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중편 특집

 

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등이 있음. aamudo@empal.com

 

 

 

웃는 남자

 

 

1

 

많은 밤을 보낸 뒤에 d는 차가워졌다.

젖은 얼굴을 닦으려고 수건을 잡았다가 d는 그 사실을 알았다. 수요일 오후 아홉시 직전이었다. 욕실 벽에 걸린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비누거품 섞인 물이 세면대에 고여 있었고 d는 맨발로 타일을 밟고 있었다. d가 조금 전에 잡았다가 흠칫 놀라 놓아버린 것, 그것은 평범한 수건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집에 있던 물건으로 d는 매일 아무 때나 그걸로 얼굴이며 목을 닦은 뒤 수건걸이에 도로 걸거나 빨래바구니에 던져넣었다. 여러번 빨아 말리길 반복한 탓에 좀 뻣뻣해지고 납작해진 아이보리색 면직물. 무늬도 이니셜도 없어 d로서는 다른 수건과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그것의 온도가 매우 낯설었다. 체온을 가진 것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켜지 않은 부엌을 향해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d는 컴컴한 부엌을 가로지르다가 식탁에 놓인 탁상달력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더듬어 그것을 주웠을 때 d는 표지까지 열세장인 두꺼운 마분지와 좁은 간격으로 말린 스프링에서 온도를 느꼈다. 달력을 올려두고 식탁을 짚어보니 역시 미지근했다. 그밖에도 더 있었다. 가구와 식기, 유리, 각종 손잡이들. d는 서서히 그것을 눈치챘다. 공기보다는 싸늘해야 마땅한 사물들이 미묘한 생물처럼 미열을 품고 있었다. 그 미적지근한 온기를 참을 수 없어 d는 사물과의 접촉을 줄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는 없으니 변한 것은 내 쪽이다. d는 생각했다.

내가 차가워졌다.

 

d의 아버지, 이승근은 한때 목수였다. 목공소에 붙은 다락방에서 이승근과 그의 아내 고경자, 그리고 d가 살았다. 목공소 구석에서 신발을 벗고 시멘트 계단을 세개 올라가면 그들이 먹고 자는 데 사용하는 방이었다. 옷장과 낮은 책상 하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조그만 부엌이 딸려 있었는데 그 공간엔 창이 없어 고경자가 국을 끓이거나 고기를 삶으면 냄새 밴 수증기가 방을 거쳐 목공소로 내려왔다. 목공소에 쌓인 목재들엔 국과 밥과 고춧가루가 섞인 반찬 냄새가 배어 있었고 세 식구가 사용하는 방엔 목공소에서 올라온 목재 냄새가 배어 있었다. d가 어릴 적엔 목공소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나무에 관해 질문해오는 선생이나 동급생이 있었는데 d는 나무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목공소에는 나무가 없었으니까. d가 생각하기에 목공소를 채운 것은 목재였지 나무가 아니었다. 이미 톱이나 날에 썰렸고 이윽고 다시 썰린 뒤 못이나 아교에 붙들려 형태가 바뀔 예정인 널빤지들, 껍질이 벗겨진 토막과 막대 들이었고 그것들은 생긴 것부터 나무와 전혀 닮지 않았잖아. 목공소 옆에는 바랜 색종이와 먼지 쌓인 고무풍선을 파는 문구점이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마른 고기를 진열장에 내버려두는 정육점이 있었다. 비좁고 후미진 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목공소는 사계절 밤낮으로 어두컴컴했다. 톱밥은 늘 매운 냄새를 풍겼고 구석에 쌓인 오래된 목재들은 시큼하게 썩어가며 부풀었다.

