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위기의 자본주의, 전환의 계기들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교육개혁의 길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웃음의 해석학』 『연대와 열광』 『시대유감』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좌충우돌』, 편서 『87년체제론』 등이 있음. jykim@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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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순간 현재를 살아가지만, 과거는 경험을 통해, 미래는 기대를 매개해서 현재로 스며든다. 현재는 경험과 기대가 교차하는 순간인 것이다. 경험과 기대는 서로를 조건짓지만 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만일 경험이 기대를 완전히 결정한다면, 미래는 닫힌 것이 되며, 그 경우 삶은 권태의 지속 또는 탈출구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1) 반대로 미래가 너무 개방적이어서 경험으로부터 어떤 기대도 끌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불안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과 기대가 빈틈없이 결속된 상태나 아무 연계 없이 분리된 상태는 좋은 삶의 조건이라 할 수 없다.

경험과 기대라는 켤레 개념으로 우리 사회를 조망하면, 한때는 경험과 기대가 발전주의 프로젝트를 통해 적절히 연계되었지만, 그 잠재력은 이제 소진되었다. 하지만 경험과 기대를 연계할 새로운 집합적 프로젝트는 형성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경험/기대 연관의 붕괴 상황에 있다는 느낌과, 경험과 기대가 간극 없이 봉합된 상황을 동시에 체험하고 있다.2) 예를 들어 전문직과 직접 연계된 몇몇 학과를 제외하면, 대학은 취업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세칭 ‘명문’대 학생은 기대수준도 높고 그래서 좌절 가능성도 높긴 하지만, 지금 이들조차 느끼는 심각한 불안은 높은 기대수준 때문만은 아니다.3) 널리 회자된 ‘3포’ 혹은 ‘5포’ 세대는 경험과 기대의 연계가 약해진 시대에 기대 축소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경험/기대 연관의 붕괴는 그 반대 형태, 즉 경험과 기대의 빈틈없는 결합으로 체험되기도 한다. 5포세대론 다음에 등장한 ‘수저계급론’이 그 예다. 경험이 기대를 완전히 결정하고, 가계의 역능이 개인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함께 등장한 ‘헬조선’이란 말은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의 정서를 응축하고 있다.

사태가 왜 이렇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다. 혹자는 ‘알파고’ 같은 혁신적 기술에 의한 인간 노동의 추방을 말하고4), 혹자는 출산력 저하와 기대수명 증가로 인한 인구의 노령화를 거론한다. 그리고 혹자는 지난 30여년간 전지구적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반동을 말한다. 이런 분석들에는 일정한 타당성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지금 상황과 정확히 조응하진 않는 듯하다.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의 대치라는 자본주의체제의 항상적 경향이 새로운 수준으로 고도화될 국면에 다가가고 있지만, 바로 지금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진 않다. 선진국 전반의 인구구조가 노령화되고 있고, 우리의 경우 그 과정을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심각한 문제 역시 임박한 것이긴 해도 현재 상황을 해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세번째 논의가 비교적 현재를 잘 설명하지만, 우리 상황에 대입하면 더 많은 요인들을 함께 검토하지 않으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5)

이 글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를 세계체제론의 일환으로 발전된 ‘세계도시’ 이론에 입각해 분석해보고자 한다(2절). 이런 접근법 또한 앞서 지적한 입장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주며,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각도에서 해결 방안을 구상해볼 여지를 준다. 그런 구상에서 매우 중요한 거멀못이 교육이라는 것이 이 글의 판단이다. 따라서 그런 판단에 입각해 공간적인 재편을 염두에 둔 교육개혁론을 제기해볼 것이다(3절). 이어서 결론을 대신해, 논의된 교육개혁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 그리고 그것이 가진 더 폭넓은 함의들을 살필 것이다(4절). 끝으로 보론에서는 이 글에서 제기한 교육개혁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를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논의, 특히 그의 ‘공간적 해결’(spacial fix) 개념에 덧대어 논의할 것이다.

 

 

2

 

안정적인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군사적·정치적 보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근대 자본주의 역사를 자본이 지출한 보호비용과 결합된 영토국가의 전개과정과 자본 자체의 축적과정이 복잡하게 교직되어온 과정으로 조망해볼 수 있다.6)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물론이고 최근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도 아리기(G. Arrighi)의 “자본주의적 권력 논리와 영토주의적 권력 논리”라는 이분법적 구별을 유의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이분법은 자칫 공간 범주가 영토국가와만 관련된 것이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축적 또한 공간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공장이라는 물리적 건조환경을 필요로 하는 제조업은 물론이고,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시공간적 제약 없이 하루에 수조 달러 이상을 거래하는 금융산업 또한 공간적·물리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런 인프라는 영토국가보다 훨씬 작고 응집력 있는 도시를 통해 더 효율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리기가 지적한 자본주의와 영토주의의 관계는 공간적 수준에서는 ‘세계도시’(더 정확히는 세계도시 네트워크)와 국민국가 간의 관계로 조명될 수 있다.

