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중편 특집

 

 

김엄지

1988년 서울 출생.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장편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등이 있음. 동인 ‘무가치’에서 활동 중. thea18@naver.com

 

 

 

비오는 거리

 

 

1

 

비가 그치지 않아서 사람들은 화가 났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사람들은 무서웠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사람들은 슬펐다. 슬픈 사람들은 갑자기 기뻐지기도 했다.

800미터 거리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지면 신이 난 비명이 시작되었다. 여자, 남자, 어린아이, 비명은 비명으로 이어졌다.

비오는 거리는 주기적으로 정전되었다.

비오는 거리에 바닥분수는 불규칙하게 가동되었다.

어두움 속에서 비와 우박이 솟구쳤다.

비오는 거리에 공중전화 부스는 34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너한테 갈게. 너도 내가 보고 싶지?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나도 바쁜 사람이고 미련은 없어. 이런 식으로 사람 무시하면 너 벌받아.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해. 나한테 화를 내. 남자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화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너는 지금 나한테 우를 범하고 있는 거야. 우! 우! 남자는 고함쳤다.

비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고함쳤다.

걸으면서, 멈춰 서서, 허공에, 길바닥에, 우산과 가로등, 죽어 있는 쥐나 새, 개, 수화기에, 한무리의 일행이 서로 한대씩 뺨을 때리면서 고함쳤다.

고함치면서 길 끝에서 길 끝으로 달렸다.

미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주말이면 비오는 거리로 향했다.

어떤 연인은 비오는 거리로 나서기 전에 약속했다. 해서는 안될 말이면 거기 가서도 하지 마. 못 들은 척할 수 없을 것 같아. 비오는 거리에 갈 각오가 덜 되었나봐. 심약한 여자가 남자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남자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 누구든 비오는 거리에서는 남기지 않고 고백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리고 각오가 덜 된 여자는 비오는 거리에서 모두 용납할 수 있는 기분이 된다. 괜찮아. 다 괜찮아. 눈물 흘리면서, 눈물이 뜨겁다고 생각하면서,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내가 아닌 것 같았어요. 술은 마시지 않았어요. 나는 나를 바라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었어요. 유체이탈은 아니었고요. 내가 나보다 커진 느낌이었어요. 불편함은 없었어요. 여자는 말했다.

오류, 비오는 거리는 오류 자체입니다. 비오는 거리는 이제 하나의 세계가 되었고, 그곳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통제 불가능이 그 거리의 법이 되었습니다. 비행과 범죄가 빈번한 거리는 지역마다 존재합니다. 그러나 비오는 거리는 비라는 특수성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지난달 벌어진 몇건의 사건으로 비오는 거리가 더이상 기상·환경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예상보다 더 오래 비오는 거리를 제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오는 거리에서 비롯되는 악의 문제, 그 대비책은 각자 강구해야 합니다. 각자 개인의 윤리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오는 거리에 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요. 설령 피치 못해 가게 되더라도 되도록 빨리 돌아오는 것이 좋겠죠. 무리지어 다니지 마십시오. 학계는 비오는 거리에서 비롯되는 사회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각자의 몫으로 돌렸다.

각자. 각자. 각자. 비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각자 걸었다.

비오는 거리에서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다.

비오는 거리가 위험한 이유는 어두움과 짙은 안개 때문이었다. 800미터 거리에는 12대의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12대 모두 무용했다.

사람들은 넘어질 마음으로 핸드폰과 지갑 없이 비오는 거리로 향했다.

비오는 거리에 매일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열흘에 한번, 보름에 한번, 비가 그쳤다. 안개 속으로 햇볕이 들기도 했다. 안개와 안개 속으로 옅은 빛줄기가 내리고 고인 물웅덩이마다 무성한 풀이 비치기도 했다. 거리는 짙은 풀냄새로 가득했다.

부랑자, 토하고 쓰러진 남자, 자살하지 못한 남자가 밤새 거리에서 비를 맞았다.