이승근은 솜씨가 별로 없는 목수였다. 고객들이 목공소로 찾아와 항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고객이 많았으므로 고객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친절과 불안과 비굴함이 섞여 있었다. 예상된 상황이 벌어지면 품삯을 깎으려는 수작이라고 고객을 비난했다. 인간들 참 뻔하고 뻔뻔하다고 이승근은 불평했지만 d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목공은 볼품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정확하지 않았으며 안정적이지도 않았고 실용적이지도 아름답지도 기발하지도 심지어 기괴하지도 않았다. d는 그가 고객에게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지, 목공소를 찾아온 고객에게 자신은 솜씨가 없다고 왜 고백하지 않는지, 그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고 같은 상황을 왜 거듭해 겪는지를 의아하게 여겼다. 이승근은 d를 때리지 않았고 아내가 만든 음식을 불평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었으며 술이나 경마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자기 목공으로 세 사람이 먹고산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것이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도. 마끼따, 히따찌, 렉슨, 보시의 전동기구들, 끌과 망치와 대패, 접는 톱과 실톱. 이승근이 그것들을 사용해 목재를 절삭하고 구멍을 내고 깎아내고 문지르는 소리는 d에겐 세계의 배음(背音)이었다. 작업공간과 주거공간이 제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아 d는 방에서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숙제를 하는 동안 그 소리를 들었다. d가 특별히 끔찍하게 여겼던 것은 톱날의 회전으로 목재를 자르는 절삭기들이 내는 소리였다. 작업이 없는 순간에 목공소는 적막했지만, 어느 순간 그 소리가 시작되면, 어느 날에나 틀림없이 시작되고는 했는데, d는 어두운 방에서 연필을 쥐고 숙제를 하거나 낙서를 하면서, 귀가 빨개진 채로 생각했다. 나는 저 회전의 댓가로 먹고산다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목공의 댓가로. 은반처럼 돌아가는 톱날에 자신의 조그만 손가락을 올려보는 광경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d는 기다렸다. 톱날이 아버지의 피로 흥건해진 채 멈추는 순간을. 아버지가 자신의 신성함을 그만 멈추고 목공소가 마침내 고요해질 순간을. 그런 순간에 관한 상상들은 d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고 죄책감을 느끼게 했으며 갑작스럽게 치솟는 분노로 아버지를 노려보거나 비슷한 정도의 환멸로 그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d에게는 신성한 것이 없었다. 자주 귀를 붉혔고 잡음을 들었다. 쪼개진 목재를 잡아뜯는 듯한 소리, 쇠로 만든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일 때도 있었고 보푸라기들이 작은 뭉치로 귓속을 구르는 것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일 때도 있었다. 고요한 장소에 있을 때 d는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정적이나 고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소리의 흔적, 잡음들. 그것이 세계를 상시적으로 메우고 있었다. d는 별로 말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고 많은 말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d에게는 세계가, 이미 너무 시끄러웠다.

 

dd를 만난 이후로는 dd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자. 그들이 공유하는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그럼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미소, 공감할 수 있는 유머와 슬픔, 서로의 뼈마디를 감각할 수 있는 손깍지, 쓰다듬을 수 있는 따뜻한 뒤통수, 어깨를 주무르고, 작고 평범한 색을 띠고 있는 귀를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목에 입술을 대고, 추운 날엔 외투를 입는 것을 서로 거들며, dd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해지자.