만일 어떤 도시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중심지, 즉 세계도시의 역할을 한다면, 어떤 기업들이 집결할지 추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국적 생산자본의 헤드쿼터가 자리잡을 것이고, 생산자본을 지원할 뿐 아니라 다양한 축적 메커니즘을 가동하는 대형 금융회사가 모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지원하는 생산자서비스 회사(대규모 회계법인, 부동산회사, 국제적 로펌, 디자인과 광고 전문 회사, 시스템 솔루션을 제공하는 전산서비스 회사 등)가 응집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고용된 인구를 지원하는 소비자 서비스 제공업체(거주용 아파트와 사무 빌딩 관리회사, 그리고 세탁소, 주차관리원, 식당, 택배회사, 버스회사, 자영업 택시 등에 이르기까지)가 모여들 것이다. 만일 대형 금융과 산업적 헤드쿼터가 높은 이윤율을 가진다면, 그것을 운영하거나 소유한 전지구적 부르주아와 그들을 지원하는 테크노크라트를 위해 도시는 높은 수준의 의료 및 교육 시설을 구비할 것이며, 그 옆에 대학과 연구소는 물론이고 극장과 박물관도 들어설 것이다. 그런 시설에 연구자와 학생, 악단과 무용단이 모이고, 거리의 악사와 초상화가도 따라붙을 것이다. 보헤미안적 생활양식을 가진 예술가 거주지역도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집단 틈새엔 단순 노무인력이 끼어 활동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브로델(F. Braudel)이 말한 “전망의 상호성”, 그러니까 상대편이 자신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기대의 상호성에 힘입어 자기조직적으로 진행된다. 그렇게 해서 역시 브로델이 말했듯이 도시는 일종의 “변압기”처럼 작동한다.7) 주변으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빨아들이며 내부를 엄청난 에너지로 충전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도시와 국가 간의 권력관계는 계속해서 변동해왔다. 유럽 중세의 자유도시는 봉건영주와 봉건국가로부터 자유를 쟁취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도시는 국민국가에 복속됐다.8) 하지만 지금처럼 자본의 다국적화와 금융화가 심도있게 진행된 지구화(globalization) 상황에서는 세계도시의 권력이 국민국가를 압도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울은 이런 세계도시들 안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가진 것일까? 물론 서울은 뉴욕이나 런던 같은 최상위 세계도시가 못될뿐더러 동아시아에서도 상하이, 토오꾜오, 싱가포르, 홍콩 같은 세계도시에 미치지 못한다. 회계법인과 은행업의 분포를 중심으로 세계도시를 분석해온 피터 테일러(Peter J. Taylor)는 우리의 경험에 부합하게도 서울을 ‘베타세계도시’(βWorld City), 즉 중위 세계도시로 분류한다.9) 중위 세계도시가 소재한 국가의 경우, 산업적·금융적 능력의 한계 때문에 한개 정도의 세계도시만이 형성 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도 그 국가의 정치적 수도와 결합함으로써만 세계도시의 수준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멕시코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방콕 또는 이스탄불이 서울과 유사한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위 세계도시는 수위 세계도시와 다른 특징을 지닌다. 중심부 국가에서는 대도시 순위와 인구규모 사이에 역비례관계가 관철된다. 이들 국가에서는 두번째로 큰 대도시의 인구가 가장 큰 대도시 인구의 절반이 되고 세번째 큰 도시 인구는 1/3이 된다.10) 하지만 중위 세계도시는 중심부 세계도시와 달리 그곳이 속한 국가의 다른 도시들을 완전히 압도한다. 일반적으로 세계도시로의 성장은 국가의 재정능력을 초과하는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편이지만,11) 중위 세계도시는 거기서 더 나아가 해당 국가 주변부의 자원을 대량으로 흡수하고 착취하며, 그런 한에서 세계도시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도시 연구의 초점은 역시 수위 세계도시이기 때문에 중위 세계도시가 자신이 속한 국민국가에 대해 어느 정도 착취적인지 또는 어떤 계기로 그런 경향이 심화되는지를 다룬 국제적 비교연구는 별로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 대한 조사는 서울과 수도권이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한해 정부 총 예산의 두배가 훌쩍 넘는 액수인 약 854조원을 빨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신자유주의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장하성(張夏成)이 인용한 세계 상위소득 데이터베이스(WTID)에 따르면 한국의 개인상위 10%의 소득집중도는 199529.2%에서 201244.9%로 상승했다.12) 국세청 상속세 자료를 통해 부의 축적에서 상속분이 기여한 정도를 측정한 김낙년(洛年)에 의하면, 그 비중은 1980~90년대에는27~29%였지만, 2000년대가 되면 42%로 상승한다.13) 이런 경제적 양극화는 공간적으로는 서울을 핵으로 하는 중심/주변 분화가 강력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나며,15) 사회적으로는 상층 파워엘리트 집단의 네트워크가 점점 더 촘촘해지고 폐쇄성을 띠는 것으로 나타난다. 흔히 ‘강남’이라는 지역으로 간결히 표상되는 상층 파워엘리트 집단의 구성요소를 사람과 조직을 뒤섞어 두서없이 꼽아본다면, 특목고(자사고), 서울 소재 ‘명문’대학과 사학재단, 재벌 대기업, 공공부문의 고위 종사자, 금융엘리트, 고위 공무원, 판검사와 로펌 변호사,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 대형병원, 빌딩 소유자, 보수언론, 대형교회 등일 것이다. 얽히고설킨 네트워크의 효과로 이들은 국민적 이해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점점 아주 협소한 계급이익을 탐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역외소득 유출입의 누적규모와 공간적 흐름(2000~2014년)

역외소득 유출입의 누적규모와 공간적 흐름(2000~2014년)14)

 

사실 그런 행태는 세계도시로서의 서울을 주도하는 상층계급의 집단역학과 하비투스(habitus)에 결부된 것이긴 하지만, 세계도시와 국민국가 사이의 이해충돌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면도 많다. 예컨대 재벌대기업이 한국의 고등교육에 대해 어떤 이해관심을 가질지 생각해보라. 2015500대 대기업의 공채인원은 약 22천명이었다. 이 정도 인원은 서울 소재 상위 10개 대학의 정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재벌 대기업이 관심을 가진 것은 몇몇 명문대학에서 교육받은 이들의 직업적 능력과 이데올로기적 복종태세일 뿐, 한국 고등교육 전반의 발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대자본은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지만 이렇게 교육에 대해서도 국민적 이익과 괴리된 집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본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국민적 이해관심에 입각해 시행하는 정책적 제재를 쉽게 떨칠 수 없다. 그러나 국제적이든 국내적이든 자본이 국민국가를 압도하는 권력을 획득해감에 따라 그런 제재는 힘을 잃어왔다. 그렇게 된 이유의 일부는 지난 몇십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강제한 탈규제 경향에 있다. 하지만 이렇듯 비교적 전지구적으로 탈규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보다 그런 탈규제가 관철되는 내부 맥락과 패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이 중앙정부의 고위 공무원이 퇴직 후 재벌 대기업이나 로펌의 자문 내지 고문 같은 직책으로 취업하고, 그들이 나중에 정부의 선출직 공무원이 되기도 하는 일종의 회전문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16) 이런 과정을 거치며 중앙정부의 관료들이 국민국가적 충성심을 가지지 않고 관료적 자기이익 추구라는 경로를 따라 상층 지배 블록과 융합하게 되면, 국민국가는 ‘국민적 국가’이기를 그치게 되는 것이다.17) 1980년대 종속이론이 수입되었을 때, 군더 프랑크(A. Gunder Frank)가 『저발전의 발전』에서 제시한 “국제화된 부르주아와 룸펜프롤레타리아”의 대립구도는 우리 현실과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중위 세계도시 서울에서 보게 되는 사회적 풍경은 그것에 매우 근접해가고 있다.18)