 

 

2

 

사건이 나를 인도하기를, 사건을 기다리고, 벌어진 사건 뒤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살 것이다. 나는 나를 사건들 속으로 내던질 것이다. 사건들 속에 나를 방치할 것이고 궁극에는 내가 사건이 될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간절히 먹고 싶은 것이 있기는 하다. 당장에 콩국수. 당장에 김치전. 먹고 싶으니 먹을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지 않은 일을 망설이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높게 자란 풀 속에 누울 것이다. 옷을 다 벗고 누워도 상관없을 것이고 그러니 옷을 다 벗을 것이다. 얼마나 시원할지 기대가 된다. 진작부터 무어라도 기대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그 무엇이라도 일분일초. 보고 싶은 사람 당장에 김윤주. 눈물이 흐른다. 요즘은 이렇게 아무 기분 없이 눈물이 흐른다. 별안간 울어. 왜 아무 기분 없이 눈물이 흐르는지, 일단 시작되면 잘 멈추지를 않는다. 재앙은 아니다. 눈두덩이 짓무를 뿐이다. 재앙은 없다. 잠들기 전에 비오는 거리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AUSB에 ‘비오는 거리’가 포함된 파일은 총 67건이었다.

A의 노트는 22권이었고 모든 기록에 파란색 볼펜이 사용되었다.

A의 방은 2개였다. 작은방에서 그는 주로 생활했다.

A의 큰방에는 잡다한 집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A는 집기들 사이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A는 집기들 사이에서 1000피스 퍼즐을 맞추기도 했다.

A는 맞춘 퍼즐을 다시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A는 통조림과 레토르트, 냉동식품을 먹으며 생활했다.

A는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A는 말수가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A는 탁구를 좋아했다.

A는 운동신경이 잘 발달되었다.

A는 야위었으나 건강했다.

A의 얼굴에는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근심이 있었다.

A의 걱정은 너무 덥다거나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A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열이 많은 체질이었다.

A는 자기 심장을 걱정했다.

A의 걱정은 어김없이 공상으로 이어졌다.

A의 공상은 구체적이었다.

A는 희망적인 공상과 위험한 공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사실 그 둘은 같은 것이었다.

 

죽고싶다죽을수있을까매일죽고싶다왜매일죽고싶을까죽고싶은만큼죽고싶다여기서죽고싶다눈은감고죽고싶다못죽을거알면서아는데죽고싶다주저없이죽고싶다언제끝이날까관둘수있을까. 자문하는 것인가. 자위하는 것인가. 그만해야 한다. 단어가 곧 판단이 되지는 않는다. 판단해야 한다.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결심은 심장에 좋지 않다. 나는 끊임없이 내 심장에 좋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이다. 이제 숨쉬는 것도 결심 없이 되지 않는다. 숨을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해야 숨을 멈출 수 있는 것처럼 숨을 쉬겠다고 생각해야 숨이 쉬어진다. 내가 잠자는 동안 죽지 않는 이유는, 자는 동안에도 숨쉬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은 없다.

 

A는 간밤의 열대야와 높은 습도에 연일 잠을 설쳤다.

A는 잠들기 위해서 유리공예와 우주에 대한 동영상을 시청했다.

A는 두세시간 동안 동영상을 보았다.

A는 유리가 우주 같고 우주가 유리 같다고 생각했다.

A는 유리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지만, 그 둘이 아주 같거나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A는 평일에도 비오는 거리로 향했다.

A는 비오는 거리에서 우산 없이 걸었다. 걷다가 눕기도 했다.

A는 조금 더 편하게 눕기 위해서 비오는 거리에 구덩이를 팠다.

A는 비오는 거리에서 노인을 보기도 했다.

A는 노인을 보았다기보다 노인을 느꼈다.