ddd는 양천구 목2505번지 B02호에 살았다. 대규모 아파트단지와는 거리가 있는 동네로 이십여년 된 빌라와 단독주택 들이 모인 곳이었다. 말하자면 양천구의 가장자리로, 정류장이 있는 대로에서 길을 건너면 강서구였다. 집들은 대체로 붉은색이었고 낮고 낡은 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B02호의 문은 크고 두꺼웠으며 사람의 얼굴 높이에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창이 있었다. 녹슨 문턱을 넘으면 발바닥에서 발목 정도의 낙차로 지면보다 낮은 현관이 있었고 거실과 부엌과 욕실과 방이 있었는데 순서대로 모든 공간이 열차처럼 일렬로 이어져 있었다. 편의에 따라 B라고 칭하기는 합니다마는 이 정도 깊이는 반지하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1층입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사실을 묻고 확인하듯 말했으나 집 자체가 미묘한 경사에 자리를 잡고 있어 가장 바깥쪽인 현관에서 가장 안쪽인 방으로 들어갈수록 지하로 완만하게 들어가는 구조였다. 방에는 옆으로 긴 창이 나 있었는데 창의 높이가 지면이었으므로 그쪽은 이미 반지하였다. 그러나 결국엔 지층이라는 핸디캡이 적용되지 않은 월세로 결정되었다. ddd가 그 방을 얻기로 결정한 이유는 각자의 직장에서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동네였고 다른 방들이 그 방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었다. 임대인인 김귀자는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노인이었다. 그녀는 매월 집세를 입금받을 계좌를 알려달라는 중개인의 요구에 난처해하며 자신에게 직접 주면 된다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가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고 손만 내밀어서 이 할미한테…… 주기만 하면 돼,라고 말하며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내밀어 보였다. 작고 흰 손이었다. d는 자신의 얼굴 앞으로 불쑥 다가온 그것을 보고 놀랐다. 노인의 얼굴이 d에게 낯익었고 익숙했다. 기괴한 방법으로 집세를 지불하는 방법을 일러주며 비굴하게 웃는 그 얼굴이. d는 언짢고 불쾌했지만 그 방을 얻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방을 얻었다. dd는 방을 얻을 때 채광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집은 그 점에서 dd가 원하는 바에 별로 근접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잘 적응했다. 잠을 자고 먹고 씻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해 돌아오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하고 다육식물이 담긴 작은 화분을 모으고 그밖에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사고 싶은 외투와 d가 작업장에서 신을 부츠의 방수에 관해 말하고 d를 만지고 늦잠을 자고 고지서를 걱정하거나 이따금 불면하기도 하며 크게 바라거나 크게 비관하는 일 없이 그 집에 잘 적응해 살았다. 들뜬 벽지나 낡아서 도금이 벗겨진 손잡이에 손을 베이는 일이 잦았고 기묘하게도 일요일에, 일요일만 되면, 욕실 천장 한구석에서 흙탕물이 타일의 골을 따라 흘러내렸으며 보일러를 사용하지 않는 계절에는 눅눅해진 이불 위에서 등이 차가워진 채로 잠을 깨게 되는 방이었다. 그 방으로 돌아오다가 dd는 죽었다.

 

내동댕이쳐졌다.

d는 그것을 반복해 생각했다. 많은 것을 생각했는데 마지막엔 늘 그것을 생각했다. 내동댕이쳐졌지. 그 많은 사람이 타고 있던 버스에서. 정교하고도 무자비한 핀셋이 집어 내던진 것처럼 오로지 dd만, dd만 바깥으로. 충돌의 결과, 우리가 매일 오가던 딱딱한 도로 위로.

d는 거의 모든 사물에서 온기를 감각하게 된 뒤로 외출하지 않았다.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누구와도 통화하지 않고 그다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사물들을 부수고 쪼개고 버렸다. 공들여 그 일을 하다보면 사물들의 온기로 손이 뜨거워졌다. d는 작열감을 줄이려고 머리를 긁거나 몸에 손을 문질러가며 작업했다. 쓰레기를 계속 버려 골목을 지저분하게 만든다고 툴툴거리며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도 했으나 d는 대꾸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상자를 채우고 물건을 버리고 상자를 채웠다. 사물들은 내내 기묘하고도 기괴한 생물들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고 그것을 만질 때마다 d는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는, 거짓말을 하니까.

d는 어리둥절한 채 한동안 기다렸다. 사물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급하게 외출할 일이 있을 때 dd가 머리에 눌러쓰곤 했던 모자가 옷장에 걸려 있었고 실내용 슬리퍼는 dd가 마지막으로 벗어둔 그대로 현관 매트 위에 남아 있었으며 출근하기 직전에 차를 담아 마셨던 컵은 갈색 차를 조금 담은 채 탁자에 놓여 있었다. 베란다에는 우산과 몇번 사용하지 않은 여행가방이 있었고 욕실엔 낡아서 교체할 때가 된 칫솔과 절반 넘게 남은 헤어제품이 있었으며 탁상 달력에는 dd의 필체로 메모가 적혀 있었고 이불과 베개에는 여전히 dd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혹은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그 공간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지금이 아니고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지금이자 다음. d는 매순간 벅차게 그 순간을 실감했고 매순간 그 실감을 배반당했다.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d는 물건을 버리며 그 기만적인 기대와 거짓된 실감을 버렸다.