이런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병리현상 또한 조명해준다. 예컨대 대학생들의 차별의식을 보자.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개마고원 2013)에서 대학생들의 차별의식을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그의 저서가 무색하게 차별의식은 더 심해졌다. 비근한 예로 요즘 대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학교나 학과 이름을 커다랗게 새긴 점퍼를 입던 데서 더 나아가 출신 고등학교 이름마저 점퍼에 새기고 있다. 이런 차별의식은 중심/주변 분화가 강력해진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중심/주변 분화가 심화되면 중심 내에서도 다시 중심/주변의 분화가 거듭된다. 그렇게 되면 중심에 있을 때도 그곳이 중심의 주변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긴다. 이런 불안은 자신이 중심에 머무르고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강박을 낳으며, 주변으로 밀려나지 않고 더 깊은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동인을 강화한다. 이렇게 중심/주변의 재분화가 반복되면, 중심/주변이 더 깊은 중심으로부터 주변의 주변으로 동심원적으로 펼쳐지게 되고, 그런 만큼 위계적 구조와 유사해져간다.

강력한 중심/주변 분화는 부동산 투기와 지대 추구 또한 심각한 문제로 만든다. 저금리에 맞물린 때문이기도 하고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가계부채 1100조원의 상당부분은 중심/주변 분화가 너무 강력해서 생긴 부동산 거품과 관련된 것이다. 지나치게 앙등한 서울과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 때문에 “임대사업자가 꿈인 나라”라는 말은 이제 냉소를 넘어 실제 꿈을 표현하는 말이 되고 있다. 아마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삼성동 한전 부지를 놓고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이 경쟁하다 결국 현대차그룹이 감정가의 세배가 넘는 액수인 105500억원으로 그것을 낙찰받은 일이다. 각각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재벌 대기업들조차 임대사업에 대한 욕망에 들떠 있는데, 이런 욕망의 토대는 중위 세계도시로서의 서울이며, 그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는 서울이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국가가 ‘국민적’이기를 요구하는 일, 모든 주민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그들의 복지를 균등하게 향상시키려는 가치 지향성을 정부 안에 깊이 새겨넣는 일이다. 국민국가의 억압성을 해체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이들에게는 국민국가가 국민적일 것을 요구하자는 주장이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런 기획보다는 글로벌 거버넌스를 더 선호하는 것이 좌파문화다. 특히 유럽 좌파들이 글로벌 거버넌스를 추구해왔는데(이것이 제러미 코빈 Jeremy Corbyn 같은 이가 브렉시트에 당면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이유일 것이다), 아무튼 그들에게는 더 민주적인 EU(유럽연합), ‘사회적 EU’라는 목표가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라면 어떤가? 여기선 지리적 배치와 정치군사적 구도 자체가 그런 식의 모델을 상정할 수 없게 한다. 연동하는 동아시아의 역내 평화를 위해서 밑으로부터의 교류와 시민적 거버넌스 추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여전히 핵심은 국민국가들 사이의 평화적 관계다. 그러므로 국민국가를 국민화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국가에 어떤 선험적으로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거나 한때 존재했던 좋았던 과거에 대한 회고적 지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경로이기 때문에 국민국가를 개혁하고 개조해야 하는 것이다.19) 더구나 남북한이 분단되어 국민국가 자체에 미달한 한반도 상황에서 남북한이 함께하는 ‘국민적’ 국가 또는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노력 자체가 한반도 주민의 삶을 개선하고 동아시아 역내 평화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국민국가 모델 자체에 함축된 일정한 긍정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계기로 서구가 창안한 주권국가체제는 국가 간의 동등성과 동등 대우라는 규범을 수립했는데, 근대 국민국가체제는 그 규범을 계승하고 있다. 사실 현존하는 국민국가들은 결코 대등한 존재가 아니다. 국민국가들 간의 동등성이란 코끼리와 황소와 생쥐가 포유류라는 점에서 동등하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국민국가체제에서 국가들은 서로가 마치 동등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때 ‘마치 그런 것처럼’이라는 가상적 태도는 의외로 중요하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때 평등은 사실적 판단이 아니다. 평등은 이런저런 차이와 우열을 무시하고 모두를 ‘마치 평등한 존재인 것처럼’ 대우하기로 한 결정이자 결단의 산물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결정·결단이며, 주권적인 국민국가들의 체제에도 동일한 유형의 결정·결단에서 흘러나오는 규범적 힘이 작동하고 있다.