 

노인이 내 앞에 있었고, 혹은 내 옆이나 뒤, 그러니까 노인과 나는 같은 안개 속에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세요. 위험합니다. 위험해요. 나는 몇번 노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노인이 나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노인을 향해 말했지만 허공을 향해 말했을 수도 있다. 그 노인은 선 채로 죽어버린 것인지 움직이질 않았다.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의 숨소리가 아니라면 바람이었을 텐데, 그렇게 얕고 낮고 사람 숨 같은 바람이 있을까. 사람의 것이되 늙은 것이었다. 노인들이 장기를 두는 저 공터. 저 벤치. 저 보도블록. 저들은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이 맞는가. 노인들은 한데 모여 깔려 죽은 새를 구경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그렇게 새를 깔아대는 것일까. 근래 내 주위에서 새가 자주 죽는다. 새가 꼭 내 주위에서만 죽는 것은 아닐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편의점 입구에서 죽은 새를 보았다. 그런 날이 4일 연속 이어졌다. 4일째는 기어이 밟았다. 나도 모르게 밟은 것이었다. 새는 땅바닥에 들러붙어 있어서 거의 땅바닥과 같은 상태였다. 경고거나 직접적인 경보라고 느껴졌지만 흥분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자야 한다. 잘 자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A의 결심과는 다르게 방에 들어와 눕자 눈물이 흘렀다.

 

내 뜻과 다른 나의 것, 나의 것이 아닌 나의 뜻, 나에게 없는 뜻이 내 밖으로 흐르고, 나는 짓무른 눈두덩을 찬물로 씻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수하는 것이다.

 

A는 비오는 거리에서 아이들을 보기도 했다.

A는 아이들을 보았다기보다 아이들을 느꼈다.

 

비오는 거리에서 아이들은 달린다. 달리다 넘어지면 아이들은 울지 않고 웃는다. 일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넘어진 그 모양 그대로 누워서 웃는다. 아이들 웃음소리는 높고 멀리 가고, 그래서 내가 비오는 거리 어디에서 땅을 파든 간에, 그 웃음소리가 아이들의 것이라면 들리게 마련이다. 너 그만 웃어라,라고 말한 적은 없고, 윤주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윤주가 웃으면 옥주가 웃고 윤주와 옥주의 엄마도 웃었다. 아마 나도 그들 주위 어딘가에서 웃었던 것 같다. 우리는 같이 찐 감자를 먹었다. 웃을 때 찐 감자 뜨거운 김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윤주 엄마의 이름은 이제 내 기억에 없다. 윤주 엄마의 성이 곽이었는지 노였는지, 곽과 노는 비슷하지도 않은데, 곽노자였거나 곽노희, 곽노순이었을 수 있겠지. 노곽자는 아닐 것 같다. 윤주 엄마의 이름을 짐작하는 일은 유쾌하다. 낄낄거리면서 웃고 있는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안과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안과보다 차라리 바다에 갈 것이다. 소금물은 짓무른 눈두덩에 좋을 것이다. 소금물에서 수영한다면 눈물이 멈출 것이다. 눈물 아니라면, 눈물 아닌 무엇이라도 멈출 것이다. 나는 무엇이라도 멈춰야 한다. 눈물보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바다는 좋다. 그러나 바다는 멀다. 바다는 비오는 거리와 멀고, 나의 구덩이와 멀다. 비오는 거리에 나의 구덩이는 총 네개이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사람들은 무방비하게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머지않아 바다와 비오는 거리 중에 선택해야 할 것이다. 둘 중에 한곳에서만 나는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살고는 있지만, 바다나 비오는 거리, 둘 중 한곳을 선택한다면 지금보다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해변에서는 구덩이를 파는 일이 소용없을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내 하루 일과인 구덩이를 지울 것이다. 해변의 해무는 비오는 거리의 안개만큼 멋질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해가 뜨고 지고 분명하지 않은 달이 뜨고 지면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속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하지 않은 해는 어쩌면 분명한 달일 수 있고, 분명하지 않은 달로 보이는 것은 분명한 해일 수도 있다. 분명하건 분명하지 않건 그것은 하루이고, 나는 하루를 산 것이다.