예컨대 dd의 갈색 구두. 그것과 같은 구두는 세상에 없었다. dd의 발 모양으로 늘어났고 dd의 걸음걸이 습관 그대로 굽이 닳았으며 반복해 접혔고 주름졌으니까. 그것을 상자에 넣으며 d는 생각했다.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동시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물은……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여기 담겼으니 저쪽엔 없다. 여기에 있으면 저기엔 없지. 사물이 그렇지만 구두를 신던 사람은…… 인간은 사물과는 달라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다고…… 내가 언젠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적어도 들은 적이……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상자에 담긴 사물들을 바닥에 쏟기도 하고 도로 담기도 하며 d는 묵묵하게 작업했다. d가 판단하기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사물 몇가지는 dd의 가족에게 보내야 했는데 나중엔 어떤 사물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사물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사물을 버리거나 상자에 넣은 뒤 나흘 동안 우체국을 오가며 dd의 물건을 담은 상자를 dd의 가족에게 부쳤다. 마지막 상자를 우체국에 맡긴 뒤 d는 집으로 돌아왔다. B02호에 머물렀다.

 

 

2

 

2505번지 건물은 장식 없는 외벽에 유약을 바른 검붉은 벽돌과 파란 기와로 덮였고 B층에 두 집, 1층에 두 집, 2층에 한 집이 있는 구조로 김귀자 노인은 2층에 홀로 살고 있었다. 김귀자의 마당엔 김귀자가 직접 흙을 나르고 벽돌로 가장자리를 둘러 만든 화단이 있었는데 샐비어, 맨드라미, 코스모스, 치자와 쑥갓, 노란 앵두가 열리는 아직 어린 앵두나무 하나…… 그리고 우연하게 발아했다가 김귀자가 씨를 받아 화단에 심은 양귀비가 자라고 있었다. 붉거나 노랗거나 흰 꽃들의 중심은 검었고 홑으로 피는 꽃이 지고 나면 올리브 모양의 씨방이 남았다. 동네 노파들이 양산을 쓰고 김귀자의 양귀비를 보러 왔다. 이것이 앵속이냐…… 배앓이나 치통이나 흉통엔 이만한 것이 없다 이게 진짜배기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청록색 잎으로 둘러싸인 줄기는 무척 가늘었는데 꽃이 떨어지고도 꺾이거나 휘어지는 일 없이 바로 선 채 말라갔다. 김귀자는 덜 익은 씨방에 칼집을 내 유액을 수집했고 줄기와 씨방이 다 마르면 뿌리째 뽑아 다발로 보관해두었다. 김귀자의 마당으로 놀러 오는 노파들이 양귀비 달인 물을 나눠 마시고 마당에 드러누워 놀았다. d는 그녀들에게 떡과 수정과를 받아 먹었다. 그녀들이 햇빛을 피해 돗자리를 펼치는 응달이 B02호의 창 앞이었으므로.