국민국가는 대내적으로도 시민권자를 평등하게 대우하라는 규범적 요구를 향해 열려 있다. 경험 수준에서 국민국가 안에는 다양한 차별이 현존한다. 하지만 차별받은 소수자 집단이 사회적으로 평등을 주장할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해 평등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민주적 헌정에 입각한 국민국가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심각한 정당성 약화를 감수할 것이 아니라면, 그런 요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국민만큼이나 난민이 일반적 경험이 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고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국민국가를 이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세계도시의 국제화된 부르주아에 하이재킹된 도시국가와, 시민 모두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그들의 민주주의로부터 정당성을 끌어내는 국민적 국가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20)

 

 

3

 

사회적 병리는 나쁜 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균형 상태는 사회 행위자들이 개별적으로는 달리 행동하기 어려운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벗어나기 어렵다. 중심/주변 분화는 중심을 지향하는 것을 최적의 행동으로 만들기 때문에 모두 그것에 몰두하고 그로 인해 중심의 권력이 강화되는 분화가 지속된다. 그것이 너무 강하게 진행되어 위계로 고착되면, 한단계 아래에 있는 자는 또다른 누군가의 한단계 위에 있는, 모두가 위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거기서 벗어나려는 개별적인 노력은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나쁜 균형에 머무르고 있는 현재 사회 상태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여러가지 요소 또는 기획을 새롭게 조합하고 그것에 응집된 힘을 부여하는 동시에 사회성원들의 자기조직적 활동을 접맥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목표로 삼은바 중위 세계도시 서울의 지배력이 야기한 병리현상의 치유를 위해서도 서울과 수도권의 중심성을 약화시키려 했던 그간의 시도와 그 성과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검토되어야 할 것은 참여정부가 추진한 지역균형발전 전략, 특히 그 기획의 중심에 있던 수도이전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그리고 ‘행정수도’ 세종시를 결과로 남겼다. 수도권 중심성 해체를 목표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것의 상당한 약화를 함축한 기존의 시도로서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안’(이하 국립대학통합안)이 있다. 이 논의는 참여정부와 연계된 것은 아니었지만 참여정부 시기에 제기되었다. 강준만(康俊晩)의 『서울대의 나라』(개마고원 1996)가 출간된 이후 학벌주의와 대학서열체제에 대한 비판이 활성화되었고, 진보적인 학자들은 서울대 해체와 대학평준화를 주장했으며, 장회익(張會翼) 교수를 비롯한 서울대 교수 20인은 ‘서울대 학부과정 개방안’을 내놓기도 했는데, 국립대학통합안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다듬어진 것이었다. 이 안은 비록 제도적 결과를 만들진 못했지만 진보정당들은 물론 18대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이 교육개혁 방안으로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 진보개혁진영이 대학서열주의에 도전하며 내놓은 안 가운데 가장 구체성이 높은 것으로 남아 있다.21)

이 글에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제기되고 별도로 추진되었던 참여정부의 수도이전 프로젝트와 국립대학통합안의 결합이다. 필자가 보기에 두 프로젝트가 결합된다면 그것은 중위 세계도시 서울이 야기한 병리현상을 극복할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서울과 수도권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그것이 가진 정치경제적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 이상의 기획, 이데올로기적이고 문화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서울과 수도권의 힘 자체가 정치경제적 중심성뿐 아니라 대중도 암암리에 동의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중의 복종태세를 쉽게 이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가 능력주의(meritocracy)이며, 그것의 중심에는 대학서열체제가 있다. 매년 겨울 수십만의 수험생이 한날한시에 몇년간의 노력을 모두 털어넣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데, 바로 그 형식 자체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거대한 ‘세리머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 국민적 정체성 안에 아로새겨진 능력주의의 위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능력주의를 뒷받침하는 서울 중심의 대학서열체제가 더 완고하고 강퍅해져서, ‘SKY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국숭세단……’ 같은 지독한 서열 매기기가 거리낌없이 공론장을 누비는 상황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학입시 경쟁이 과도해지면서 한국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희생을 치렀다고 느끼고 있고, 더 나아가 그 희생을 정밀하게 차등적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심리에 빠져 있으며, 그런 보상체계를 교란하는 모든 것에 대해 원한(ressentiment)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심리가 세칭 명문대학 출신들로 구성되는 중심부의 엘리트 집단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중심/주변 분화를 약화시키려는 전략은 중심의 정당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대학서열체제에 도전하는 기획을 포함해야 한다.

참여정부의 수도이전 기획과 국립대학통합안을 결합해야 한다고 보는 또다른 이유는 두 기획이 현재 애초의 의도를 실현할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시도한 새로운 수도 건설은 당시 야당인 새누리당의 반대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기이한 판결로 인해 행정수도로 격하되었고, 이명박정부는 그마저 ‘특별경제도시’로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박근혜(朴槿惠) 의원의 대선전략 때문에 행정도시안이 유지되어 922청이 내려가 현재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세종시가 어떤 위상과 발전방향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한국사회 전체에서 어떤 사회경제적 그리고 공간적 위상을 갖는지 매우 불투명한 상태에 있다.

세종시가 어떤 발전경로를 취할 수 있는지 짐작하기 위해 최근 논란이 된 두 부류의 사실을 살펴보자. 하나는 오는 11월 조기 개통을 앞둔 수서발 KTX와 서울세종 고속도로 건설계획의 발표다. 서울과 세종시 간의 교통연계를 강화하려는 이런 시도 밑에는 수도의 부분 이전으로 인해 업무·거주·가족생활이 불편하게 조합된 상황에 있는 공무원들이 있다. 하지만 만일 이런 방향으로 발전이 강화된다면, 세종시는 서울·수도권 도시회랑에 흡수되어 수도권 확장에만 기여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헌을 통해 수도를 세종시로 완전 이전하자는 경기도지사 남경필(南景弼)의 발언22)과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설치하자는 이해찬(李海瓚)의 국회법 개정안 발의23)다. 이들의 발언은 세종시가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 많은 정부기관과 공공기관을 유치하며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24)

