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언어적 무중력 상태에 가까운

배수아 번역하기

 

 

데버러 스미스 Deborah Smith

번역가, 영국 Tilted Axis Press 대표. 한강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번역으로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공동 수상.

 

 

2003년 출간된 배수아(裵琇亞)의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은 작가가 11개월에 걸친 독일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집필한 소설로, 2012년 겨울, 얼어붙을 듯이 추운 서울에서 내가 친구 집에 머물며 최초로 번역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내가 단행본 분량의 한국문학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완독한 작품이며, 그것도 번역을 하면서 작품을 읽었다. 번역계에서는 이게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개개인의 취향, 그리고 개별 번역 프로젝트에 수반하는 구체적인 제반 조건 때문에도 번역가들 중 상당수가 번역에 착수하기 이전에 그 작품을 완독하지 않기도 한다. 내가 배수아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현대 한국문학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 준비 과정에서였다. 배수아를 일컬어 한국어를 훼손하는 작가라는 식으로 묘사한 대목인가를 보고 나는 (이 말은 아마도 저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 즉시 이 작가의 소설들을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에 대한 이러한 묘사를 보는 순간, 설레는 마음의 와중에 브라질의 거장 작가 끌라리시 리스또르(Clarice Lispector)가 떠올랐던 까닭이다. 리스또르는 풍성한 내면성과 독특한 문법의 활용으로 이름이 난 빼어난 언어의 연주자다(그리고 마침 리스또르의 단편 전집을 독일어본에서 한국어로 옮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그게 바로 배수아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배수아 작가와 나는 미국 전역의 서점을 돌며 작가의 신간을 홍보 중이다. 다만 이번에 미국 출간을 앞둔 작가의 소설에 붙은 제목은 ‘ The Essayists Desk’가 아니라 ‘A Greater Music’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은 ‘에세이즘’을 일컬어 자명한 이치에 대한 염증이자 심사숙고를 동반하는 잠정적인 시도요, 불확실성의 수용이자 지적 모험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자세라고 뜻매김한 바 있는데, 하나하나 배수아의 글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정의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해당 도서시장을 고려한 신중한 고민이 따라야 하는 만큼그러므로 번역을 거치면서 책 제목이 바뀌는 경우가 다반사일뿐더러 영국과 미국의 출판사들은 때론 같은 책의 두가지 영문판에 서로 다른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배수아의 이 작품을 두고도 미국 출판사에서는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란 제목을 직역할 경우, 구매자 및 독자 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주어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으로 분류해버리는 오류를 빚지 않을까 우려했다. 내가 대안으로 제시한 ‘A Greater Music’은 이 소설을 여는 구절이기도 하다. 한국어 ‘더 많은 음악’에 부정관사 ‘a’를 붙임으로써 제목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많은 음악’으로 시작하여 총 3면에 걸쳐 이어지는 이 작품의 첫 단락은 이 표현이 어째서 비문법적이고 또 정황상 부적절한지를 순환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물론 번역하기에도 어렵기 그지없다(이는 배수아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이기도 하다). 처음에 나는 어설프게도 ‘더 많은 음악’을 ‘more music’이라고 옮겼는데, 원문에서 ‘더 많은’은 수식하는 형용사로서 사용되고 있지 않으므로 이건 분명 잘못된 번역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더 많은’이라는 말이 여러 맥락에서 되풀이되고 있으므로 나는 이에 상응하는 표현을 찾기 위해 우선은 각 맥락에 통하는 표현을 찾아야 했고, 또한 영어로도 실제 사용될 법하나 막상 통용되는 것은 또 아닌 표현을 찾아야 했다. “더 죽어 있다, 라고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문장에 이르러 ‘더 많은’을 ‘greater’로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는 greater란 말이 ‘더 많은’에 상응하는 (불필요한) 비교의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다. 이 단락의 말미를 보면 greater로 수식하기에 부적절한 명사들이 나열되고 있는데, 그중에는 내가 북투어 첫날밤에 이 대목을 낭독하다가 발견한 “a more primordial human”(“더 많은 최초의 인간”)도 포함돼 있다. 이를 굳이 ‘발견’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낭독을 하면서야 내가 이 구절을 애초 번역했던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a greater primordial human’이라고 쓸 경우에 greaterprimordial이 아닌 human을 수식한다. 그런데 정작 원문의 의미는 ‘a more greatly primordial human’이다. 번역할 때 왜 이 후자의 표현을 택하지 않았는지는 내게도 수수께끼라서(물론 출간 후 자신이 번역한 글을 읽으면 불가피하게도 이러한 경우들을 발견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후회에 젖기 마련임이 곧 번역계의 보편법칙이자 주지의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첫 낭독 때는 물론 이후의 낭독에서도 이 대목을 내가 번역한 대로가 아닌 번역‘했어야’ 하는 대로 고집스레 읽어나가면서 매번 민망함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로부터 불과 한줄 뒤에 이르러, 3면에 걸친 이 단락은 아주 우아하게 끝을 맺는다. 물론 이는 역자가 특별히 솜씨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언어 고유의 알맞춤한 성질에 힘입어 한국어 원문보다도 더 음감이 살아 있고 균형이 잡힌, 강세 실린 영어 구가 빚어진 결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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