 뭐랄까.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약간의 차이를 두고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정도였다. 물러나는 바람이 털어내는 물기 같기도 하다. 끝물의 수분을 떨구고 난 바람은 얇은 천이 되어 쉼없이 내 목을 감았다가는 곧 스르르 빠져나갔다.
동행이 두손으로 감싼 두툼한 종이컵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입김을 불면서 동행은 조심스럽게 한모금을 입에 담았다. 동시에 피어나는 그녀의 미소에서 만족감이 보인다. 나도 한모금의 커피를 입에 붓고 혀를 굴렸다. 작은 얼음조각들이 혀와 이 사이에서 또르르 구른다.
바람이 좀더 찼으면. 따뜻한 커피에 위로받고 있는 여자를 옆에 두고 불쑥 든 상념에 스스로 무안해진다. 나는 담배를 한개비 빼어 들고 멀리 가로등 아래의 흡연부스를 가리켰다.
동행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여전히 한기를 느끼는지 한손을 풀어 반대편 팔을 문질렀다. 나는 그 손을 잡아 내 등허리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좀 따뜻하지?”
흡연부스 안에 들어가 앉기 전까지 동행은 내 어깨 뒤에 몸을 밀착한 채 걸었다. 아주 오래전 익숙했던 어느날들의 장면이었다. 내 팔에 어깨를 바짝 붙이고 걷거나 혹은 반걸음쯤 뒤에서 끈에 연결되기라도 한 듯 터덜터덜 따라오던 그녀와의 산책.
“변하지 않았네.”
“뭐가?”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미소짓는 동행의 눈가에 서너겹의 주름이 잡혔다.
“오빠인 양 늘 내 손을 먼저 잡아끌던 버릇 말이야. 나이도 어리면서.”
내 손끝을 벗어난 담배연기가 그녀의 이마 위 하얗게 드러난 머리카락 뿌리 언저리를 맴돌다 사라졌다.
“나 한모금만 줘.”
동행이 담배를 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이 사람이 담배를 피웠던가. 내가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려 애쓰는 동안 그녀가 입안에만 담아두었던 연기를 서둘러 허공으로 뿜어냈다.
“기억 안 나? 그때도 흉내내고 싶어서 어쩌다 한번씩 뻐끔했던 거. 이렇게 네가 피우고 있는 것을 뺏어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내겐 조각으로 흩어진 사소한 기억들이 그녀에겐 아직도 완전한 프레임의 영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장면의 마지막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동행의 허리에 머무른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간지럼을 못 이겨 나이 육십의 여인이 자지러진다. 스무살 사내놈의 장난기에 맥없이 무너지던 스물다섯 그때처럼.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미사리를 지날 때였던가. 서울을 빠져나오기 전 차 안에서 동행이 잠꼬대처럼 한 말이었다. 그렇지. 서울 같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옛 연인과 마주치는 것은 사실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 테니까. 게다가 그 공백이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은 삼십년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
나는 지난밤 꿈의 한자락을 떠올렸다. 마지막 출근을 앞둔 날이라 생각이 많아서였는지 유독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러저러한 꿈들을 꾸었는데 유독 마지막에 찾아온 꿈만은 모든 장면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한데 지난밤에 내가 이 사람도 보았던가.
한무리의 사람들과 술을 마시던 나는 담배를 사기 위해 술집을 나섰다. 그들이 누구인지 확신이 없다. 그저 막연히 친구들일 거라 생각할 뿐이다. 자신들의 것을 함께 나눠 피우자며 만류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문을 열고 나오기는 했는데 아무리 걸어도 담뱃가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 속의 도로에 갇혀버렸다. 담배고 뭐고 그저 되돌아갈 생각뿐.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돌려봐도 내가 어느곳으로부터 왔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어 망연자실해 있던 그때, 도로 맞은편이라 짐작되는 한 지점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조심스레 한발씩 내디디며 간신히 찾아간 그곳은 작은 건물의 경비실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내들이 동시에 나를 보며 묻는다. 무슨 일이냐고.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켜보기는 하지만 내가 있던 술집의 이름은커녕 동네도 기억하지 못해 수조 안에 갇힌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나와 마주한 채 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뒤의 벽을 치자 놀랍게도 쪽문이 열렸다. 그 너머가 환하다. 사내가 손바닥을 펴 안쪽을 가리킨다. 난 구세주라도 만난 심정으로 몸을 웅크려 쪽문 안으로 들어섰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사무실이었다. 드높은 천장은 형광등으로 가득했다. 눈이 부셔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비어 있는 책상 하나가 보였다. 내가 앉을 자리인가 하고 다가가려 한다.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내게 몰려오기 시작한다. 벌거숭이로 냇가를 누비던 불알친구들부터 동창들, 내가 거쳤던 몇 회사의 동료들, 옛 애인들과 지금은 곁에 없는 마누라까지. 남자들은 모두 팔을 벌려 달려와 내 어깨를 감쌌고 여자들은 하나같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