이 두가지 사실을 조합해보면 세종시는 서울의 하위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정치적·행정적 수준에서 서울에 비견할 권력을 가진 중심지로 성장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간적으로는 수도권 회랑에 편입된 형태가 될 공산이 커 보인다. 서울의 중심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시작된 프로젝트가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서울과 수도권의 확장으로 귀결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국립대학통합안의 경우도 제안될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그것이 가진 의미가 많이 옅어진 상태이다. 법학이나 약학 전문대학원 설치를 비롯해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서울대 법인화다. 국립대학통합안은 서울대폐지론과 대학평준화론으로부터 영감을 길어올렸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울대를 국립대학네트워크 안으로 몰아넣고 서울대 학부생 모집을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 서울대가 2011년 법인화되어 국립대 범주에서 빠져나가버린 것이다. 서울대를 여전히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서울대가 국립대학일 때도 하지 못한 일을 법인화된 다음에 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국립대학통합안도 자신의 구상을 재점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 표류하거나 달라진 상황 앞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두 프로젝트를 조합하면 그것이 처한 제약을 벗어날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 계기로 전환할 수 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국립대학통합안이 처한 제약을 다시 검토해보자. 국립대학통합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것이 폭넓은 반향을 가졌던 이유는 대학서열체제의 정점에 서 있는 서울대의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립대학통합안은 서울대 폐지안으로 인식되었고 그만큼 강한 사회적 저항에 부딪쳤다.25) 이제 서울대 법인화는 그런 저항의 토대를 더 강화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다른 국립대가 법인화 압박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이런 상황은 제약이 아니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즉, 서울대가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로부터 멀찌감치 달아난 상황을 ‘기꺼워’하며, 서울대를 ‘뺀’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를 구상하는 것이다. 즉 서울대 법인화를 “국립대학체제의 사멸을 고지하는 조종(弔鐘)이라기보다 새로운 국공립 네트워크 체제로 이끄는 카펫”26)으로 삼는 것이다. 사실 서울대를 빼버리면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는 큰 제도적 장애나 정치적 장애 없이 순탄하게 구성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서 형성된 통합네트워크가 어느 정도나 대학서열체제를 완화하고 서울과 수도권의 중심성을 약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립대학통합안이 제출된 이후 수도권 대학에 비해 지방대학의 지위는 더 낮아졌고, 세칭 서울 소재 명문대학에 비해 거점 국립대의 지위는 더 떨어졌다.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가 실현된다 해도 그것이 가진 사회적 매력은 약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를 지금껏 구상된 것보다 훨씬 통합력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그럼으로써 더 질적으로 우수한 교육기관이 될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세종시는 그것을 위한 좋은 토대가 될 수 있다.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의 통합도가 진짜 높아져서 교수와 학생 들이 서로 자유롭게 교직되고 그럼으로써 훨씬 더 수준 높은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간적 응집력이 필요하다. 세종시는 그것을 위한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국립대학의 전국적 배치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중앙정부는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로 대학 설립을 방치할 때도 수도권 인구집중을 막기 위해서 수도권에서의 대학 설립이나 정원 증가는 억제했으며, 같은 선상에서 수도권에서의 국립대학 증설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 결과 세종시보다 북쪽, 특히 수도권에 있는 국립대학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법인화된 서울대와 인천대를 제외하면 서울과학기술대과 한경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한국체육대 그리고 교육대학 2개교 정도다. 그러므로 세종시를 중심으로 수도권 바깥의 약 40개 국립대학들 간의 통합네트워크를 만들 경우,27) 세종시는 서울 및 수도권 바깥의 국민들과 긴밀하게 연결된 교육적 중심을 형성할 수 있다.

세종시는 인근에 큰 규모 대학을 품은 세개의 도시에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는 충북대가 소재한 청주시가 있고, 서쪽으로는 공주대의 공주시, 남쪽으로는 충남대와 카이스트가 있는 대전광역시가 있다. 세종시는 이 세 도시를 연결하는 허브가 될 만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청주시는 춘천, 원주, 강릉 소재 대학을 연결하고, 공주시는 전주와 광주 그리고 목포 소재 대학을 조직하고, 대전광역시는 충남지역과 경상남북도의 대학을 연계하는 세개의 2차 허브가 될 수 있다. 강원도 방면의 네트워크를 위해서는 동서 철도망을 보충해야겠지만, 세종시가 중심이 되는 네트워크의 공간적 마찰계수는 그리 높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인적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다.

세종시에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 본부를 설치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해나가는 것은 세종시 자체의 발전방향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로 인해 세종시가 서울과 수도권이 아니라 비수도권과 연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새로운 철도와 고속도로의 건설도 지금과는 다른 공간적 편익을 중심에 놓고 구상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발전방향이야말로 세종시가 애초의 설립의도에 가까운 기능을 하며, 한국사회에서 의미있는 공간적 지위를 가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프로젝트가 의도하는 바는 서울을 핵으로 하는 중심/주변 분화가 야기하는 많은 병리현상을 비수도권을 대변하는 또다른 중심을 형성함으로써 완화하는 것이다. 이런 의도에 대해 또다른 중심의 형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중심이 모든 사회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동심원적 사회보다 이심(二心)에 의해 그려지는 타원의 사회가 훨씬 더 역동적일 것이다. 실제로 고등교육의 발전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정도의 공간적 응집력 그리고 행정수도에 의해 뒷받침되는 사회적 권력을 가진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여야 서울 소재 ‘명문’대학이 긴장할 만한 교육과 연구 역량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서울대를 폐지하거나 서울 소재 명문대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열체제에 안주할 수 없게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결코 서울과 수도권의 약화가 아니라 여러 수준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28) 그리고 그렇게 된 상태는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뿐 아니라 대학입시를 향한 경쟁 또한 크게 완화하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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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상이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를 제안하면서 매우 세세한 제도적 모형을 제시했던 데 비해 이 글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경우,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응하는 준비가 성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프로그램의 의도치 않은 결과를 염두에 두는 개방성 그리고 개별 행위자들의 자기조직적 활동을 고무하는 방안이 더 중요하다.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가 발전되면, 그것이 네트워크를 넘어서는 통합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여러 국립대학에 설치된 동일 학과나 대학원이 통합되거나 상이한 학과가 융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분과학문이 학생들에게 충분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대학원생과의 연구를 진행하려면 일정한 규모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작업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어떤 식의 통합이나 융합이 바람직할지는 학문별 상황, 네트워크에 속한 국립대학 각각의 사정, 물리적 자산의 분포와 학생들의 선호 분포, 그리고 교수들의 의욕과 씨너지 효과 등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요소들을 고려해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미리 제도적으로 구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긴 진화의 과정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국립대네트워크에 사립대학을 어떻게 접맥하고 연계할지, 그럴 경우 사립대학의 지배구조를 좀더 공영적인 형태로 이끌 방안이 무엇인지 구상하는 일도 대학들의 자기조직 역량에 좀더 맡길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럴 때도 정책 수준에서는 큰 방향을 설정하고 그것을 위한 보상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필요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원을 배분하고 관리하며 조정하고 지원하는 조직이 세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칭) ‘국가고등연구·교육위원회’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29)

