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다시, 웅성거림의 문학

 

 

김요섭 金曜燮

문학평론가. 2015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최근 평론으로 「역사, 그리고 동원되는 기억과 이야기꾼」 등이 있음. old_postcard@naver.com

 

 

1. 보이는 것과 떠도는 말들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오늘의 문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문학이 무엇을 목도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는 문학이 닫힌 세계의 자기반복이 아니라 세계로의 열림을 통해 그 형상과 효용을 가다듬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에 대한 물음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세계로 열린 문학의 본원적 성질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복되는 물음을 통해 생각해보건대 오늘날 문학이 마주한 것은 ‘세월호 이후’인가? 이 자명해 보이는 사실을 되짚어봐야 한다.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실상 경합하고 있는 말들 위를 떠다니며 다른 자리에 놓이곤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모든 이가 보았다. 활자와 영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매체가 어두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배의 형상으로 가득 찼다. 그러므로 모든 이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의 침몰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는 2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온전히 합의되지 못했다. 세월호를 둘러싼 말들은 바다가 집어삼킨 배를 각각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낸다. 박민규(朴玟奎)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지적했듯이 세월호 침몰은 ‘사고’와 ‘사건’ 프레임의 경합 속에 있다. 사고의 프레임 속 세월호는 ‘뜻밖의 불행한 일’로 남을 테지만 사건의 프레임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임을 포착한다.1) 사고의 프레임 속에서 세월호는 앞선 수많은 사고 목록의 뒷자리로 기입된다. 그것은 익숙히 보아왔고 반복되었던 사고로 남을 뿐이다.

사건들은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사건의 형상에 대한 다층적인 ‘부인’(denial)의 언어들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사건에서는 ‘세월호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라고 평가절하하는 ‘피해부인’을 비롯한 여러 부인의 언어가 교차하며 사건의 고유성을 지워갔다.2) 이러한 부인은 세월호사건에서만 예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가 목도했던 여러 비극들, 가깝게는 강남역과 구의역의 슬픔부터 조금 멀게는 용산의 화마, 굴뚝 위로 내몰린 노동과 추락해 사라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생활들 모두가 겪은 상황이었다. 사회의 뒤틀린 구조에서 기인한 이 사건들은 우연하고 예외적이며 개인적인 사고로 격하됐다. 일상을 가득 채울 만큼 반복적으로 재생됐어도, 그 해석의 층위를 비롯해 다양한 부인의 언어 사이에 놓임으로써 ‘사건’으로 인식되지는 못했다. 인식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중간지대에 놓일 수 있으며 사실에 대한 지각과 그에 대한 부인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3) 따라서 매체가 이러한 정보를 아무리 실어나르더라도 그 고유한 비극성은 대부분 가라앉아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았다고 말해온 ‘세월호 이후’란 무엇이었나? 다시 박민규의 표현을 빌려, ‘사고’로 보는 현실 속에서 ‘사건’을 발견한 것인가? 많은 이들이 추적해간 진실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세월호 이후’의 전부가 아니다. 뒤를 이은 애도의 형식들, 강남역과 구의역의 슬픔을 나누는 글과 말의 범람은 한 사건 이상의 무엇을 보았음을 증명한다. 한국사회는 세월호를 통해 사건을 사고로 남겨두려는 국가의 말과, 사고가 사건임을 증명하려는 시민의 말 사이의 충돌을 보았다. 시민의 목소리는 새로운 애도의 공간인 광화문광장에서 아직도 잔존한 사고의 프레임을 계속 밀어내고 있다. 경합하는 말들이 보여준 애도와 기억의 형식은 또다른 애도로 재현되었다.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강남역은 애도의 공간이자 페미니즘의 언어로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담론의 장소였다. 구의역, 한 청년의 죽음은 위태로운 청년세대의 노동현실로 기억되었다. 반복되는 사고 기록 중 하나로 사라질 비극의 실체가 인식의 경계 위를 떠도는 말들을 통해서 시선 위로 부상한 것이다. 오래된 해석과 이해를 가르고 다른 형상들을 보이게 하는 애도와 기억의 목소리들이야말로 ‘세월호 이후’의 풍경이다.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말들의 경합은 현실의 병리를 고발하는 작업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인의 언어는 한 사회가 공적 기억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사회는 고유한 질서를 통해 삶들의 경계를 나누고 배치하며 그 사회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나누어놓는다.4) 이러한 사회의 경계선은 고유한 이해 방식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부인의 언어로 기능하기도 한다. 즉 어떤 사회에서 어떤 비극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비극을 보이게 하려는 말들은 곧 사회의 나눔을 뒤흔들어놓는 것, 즉 ‘정치’를 실행한다.

랑씨에르( J. Rancière)는 권력의 통치행위인 ‘치안’(police)과 구분되는 ‘정치’(la politique) 개념을 제시한다.5) ‘정치’란 공동체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과정이다.6) 공동체의 시선 밖에 자리하고 있던 비극을 가시성의 영역 안에 배치하려는 말들은 공동체의 나눔을 새로이 하는 시도이며 곧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치의 실현은 말의 능력을 확보하는 ‘주체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7) 즉 정치를 실행하는 말들의 발생은 스스로 공동체의 질서에 개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정치적 주체들에 의한 것이다. 세월호 이후 일련의 정치의 작동은 주체화의 과정과 맞물려 있다. 세월호의 진실을 묻고 여성의 삶을 되물으며 청년의 노동을 애도하는 그 주체의 목소리들과.

이 떠도는 목소리들의 정체성은 분명하지 않다. 계급이나 젠더, 세대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주체화가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을 벗어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8)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자리를 부여하여 정체성을 창출한다. 반면에 주체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공동체의 경계선을 뒤흔들어 새로운 경계와 자리로 나눈다. 이렇게 공동체의 나눔을 새롭게 하는 주체에게 정체성의 규정은 무의미하다. 정체성의 자리를 비워둔 채 말들로 확인되는 주체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주체에 근접한 것이 강경석(姜敬錫)의 논의다. 그는 “공동체를 통어하고 있던 규범이나 제도, 코드, 정체성의 동요로부터 가시화”되어 타자의 고통에 감응하는 연대의 주체로서의 ‘민중’ 개념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 이러한 민중 개념의 설정이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기 위함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공동체가 은폐하는 고통의 실체가 드러날 때 다른 공동체에 대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