자 자 이 떡을 드시오…… 젊은 양반 그리고 이것을 마셔보시오 계피를 듬뿍 넣고 끓여 이게 맵싸하니 가슴에 좋고…… 김귀자와 그녀의 방문객들은 인견으로 만들어진 여름옷을 입었고 각자 가지나 당초 문양이 그려진 부채로 얼굴을 부치며 떡과 마실 것을 d에게 권했다. d는 그녀들이 창 너머로 내미는 접시를 받았다. 그녀들이 창 너머로 접시를 내밀 때 접시 가장자리를 잡은 손과 부채를 쥔 나머지 손은 짙은 색이었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보였다. 그들은 해가 있는 동안 응달에 머물면서 그들의 자식들과 날씨와 차츰 달아나는 입맛과 더는 장을 직접 담가 먹지 않는 세계와 전쟁에 관해 말했다. 김귀자 노인은 어제 오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가 사이렌을 들었고 그녀가 분명하게 알기로 민방위훈련이 있는 날이 아니었으므로 틀림없는 공습경보라고 여기고 아이고 어머니…… 주저앉고 말았는데 조금 뒤에야 꽃과 화분을 파는 트럭 행상의 확성기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노파들은 크게 공감하면서 자신들도 그런 착각을 한 적이 있고 똑같은 이유로 가슴 철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그중에 한번은 실제 상황이기도 했으므로 그런 착각이 아주 터무니없지만은 않은 일이었다며 1983225일에 인천이 폭격당하고 있다는 오보로 시작된 이웅평 대위의 귀순 사건을 말했다. 당시 각각 서울과 오산과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던 그녀들은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이웅평 대위를 목격하고 너무나 경악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너무나도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였으므로. 북한에 사는 모든 인간은 인민이나 군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못 먹고 못사는 못생긴 인간, 즉 빨갱이 괴뢰들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뜻밖에 세련된 전투기를 타고 나타난 북한군 대위는 괴뢰군이라기보다는 미남, 그러면 북쪽 상황은 생각만큼 괴뢰한 상태는 아닌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가도, 저 잘생긴 군인이 자유에 목말라 자신의 전투기로 북쪽에서 이륙한 뒤 단 한차례도 어딘가 기착하지 않은 채 논스톱으로 남한으로 날아와버렸다는 것은 다시, 북쪽이 얼마나 괴뢰한 상태인지를, 동시에 우리네 사는 이쪽이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 상태인지를 알게 해주는 증표였다고 그녀들은 서로의 첨언을 긍정해가며 말했다. 그래그래 그러나…… 그 좋은 것은 언제든 전쟁 한번으로, 하루 혹은 반나절도 되지 않는 폭격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 잿더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젊은 양반은 그것을 아는가 우리는 사무치게 그것을 알아…… 젊었을 때 첫번째 전쟁을 겪은 그녀들은 자신들의 인생 중에 언제고 두번째 전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생각이라기보다는 거의 무의식적인 확신과 예감을 지닌 채 살아왔기 때문에, 부지불식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의 여전한 현재를 이따금 확인하게 되며, 그런 것을 보면 자신들의 내적 삶에서…… 그러니까 그 맴속에서……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트럭 행상의 확성기 소리를 공습 사이렌으로 듣기도 하면서…… 이것이 꿈인가 생()인가…… 들어보시오 내가 사람 죽는 걸 처음으로다가 본 것이 19506월에 한강교가 끊어질 때였는데…… 그때에 내가 남편이 있었고 애가 둘 있었어. 애를 하나는 남편이 목에 태웠고 다른 하나를 내가 업고 무서우니까 밤중에 그 많은 사람에게 떠밀리듯 걷고 있었는데 다리를 다 건너기도 전에 등 뒤에서 꽝, 하니까 내가 앞으로 넘어졌고 조금 있다가 뭐가 내 손등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넘어졌다가 겨우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밀리니까 정신이 없고 아이고…… 뭐가 계속 미끈하게 밟히는 그 길을 나아가고 나아가고…… 뒤가 어떻게 됐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냥 나아갔다. 강을 다 건너서 컴컴한 이짝에 도착하고 보니 바깥양반도 우리 큰애도 없어. 벌써 건넜겠지 어딘가 있겠지 돌아가지를 못하니 내가 그렇게 믿고 그저 걸었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사람들 가는 대로 걷고 뛰고. 그러다 지나던 사람이 알려줘서 죽은 아이를 업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포대기를 풀어보니 애기 뒤통수가 다 벗겨졌어. 빨간 머리뼈가 다 보이고. 그걸 앞으로 둘렀으면 내 등이 그렇게 벗겨졌겠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나는 안 울어. 못 운다. 그때도 못 울었고 지금도 못 운다. 