그러나 여기서 논의된 것들의 실현 가능성은 그것이 공론장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지, 주요 정당과 그 정당 대통령후보의 공약과 접맥될 수 있는지, 그리고 대중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는지에 달린 문제이다.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 그것도 세종시를 핵으로 하는 네트워크의 형성은 대학들의 자발적 조직화에 맡겨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들의 자기조직화 역량은 일단 그것을 향한 정치적·법적 경로가 열린 다음에나 발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30)

아마도 일각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 전반에 대해 더 중요한 ‘당면’ 문제, 그러니까 출산력 저하로 인한 학령인구 급감이라는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대학구조조정 문제를 비껴가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남아도는 대학정원이 16만명이니 정원 1천명짜리 대학 100개가 문을 닫을 일이라는 식으로 조장된 위기는 전형적인 ‘가짜 사건’(pseudo event)이다. 학령인구의 감소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다면 그들이 대학 입학연령에 이르기 전에 이미 유치원과 초중등학교가 초토화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일어난 일은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서 교사를 더 채용하지 않았는데도 초중등학교에서 교사 대 학생비율이 빠르게 개선되었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2000년대 초 우리나라 초등학교의 교사 대 학생 비율은 약 128이었는데, 2015년에는 115가 됨으로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이 되었다. 이런 일이 대학에서도 가능하며 그럴 때만 교수당 학생수가 28명이 넘는 한국 대학의 교육도 개선될 것이다.31)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정부의 재정투입 의지이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성원의 정치적 선택이다.32)

제약을 새로운 경로의 디딤돌로 삼으려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여기서 논의된 공간전략은 더 확장된 의미를 획득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논의는 중위 세계도시 서울을 핵으로 하는 중심/주변 분화가 국민국가의 퇴락을 가져오는 것을 막고, 그럼으로써 지구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엄청난 불평등이 우리 사회에 깊이 관철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같은 선상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심 문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정학적 분열구도와 접맥된 분단 문제이다. 국민국가가 국민적일 것을 요구하는 투쟁은 우리의 경우 분단극복의 노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의 제도적 구현 형태는 우선은 국가연합의 수립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3)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한반도 공간전략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도 평양시와 세종시가 남북연합의 이원적인 정치적 중심지가 되는 대신 서울은 정치적 부담을 덜고 경제적·문화적 세계도시 역할을 하는 모델에서부터, 서울이 수도가 되고 평양시와 세종시는 각각 의회가 자리잡고 총리가 통치하는 남북한 각각의 행정수도가 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상이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에 가까운 경로에 접근해갈지는 남북연합의 행로가 어떨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의 진화가 일어나든 그것을 위해서는 이미 남한사회가 이심성을 통해 이룩된 타원형의 역동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설령 남북한이 평화로운 통합을 향해 나갈 때조차 더 큰 규모의 중심/주변 분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귀결되고 그로 인해 공간적·사회경제적 불균형이 한반도 전체로 확산되고 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종시를 중심으로 한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은 단순한 교육개혁을 넘어서는 사회적 비전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론: 공간적 해결에서 교육적 해결로

 

지금까지 논의한 고등교육개혁 논의가 자본주의적 축적과 그것이 야기하는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생태적 위기에 대해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통상 교육개혁을 논의하는 이들은 그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인 양 이야기한다. 이 글에서 제기한 교육개혁도 공간적 전략의 부분을 제외하면 좋은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이 사회와 개인의 발전에 바람직한 일임을 전제한다. 하지만 탈학교사회론자들처럼 교실에서 십수년 공부하는 것을 좋은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많다. 꼭 탈학교사회론자가 아니더라도 교육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회로 속에 사람들을 몰아넣은 결과를 좋게 보기만은 어렵다. 교육이 지위획득 경쟁의 일환이 되면 사람들은 남보다 한 단위 더 교육을 받으려 하고 그것의 결과는 교육팽창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마치 앞의 무대를 보기 위해 모두 일어서고 종내는 까치발을 하게 되지만 아무도 무대를 더 잘 볼 수 없는 경우와 마찬가지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육에서 벌어지는 일을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공간적 해결’의 기능적 등가물로 여겨질 수 있다. 하비는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가가 쉬지 않고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공간적 해결’을 추구해왔다고 말한다. 이런 공간적 해결의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19세기 중반 오스만(G. Haussmann) 남작의 빠리 대개조, 20세기 중반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의 뉴욕 대도시권 재개발 그리고 엄청난 생태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21세기 중국의 대규모 도시개발사업을 제시한다.34) 아마 우리 사회의 경험으로 말하면 22조원을 퍼부은 4대강사업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 팽창되는 과정도 잉여 자본과 노동을 흡수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공간적 해결에 빗대어 이런 과정을 교육적 해결(educational fix)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교육적 해결은 교사와 학생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적 해결(social fix)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교육적 해결은 얼핏 보기엔 도시건설이나 토목사업 같은 공간적 해결보다 작은 규모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평균 교육연한이 15년을 넘은 OECD 국가들이 보여주듯이, 학교생활은 전 인구의 생애주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선 생태적인 면에서 다르다. 교육도 공간적 해결처럼 물리적 건조환경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로 하는 수준은 도시공간의 건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교육의 핵심은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더 나은 시설이 도움은 되어도 좋은 교육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교육에서 가장 큰 지출 요인은 교사의 임금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교육적 해결은 생태학적인 면에서 훨씬 바람직한 접근법이다.

