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소설가의 자리, 혹은 회색지대의 파열음
박인성 朴仁成
문학평론가.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clausewize@naver.com
강영숙 姜英淑
1967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팔월의 식사」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아령 하는 밤』 『회색문헌』, 장편소설 『리나』 『라이팅 클럽』 『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 등이 있다.
1. 시대성과 마주하기
강영숙의 『회색문헌』(문학과지성사 2016)은 수록된 작품들의 발표시기로만 따져도 『아령 하는 밤』(창비 2011) 이후 4년 가까이 걸려 출간된 단편집이다. 그사이에 장편소설 『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문학과지성사 2013)가 나오기는 했으나, 1998년 등단 이후 세권의 장편소설과 네권의 단편집을 세상에 내놓은 강영숙에게 과작(寡作)의 시기에 가깝다. 『회색문헌』 또한 쉽게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동시에 작업하고 있던 장편을 먼저 출간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먼저 단편집을 내게 된 것이다. 발표작 가운데 몇몇 작품은 수록하지 않고 추려냈다고 한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고민 끝에 세상에 나온 셈이다.
2009년에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문학동네)를 출간하고 나서부터 작품이 잘 쓰이지 않았어요. 전반적으로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은 시기였어요. 이번 작품집도 원래는 더 늦게 나올 예정이었거든요. 하지만 ‘시대성’이라는 것이 너무 빠르게 바뀌니까, 작가로서 제 포지션을 잡기가 힘들더라고요. 그 와중에 진행 중이던 장편소설까지 새로 써야 할 상황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 출간하지 않고 모아두었던 작품들을 모아서 단편집부터 먼저 내게 된 거예요.
작가가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듯이, ‘시대성’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분명 2010년대에 이르러 석연치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시대라는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우월한 관점을 생산하기도 어려우며, 포스트모던한 상대주의가 깊숙이 파고든 문학장(場) 내에서는 더더욱 시대성을 재현하고자 하는 엄두를 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2010년대의 ‘지금-여기’에 대한 작가적 재현 방식들이 리얼리즘적 수법보다도 알레고리나 환상성에 훨씬 친숙해진 경향도 분명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반면에 강영숙의 소설적 수법은 그 어느 쪽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중간지대에 가깝다. 선명하지가 않은 회색지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용법과 다르게 이 문학적 회색지대에 대한 정의는 꽤 복잡한 우회로를 거쳐야 할 것 같다.
우선 분명히해두어야 할 점은 강영숙은 작품 내부의 리얼리티를 위해 실제세계를 지시하거나 환기하는 작가이며 그 매개적 영역이 바로 ‘시대성’이라는 사실이다. 혹자는 강영숙 소설이 리얼리티의 구축을 천착했는지, 혹은 정말로 실제세계가 민감한 지시대상이었는지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강영숙의 소설세계에서 시대성을 재현하는 리얼리티라는 것이 모호하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강영숙이 시대성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대성은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질서정연한 구조가 아니라, 명료한 대표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성의 난립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대성 자체가 좌표를 잃어버림으로써 시대착오(anachronism)의 형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시대착오는 단순히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감각이 아니라, 여러 시간적 양태가 병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해 시대착오란 시대성 아래 흩뿌려진 시간성들 사이의 착종된 감각이다. 『회색문헌』 내부에서도 시간성은 흐트러진 방식으로 뭉쳐 있다. 그것은 선형적이라기보다는 먼지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것에 가깝다. 수록작 「귀향」은 도시의 삶에 염증이 난 여성이 지방도시에 거주하는 연인을 통해 잠시나마 심신을 위로받는다는 설정에서 시작하지만, 연인의 실종 이후에 어느샌가 자신의 출생지를 찾아가게 되는 일련의 방황이 주된 내용이다. 이 소설의 첫 문단은 주인공이 살던 19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시간성과 배치되는 이 장소성이 이미 ‘그녀’의 시대착오성을, 정돈된 시간으로부터의 이탈을 증명한다. 그런 ‘그녀’에게 생기를 되돌려주는 ‘남자’는 지방도시라는 공간성 속에서 ‘그녀’에게 시간적 속도를 되찾아주는 준거점으로 작동한다. 도시 외부적 시간을 경험하는 일종의 시간여행을 통해서만 ‘그녀’는 시대성 아래에서 그나마 숨을 쉬며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바로 그 ‘남자’의 실종을 통해 시간성과 그녀의 행로 모두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폴록」 역시 한 시대 아래 화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병존하는 시간적 감수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 작품은 나이 든 여성 환경운동가와 그에 대한 비공식적 기록물을 작성하는 젊은 서술자 사이의 엇나간 만남을 다루고 있다. ‘엇나감’은 단순히 성격 차이나 위계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낸 세대적 시간성에서 비롯된다. 환경운동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여성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된 서술자 J가 K 이사에게서 우선 느끼는 것은 세대적 시간의 격차다. 그 격차는 극복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K 이사는 그저 나이 든 것이 아니라, “시간이든 공간이든 모두 다 자기 편리한 쪽으로 끌어가”는(37면) 인물이다. 그들의 시대성은 ‘세대’라는 감수성의 격차 사이에서 그저 병렬화되어 배치될 따름이다. 비록 J의 시선과 언어를 경유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