 

 

3

 

비오는 거리에 비는 우박으로 바뀌기도 했다.

A는 우박을 받아먹기 위해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렸다.

A는 입안의 우박이 별사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달지 않아서 더 좋다. A는 생각했다.

나는 언제 별사탕을 먹었던가. A는 생각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별사탕을 왜 먹었던가. A는 생각했다.

A는 입안의 우박을 투, 투 뱉었다.

A는 잠이 오기도 했다.

A는 잠이 오면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누워 눈을 감았다.

A는 옆으로 몸을 말아 누웠다.

옆으로 누운 A의 귀로 우박과 비가 떨어졌다.

비는 아주 옅게 내리기도 했다. 주위에 안개뿐이구나. A는 조금 잤다.

A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육교를 올랐다.

비오는 거리 위에 육교가 있었고, 육교는 다리와 이어졌다. 다리는 강을 가로질러 팔차선 도로를 형성하고 있었고, 팔차선 도로 옆에는 소음방지벽과 인도가 있었다. 다리의 난간 앞에 서면 작은 파편 같은 간판들, 교차된 또다른 다리와 다리 위의 차, 불규칙한 빛들과 빛을 반사하는 강이 내려다보였다.

사람들은 다리 위에서 비오는 거리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비오는 거리는 볼 만한 것이었다.

희미하고 아득하게, 야광우비를 입고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주말이면 커다란 장비를 가진 사람들이 다리 위의 특정 구역에 몰렸다. 강을 향해, 비오는 거리를 향해, 빛을 향해, 장비들을 세워놓고, 초점을 맞추고, 초점을 흐리고, 커다란 우산 속에서 두세시간, 다섯시간, 밤을 새워 촬영했다.

A도 언젠가 비오는 거리를 촬영한 적이 있었다.

A는 안개 속에서 반복적인 움직임을 보았다.

유에프오인가. A는 반복의 정체를 추측해보았다.

유에프오는 아닐 것이다. 유에프오는 하늘에서 발견되기 마련이다. A27컷 찍었다.

A가 보았던 반복은 유에프오가 아니었고, 사람이었다. 야광우비를 입고 바닥분수에서 제자리 점프를 하는 사람이었다.

 

어제는 다리 위에서 떨어지려는 여자를 보았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나는 그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 여자와 나는 바닥에 함께 쓰러져 바닥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그 여자는 순식간에 내 위에 기어올라와 내 목을 졸랐다. 나도 그 여자 목을 조르고 싶었는데 조르지 않았다. 그 여자를 밀치지도 않았다. 나는 마냥 목 졸리고 있었다. 만약에 그 여자가 정말 그 강으로 뛰어들려는 계획이었다면, 죽고 싶은 사람을 살려놨으니 난 목이 졸려도 싸지. 남의 생사에 끼어드는 일은 월권이다. 내가 오만했다. 번뜩이는 그 여자 눈. 그 여자는 여자 같지 않았고, 사람 같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와 눈 마주치고 있기가 힘들어서 눈을 감았다. 그런 순간에도 생각은 가능했다. 나는 눈 감고 목 졸리면서, 이 여자는 강으로 떨어지려고 다리 위에 올라간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뒤에서 자기를 끌어안는 사람이 있거든 그게 누구든지 목을 조를 계획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을 조르기 위해서 다리를 걷다가 난간 앞에 멈춰 서서 강을 바라보고 있었겠지.

 

 

4

 

경선은 A의 목을 조르기 전에,

우산 없이 비 맞으며 다리 위로 가기 전에,

난간을 붙잡고 서서 강을 내려다보며 아아, 아아, 울부짖기 전에,

경선은 분노와 관련된 강연에 참석했다.

경선은 이혼 후에 이런저런 강연에 참석했다.

경선은 이런저런 그런 강연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선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선은 도움이 필요해서 무용학원, 미술학원, 요가학원을 동시에 등록하기도 했다.