자본축적과 관련해서도 양자는 다르다. 자본주의적인 공간개발의 최종적인 목적은 이윤과 자본축적이다. 하지만 교육은 영리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비영리를 전제로 한다. 학교는 국공립은 물론 사립일 때도 이윤을 추구하지 않으며(할 수 없으며), 발생한 잉여금은 적립하거나 교육의 규모와 질을 개선하거나 구성원의 복지를 위해 배분할 뿐이다.35) 어떤 의미에서 학교는 공익법인에 의해 운영되는 병원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 안에 존재하는 가장 방대한 규모의 비자본주의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비자본주의적 조직은 평가와 보상에 있어서 이윤원리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실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도 좀더 많은 임금보다는 명예나 노동시간에 대한 자기통제의 증대 같은 것을 보상으로 원하는 이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것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는 비전을 마련하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물론 이런 조직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운영되는 한, 이중과제를 짊어진다. 화폐 보상과 시장 동향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해야 하며, 무엇보다 효율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관련해 월러스틴(E. Wallerste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경제구조들이 비영리적인 것이고 비국가적 통제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널리 사용되기도 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러한 체제를 이미 수세기 동안 이른바 비영리 병원을 통해 목격해왔다. 과연 이들이 사립이나 국영 병원에 비해 비능률적이며 의학적으로도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가? 내가 아는 한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기 십상이다. 왜 이러한 상황이 병원에만 국한되어야 하는가?”36) 당연히 학교를 비롯해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그것이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데이비드 하비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하비는 헤겔의 용어를 빌려 공간적 해결에 입각한 자본축적이 일종의 ‘악무한’(bad infinity)의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자본의 확대재생산과 복률성장은 인간의 삶 전체를 통제불능 상태로 몰아가고 생태학적으로 재앙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무한’(good infinity)에 입각한 단순재생산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37) 그런데 이런 단순재생산을 위해서는 삶의 어떤 과잉을 덜어내지만, 그것을 잉여가치의 축적에 활용하지 않는 삶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 하비는 그것이 어떤 것일지 또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육적 해결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해결을 모색함으로써 우리는 하비가 말하는 식의 공간적 해결과는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다. 하비 자신도 자본 주도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도전하는 다양한 활동가들을 지원하고자 했고 그런 취지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공간적 해결의 수준에서도 “나선형적으로 성장하는” 자본축적과는 다른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공간적 해결이든 사회적 해결이든 그것 모두의 양가성 또는 이중과제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현 체제의 습관에 익숙한 이라면, 교육적 해결이 자본주의체제 극복을 위한 이중과제의 초점이 될 수 있다는 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물론 교육은 천국과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지적 호기심 충족을 위한 것이 될 수 있고, 교양있고 품위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 될 수 있고, 예컨대 당시(唐詩)를 인용할 줄 아는 풍요로운 사교적 대화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조건에 대해 더 통찰력 있는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모든 활동과 성과에 대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식으로 반응하며 기뻐할 수 있다. 하지만 선발과 평가는 그 이면의 지옥이다. 복잡한 현대의 산업적 상황에서 ‘낡은’ 인문주의적 발상으로 교육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소박한 것일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교육과 산업을 짝 맞추려는 시도를 피할 필요는 없지만, 양자를 타이트하게 연결지으려는(coupling) 모든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손실을 야기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결국 산업이 교육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매번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창의적인 해결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그런 종류의 능력은 의도적으로 다른 인간에게서 생성해내거나 주입해 넣을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이해하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어떤 장치의 투입과 산출이 매번 정확히 동일하다면, 그 장치는 창의력 있는 것이 아니다. 체계이론이라면 그런 장치를 ‘뻔한 기계’(trivial machine)라고 부를 것이다. 이에 비해 창의력 있는 장치는 투입과 산출 사이에 아무런 일관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의외성을 산출할 수 있는 장치이며, 그런 의미에서 ‘뻔하지 않은 기계’(nontrivial machine)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과 교육을 타이트하게 결합하려는 모든 시도는 뻔하지 않은 기계인 인간을 뻔하게 만들려는 것일 뿐이다. 그럴 때 뻔하지 않은 기계는 뻔해지는 것이 아니라 뻔한 존재가 된 척하는 것을 학습한다(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이것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공부하라는 잔소리의 결과는 공부하는 척할 줄 아는 자녀이다. 같은 일이 산업과 교육을 타이트하게 연계하려는 자본의 잔소리를 통해 일어난다. 만일 산업과 교육의 연계를 헐겁게 유지하는 편이 산업에도 더 낫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다면, 평가와 선발의 지옥은 한결 연옥에 가까운 것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1)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 한철 옮김, 문학동네 1998, 391면.

2) 졸고 「분단체제와 87년체제의 교차로에서」, 『창작과비평』 2013년 가을호 478~84면 참조.

3) 「서울대 경제학부 졸업해도… 현실은 ‘3년째 취업준비생’」, 한국경제신문 2016.1.16 참조.

4) 랜들 콜린스 「중간계급 노동의 종말: 더이상 탈출구는 없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성백용 옮김, 창비 2014 참조.

5) 예컨대 볼프강 슈트렉이 그렇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중요한 결과가 ‘부채국가’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매우 설득력있지만, 막상 우리 상황에 적용해보려 하면 그렇게 쉽지 않다. 예컨대 우리의 재정적자는 OECD 여러 나라에 비해 아직은 낮은 수준이고, 우리의 경우 재정적자보다 외환보유고가 더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볼프강 슈트렉 『시간 벌기: 민주적 자본주의의 유예된 위기』,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15 참조.

6) 그런 예로는 조반니 아리기 『장기 20세기: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백승욱 옮김, 그린비 2008 참조.