그저 아이고 무섭지…… 너무 무서우니까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거길 벗어나고 보니 내가 컴컴한 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혼자였어. 그래 무섭고 외로워…… 서둘러 사람을 만나 살림 차리고 딸을 낳았지. 그 딸이 딸을 낳아서 둘이 다 무사하게 현재 수색에 살아. 손녀가 나를 닮았다. 그런데 그년하고 그 에미년이 내 집에 올 때마다 지저분하다고 잔소리를 뭐라고 해. 뭐를 이렇게 쌓아두고 사느냐고 물건들을 지저분하게 두지 말고 좀 버리라고. 내가 볼 적에는 그게 다 소용이 있는 건데 이웃들 보기에 부끄럽다고. 젊은 양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두어개 말해보시오. 그게 다 있어 뭐가 되었든 내 집에 그것이 다 있어…… 떡을 더 드시겠소? 그러면 더 들어보시오 나는 아주 남쪽까지 다녀왔어…… 낮엔 걸었고 밤에는 남자들이 내 배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담이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졸았다가 해가 뜨면 다시 꼬박 걸어 남쪽으로…… 이제 막 피난민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그 시골 마을엔 아직 본격적인 전쟁이 당도하지 않아 부서진 것도 없고 너무 조용해, 김귀자는 마침내 거기서 깊게 자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느 낮 어느 담벼락에 내가 기대 쉬고 있을 때…… 그 담이 너무 서늘하고 내가 너무 지치고 피곤해 이제 그만 영영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담에 박이 자라고 있었어. 조롱박, 아직 어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한 박이…… 희고도 파랗게 그것이 어찌나 예뻤는지 손으로 쥐었다가 땄지. 내가 그것을 뚝 땄을 적에는 반드시 먹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게 다만 탐스럽게 예뻐서, 십여개 열린 것 중에 한개를 쥐고 넝쿨에서 뚝 떼어낸 거야. 그랬더니 그 집 여편네가 벼락같이 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 박을 따지 말라고 야 이 도둑년, 박 도둑년, 아주 그러며 내 손에 든 박을 싹 빼앗아갔지. 나하고 똑, 같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그년이 아주 말쑥한 얼굴과 머리를 하고 박 도둑년…… 그때에…… 대낮에 내가 너무 야속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때 내가 매우 놀라며 깨달았지.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 그러자 이번엔 그게 기쁘고 막막해 눈물이 났다. 내가 살아야겠다 이왕에 여기까지 살았으니 끝내 살아보자는 뚜렷한 맴이 들었어…… 그 확고하고도 뚜렷한 맴을 먹게 된 것이 부끄럼 덕이었으니 그것이 나를 살렸지 그러니까 그것이 보자 지금 내 나이가 하나 둘 서이 너이…… 하니 거의 백년의 일이로구나……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도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해. 그것 한가지 내가 그 맴을.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정오를 넘어 늦은 오후로 진입하면 태양이 이동하면서 양달과 응달이 바뀌었다. 김귀자와 그녀의 방문객들의 발치에 놓인 수정과를 담은 유리 단지가 햇빛에 노출되었고 그 반사광이 d의 지하방으로 내려와 벽에서 일렁거렸다. 성긴 그물 같은 그 빛을 바라보며 d는 많은 것을 생각했고 d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들은 거의 모든 것에 관해 말했다. 화분(花粉)과 흙과 전쟁과 염장(鹽藏)에 관해…… 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 같고 세 사람이 번갈아 하는 이야기 같은 그 이야기들을 들을 때 d는 그녀들이 저리로 좀 갔으면, 이제 그만 자신의 창 앞에서 갈색 반점이 있는 자주색 입술들로 떠드는 것을 멈추었으면 하다가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매달려보고 싶었고 그러다가도 집세를 지불하는 날이 되면 문을 두드릴 테니 손만, 그러니까 문을 조금만 열고 돈을 쥔 손만 내밀면 된다고 말했던 김귀자, 첫 대면에서 불쑥 가슴 쪽으로 다가왔던 그녀의 흰 손이 떠올라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다가 마지막엔 전부 꺼져버렸으면…… 그리고 당신의 잡동사니들은 따뜻하지 않냐고, 정말로 역겹게 따뜻하지 않냐고 실은 언제나 묻고 싶었는데, 심지어 그것들이 어째서 따뜻하지 않냐고 당장 소리를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난폭한 상태가 되어서도, 벽을 바라보는, 좀더 정확히는 벽에서 일렁이는 빛의 그물을 바라보는 d의 얼굴은 고요했고 눈빛도 그녀들의 눈빛처럼 고요하게 흐리멍덩했다. 여름이었다. d는 그녀들의 정오에 섞인 채 길쭉한 빈 자루 같은 한개의 공간으로 존재하면서…… 벽 위로 밤이 스미고 낮이 그보다 밝은 빛깔로 번졌다가 다시 차츰 밤이 배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턱에 있다고 d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턱이 아팠으니까.