경선은 도움이 필요해서 매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경선은 앞에서 네번째 좌석에 앉아 있었다.

분노하는 마음을 접으세요. 기다란 장우산을 떠올려볼까요. 착, 하고 접히는 거예요.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경선은 아무것도 접을 수 없었다.

의지를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버튼을 상상해야 합니다. 누르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자동식 버튼이요. 버튼에 색을 입혀줘도 좋고요. 버튼을 누르는 감촉을 상상해도 좋습니다. 버튼에 대한 상상이 구체적일수록 분노 제어에는 효과가 좋습니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 우리는 화를 감지하고, 그때 마음의 버튼을 꽉 누르는 것입니다. 강연을 진행하는 여자는 허공에서 무언가 누르는 제스처를 취했다. 진행자는 중년이었고, 안경을 썼으며, 빨간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강연 참석자는 많지 않았다. 좌석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경선은 강연에 집중했지만, 가끔 창밖을 보기도 했다. 비가 요란하게 내렸기 때문이다.

타인을 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간단하죠. 물리적인 것은 언제나 간단합니다. 그에 반해 정신적인 것은 복잡합니다. 좀처럼 결정이 되지 않죠. 오래전에 결론이 났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사실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 실수가 꿈에서의 일인지, 현실에서의 일인지 분명하지 않은 날도 있지요. 남편, 아내의 존재는 어떤가요? 그네들이 살아 있음을 제외하고는 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또 분명하지 않다는 것,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속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여자, 그 남자는 내가 겪은 사람이고 내가 선택한 사람임에도 말입니다.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막연함은 우리들 화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화가 날 때에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화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화를 바라봐야 합니다. 너 지금 화가 났구나, 자신을 보듬어야 합니다. 강연을 진행하는 여자는 무엇인가 끌어안는 제스처를 취했다.

화에 대한 태도 중 가장 좋지 않은 것은, 화를 참는 것입니다. 무작정 참는다고 될 일인가요? 참다보면 치밀어오는 새로운 화와 마주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왜 참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왜 참아야 하나, 하는 생각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마나한 생각입니다. 사실 참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참아야 할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참지 않아도 될 이유가 더 많이 떠오르게 됩니다.

경선은 바로 앞좌석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강연이 끝나고 진행자는 참석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기도 했다.

강연장의 출구에는 비쩍 마른 남자가 ‘22세기 호흡’ 퍼포먼스 안내장을 나누어주고 있었고, 경선은 한장 받았다.

강연장을 완전히 빠져나온 경선은 낙지전문점이 길게 늘어선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습하고 뜨겁고 매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경선은 허기졌다. 분노보다 허기가 먼저라고, 경선은 생각했다.

허기를 인정해야 한다. 너 지금 허기지구나. 경선은 낙지전문점 유리에 나열된 메뉴를 읽었다.

 

낙지철판볶음

낙지전골

산낙지

낙지해물파전

낙지덮밥

낙지비빔밥

소주

맥주

막걸리

 

경선은 낙지덮밥이나 낙지비빔밥을 먹을까 고민했다.

소주 맥주 막걸리를 마실까 고민했다.

경선은 결정하지 못했다.

경선은 낙지보다는 가벼운 것을 먹고 싶었다.

경선은 샌드위치를 떠올렸다.

경선은 제과점으로 가려다 마트로 향했다. 경선은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고 싶었다.

오이를 많이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야겠다고 경선은 생각했다.

경선은 도마에 오이와 사과, 양파, 토마토를 슬라이스로 써는 상상을 했다.

경선은 참치, 마요네즈, 콘을 볼에 넣고 섞는 상상을 했다.

삭삭 썰고, 슥슥 섞는 상상은 경선의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경선은 자기 기분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게 뭐지, 경선은 자기가 하던 생각을 멈추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 거슬러 생각해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경선은 집과 가까운 마트를 향해 걸었다.

경선은 샌들을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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