7)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2』, 주경철 옮김, 까치 2001, 제8장 도시 참조.

8) 브로델, 앞의 장, 그리고 Peter J. Taylor, “World cities and territorial states: the rise and fall of their mutuality,” World cities in worldsystem, ed. by Paul L. Knox & Peter J. Taylo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48~62면 참조.

9) Peter J. Taylor, “World cities and territorial states under conditions of contemporary globalization,” Political Geography vol. 19, 2000, 5~32면.

10) 폴 크루그먼 『자기 조직의 경제』, 박정태 옮김, 부키 2002, 제3장 참조.

11) John Friedman, “The world city hypothesis,” World cities in worldsystem, 326면.

12)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헤이북스 2015, 59면.

13) 김낙년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3」, 『낙성대경제연구소 워킹페이퍼(2015-07)』, 2015.11 참조.

14) 전병유 외 『한국의 불평등 2016』, 페이퍼로드 2016, 114면.

15) 2014년 상속세와 증여세 신고 현황을 보면 서울·수도권이 차지하는 액수는 각각 전체의 74%와 80%에 이른다.

16) 그런 모델을 우리 사회에서 창안하고 선도했다는 점에서 로펌 김앤장 사례는 매우 중요하다. 임종인·장화식 『법률사무소 김앤장』, 후마니타스 2008 참조. 이 외에도 공무원 ‘민간근무휴직제도’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공무원이 휴직하고, 삼성·LG에서 근무할 수 있다」, 연합뉴스 2015.9.22 참조.

17) 최근 넥슨과의 부적절한 주식거래로 구속된 진경준 전 검사장의 행태나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씨의 “민중은 개돼지” 운운하는 발언은 일탈적 사례가 아니라 구조적 배경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8) 글로벌 부르주아와 그들을 지원하는 금융서비스의 풍경을 보여주는 예로는 김종영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돌베개 2015, 223~24면 참조.

19) 이와 유사한 입장으로 대니 로드릭 『자본주의 새판짜기: 세계화 역설과 민주적 대안』, 고빛샘·구세희 옮김, 21세기북스 2011 참조. 특히 그가 제시한 “세계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 국민국가에 국민적일 것을 요구하는 전략은 월러스틴 식으로 표현한다면,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이 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국 패권의 몰락』, 한기욱·정범진 옮김, 창비 2004, 325면.

21) 자세한 것은 정진상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책세상 2004 참조.

22) 「남경필 “청와대·국회도 세종시로 옮기자”」, 한겨레 2016.6.15.

23) 「이해찬 “세종시에 국회분원” 국회법 개정안 발의」, 한겨레 2016.6.21.

24) 세종시의 유지·발전은 현재 한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분파인 이른바 ‘친노’와 ‘친박’ 모두의 정파적 이익과 접맥되어 있으며, 대선에 출마하려는 정치인은 누구나 충청권에서의 득표를 염두에 두고 세종시 발전을 공약할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25) 국립대학통합안의 실행 가능성과 관련된 여러가지 문제점에 대해서는 졸고 「학벌사회와 대학서열을 극복하는 제도의 구상: 정진상,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경제와사회』 2005년 여름호 347~57면 참조.

26) 졸고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서 서울대를 빼버리자」, 창비주간논평 2012.7.4.

27) 과학기술원 5개교는 법적으로는 ‘특별법법인’이 운영하는 대학이다. 하지만 이들이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 안에 들어오는 데 큰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28) 우리 사회에는 걸핏하면 세계 수준의 대학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횡행한다. 그러면서 장남만 대학 보내고 동생은 공장에 보내던 60년대풍의 투자 또는 올림픽 선수촌 모델을 따르는 교육투자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수준의 대학은 평판과 역랑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이웃 대학과 경쟁하는 중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마음속에 하버드대를 경쟁상대로 품고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9) 이미 ‘국가교육위원회’(민교협)나 ‘국가고등교육위원회’(사교육없는세상) 구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주장 밑에는 현재의 교육부가 관료적 자기이익을 탐닉하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필자도 그것에 동의하며, 그래서 교육부로부터 고등교육정책의 구상 기능을 박탈해 대통령 직속의 위원회로 넘기고 실행 기능만 남기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하지만 이미 초중등교육이 교육청의 관할로 이행되었고 교육자치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서 ‘국가교육위원회’까지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고등교육위원회’가 더 나아 보이지만, 고등교육기관에서는 교육 못지않게 연구가 중요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국가고등연구·교육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30)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참여정부 시기에 있었던 충남대와 충북대의 통합 논의였다. 세종시에 마련된 대학부지를 함께 활용할 길을 찾는 동시에 훨씬 우수한 대학으로 올라서기 위해 이루어졌던 이 통합논의는 문턱을 넘지 못했다. 복잡한 법적·제도적 문제를 책임있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범정부 차원의 의지가 필요했지만, 교육부가 수동적으로 관여하는 정도에 그쳤고, 이로 인해 통합논의를 주도하던 교수들이 소극적인 내부 성원을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31) 졸고 「폐기돼야 마땅한 대학구조개혁법」, 한겨레 2016.7.20.

32) 정치적 선택이 관건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박근혜정부의 반값등록금 요구에 대한 대응과 조선산업 위기에 대한 대응을 들 수 있다. 박근혜정부는 반값등록금에 필요한 6조원 대신 소득연동형 장학금으로 3조 5천억원을 지출하는 결정을 내린 데 비해, 조선산업 구조조정에는 12조원을 투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33) 백낙청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참조.

34) 본지 수록 데이비드 하비 「실현의 위기와 일상생활의 변모」 참조.

35) 하지만 한국의 사립학교에서는 학교법인의 비민주적인 운영 때문에 많은 비리가 저질러져왔으며, 그 수법 또한 진화해왔다. 졸고 「진화하는 사학비리」, 한겨레 2015.4.22 참조.

36)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또는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 백영경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9, 108~109면.

37) 하비, 앞의 글 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