d는 종일 입을 다물고 있었고 때때로 피맛을 느끼고 입을 벌렸으나 아무리 혀로 더듬어도 출혈은 없었고 다만 그때마다, 그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입을, 턱을 세게 다물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특히 밤에,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뜬 채 어둠 속에 있다보면 육체는 희박해지고 사물처럼 턱이 남았는데, 그런 것 같은 때가 있었는데, 그때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그리운 것도 만져지는 것도 서글픈 것도 없이, 오로지 턱이다, 지금은 턱이다, 이것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마음은 턱에 있어. 마음은 언제나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니까. 최종적으로 턱이 남았다면 마음은 여기에. 위턱과 아래턱, 턱을 짓누르는 턱, 그 간격에, 서로 다른 극끼리 붙은 자석처럼 꽉 달라붙은 그 간격에 간신히.

녹슨 자물쇠로 꽉 잠긴 듯한 입속에.

뻣뻣한 혀와 화약 맛이 도는 침에.

마음은 그런 데 있어.

1950628일에 한강교를 벗어날 때 김귀자 노인은 발에 밟히던 미끄러운 것 중에 한 조각을, 다리를 방금 작살낸 폭발의 잔광 속에서 우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은 누군가의 얼굴이었다고 말했지. 바가지 반의 반 조각 분량의, 뼛조각에 붙은 인간의 얼굴. d는 그 얼굴을 계속 생각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누군가의 두개골에 연결된 채로 완전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스물여덟개의 뼈가 아름답게 맞물려 완전하게 닫혀 있던 두개골. 그는 그 두개골 속에 뇌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열심히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억하기도 하고 망각하기도 하며 살았겠지. 뇌는 둥글지…… 그것이 둥근 이유는 두개골이라는 것이 아름답고도 단단한 구의 형태로 닫혀 있기 때문이야. 두개골이라는 틀이 있기에, 그것이 고유한 형태로, 저마다의 패턴으로 완벽하게 닫혀 있기에 뇌는 둥근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야. 말하자면 삶의 형태로…… 틀을 벗어나면 뇌는 그저 맥없이 풀어지는 구불구불한 끈일 뿐. 각각의 두개골은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 있지.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가지, 백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가지 패턴으로. 백만이라면 백만의 패턴으로. 각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니까 한개의 두개골, 그것이 붕괴되었을 때 세계는 유일했던 한가지, 방금 부서진 그 패턴을 상실한다. 억겁으로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돌아오지 않을 그 패턴을.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런 상실쯤 세계에…… 그런 일은 그렇게 일어난다. 그냥 그렇게. 어떻게 그렇게…… dd의 패턴은 아름다웠겠지. 만인 속에서도 내가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얼굴 속에서 고유하게 맞물려 있었을 것이다. 그것, 유일하니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두번은 만날 수 없는…… 그것이 내 곁에서 슥 사라질 때, 슥 빠져나가 멀리, 튀어오르는 빗물로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던 검은 길 위로 내동댕이쳐지기 직전에, 나는 dd를 붙들고 있지 않았고 이윽고 모든 것이 그 길 위에서…… 우리가 항상 오가던 길 위에서, 중단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결과일까…… 무엇의, 결과이기는 한 걸까.

누군가 B02호의 문을 두드렸으나 d는 응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다음날 다시 왔다. d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고 집 주변을 걸어다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딱딱하고 얇은 밑창이 달린 남성용 구두를 신은 사람일 거라고 d는 짐작했다. 발가락이나 발볼 어딘가에 상당한 공간이 남는 구두를 신은 발로 걷는 소리였다. 그 구두가 매우 잘 닦여 있을 거라고 d는 생각했다. 매일 구두를 닦는 것이 그 구두를 신은 사람의 습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저 구두는 오늘, 매우 잘 닦여 있을 것이다…… 김귀자의 마당 문이 열리고 누군가 마당을 걸어다녔다. 잠시 뒤 d는 마당을 향해 난 창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았다. 삐걱거리며 창이 조금 열렸고 조금 뒤엔 조금 더 열렸다. d는 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방을 들여다보는 남자를 보았다. 그의 뒤로 김귀자의 화단이 보였다. 양귀비와 샐비어와 맨드라미가 여러 날 물을 받지 못한 듯 축 늘어진 채 말라 있었다. d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대신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눈과 입의 윤곽이 뚜렷했고 머리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콧등이 왼쪽으로 휘어 있어 구겨져 보이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빈방과 d를 천천히 둘러본 뒤 자신을 집주인의 사위라고 밝히며, 있는데 왜 없는 척을 하느냐고 물었다. 월세가 상당히 밀렸고, 대답도 없어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d는 떡을 기다렸다. 그리고 김귀자의 수정과를. 남자는 두가지 중에 어느 것도 내놓지 않고 창 너머로 d를 내려다보았는데 김귀자 노인이 호스피스 병원으로 들어갔다고, 이제 합법적으로 다량의 모르핀을 투여받고 편안한 꿈에 잠겨 남은 인생을 무통하게 죽어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심상하고 무심한 눈에서 d는 그것을 다 알게 되었다. d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김귀자의 사위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위쪽 창틀에 가려 이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방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은 다음에 d가 대답하지 않자 이 방은 원래 이러했느냐고 물었다.

원래?

그러니까…… 본래 이러했느냐고.

d는 남자의 턱을 올려다보다가 이렇게 답했다. 그래요 진짜 그렇다 당신의 말씀 그대로, 이 방은 본래 이러했습니다.

 

d가 문을 열고 처음으로 들은 것은 모터 소리였다. 여전히 여름,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한낮이었고, 에어컨디셔너 실외기들이 윙윙거리고 징징거리며 곳곳에서 대기를 달구고 있었다. d는 걸어서 골목을 벗어났다. 콧속은 바싹 말랐고 옷이 헐겁게 여겨졌으며 실제로도 헐거웠지만, 발은 차갑고 걸음은 가벼웠다. 양지쪽에서 성큼성큼 걸었다. 거리가 뜨거웠고 그게 d의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뜨거워 사물의 온도가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걸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종아리와 배에 감기는 옷자락들, 신발, 그러한 사물의 온도가 그보다 뜨거운 대기에 훌륭하게 잠겨 있는 것이. 여름은 좋구나, 모든 것이 더 대기에 잠겼으면 좋겠다, 세계는 이 뜨거운 것에 내내 있는 것이 좋겠다고 d는 생각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겨울옷을 입고 걸었다. 며칠을 입고 지냈는지 모를 스웨터와 구겨진 면바지 차림에 홀쭉한 뺨은 성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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