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리얼리티 탐구의 문학적 형식들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김엄지와 최은영의 소설들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저서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1. 리얼리티, 형식, 시선
내전 중인 스페인 게르니까(Guernica)에 가해진 나치의 폭격으로 천오백여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삐까소(P. Picasso)는 「게르니까」를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스페인을 상징하는 황소부터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사지가 찢겨나간 병사 등이 등장한다. 살아남은 모든 것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울부짖고 있다. 부서지고 불타는 잔해 위로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그림에서 스페인내전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생생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림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여기에 전쟁 ‘일반’의 참상은 있어도 ‘게르니까 폭격’의 참상을 한정할 만한 특수성은 없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실감 혹은 현장성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그것은 ‘게르니까’라는 제목에 의해 유도된 지식과 정보가 만들어낸 환상통의 일종일까?
이러한 일련의 질문은 대답을 얻기는커녕 단지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느낌을 준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대체 ‘일반’과 ‘특수’를, ‘생생함’을 논한다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리얼리티는 비단 현실을 꼭 닮은 모사물에 찬사를 보낼 때 동원되는 수사 따위가 아니다. 현실, 실재, 실제 등 리얼리티의 번역에서 파생된 말들은 많지만, 지금 이 글의 맥락에서 ‘리얼리티’(reality)는 우리가 놓인 세계와 그 재현이라 할 문학을 넘나들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지금 리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면 절망과 분노로 가득한 세계, 그 세계를 허구로써 재현해야만 하는 문학이 느끼는 무력감 때문은 아닐까. 다시 말해 생생한 고통으로 육박해오지만, 무엇이라 정확히 말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괴물을 응대하는 문학적 현실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는 자문 때문이겠다.
리얼리티는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지만, 결국 리얼리티는 ‘리얼’(real)이 있어야 생겨난다. 문제는 리얼이란 다만 ‘있음에 대한 환상’일 뿐 결국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문학적 리얼리티를 구현하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실감’을 요구하고, ‘진짜 같은 것’을 따지니 말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들고, 공백에 육체성을 부여하려 드는 리얼리티란 ‘모순’이거나 ‘조작’이다. 결국 문학적 리얼리티는 어떤 자기부정적 욕망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다. 가상, 관념, 거짓 등 타고난 자질이 부여한 존재방식을 거부하고 현실, 실재, 참 같은 정반대의 자질로 자신을 대체하려는 부정적 욕망을 지닌다는 뜻이다. 자기 밖에 존재할 현실을 움켜쥐게 되면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때문에 문학적 리얼리티의 창조는 언제나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해줄 가장 유효적절한 형식에 대한 고민. 그래서 전통적으로 형식이란 무질서에 질서와 필연성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정의되어왔다.
그러나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 육박해오는 개별자들의 고통만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무질서와 우연성으로 가득한 세계 어디에서 질서와 필연성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난제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기 위해 다시 한번 「게르니까」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이 그림은, 자신이 놓인 현재를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을 짊어진 작가가 겪는 내적 모순이 곧 작품의 형식과 동의어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저 절단된 신체와 감기지 못한 눈은, 전체의 형상을 그려내려는 외부의 눈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 신체들이 파편으로밖에 그려지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파편성은 외부의 눈이 되기를 거부하려는 의지의 결과다. 작가는 참극의 현장을 관망하듯 굽어보는 태도, 즉 전체를 포괄하는 시선을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확보해야만 하는 시선의 높이를 포기하고 만다. 현장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태도가 파편을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그려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파편의 배치를 완성한다.
형식은 무질서와 우연성 속에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잡느냐(positioning)의 문제다. 현실을 보는 태도의 정립 문제고, 어떤 육체로 존재할 것이냐의 문제다. 이 때문에 형식에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기까지 방황을 거듭한 작가의 시선이 담기게 마련이다. “형상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판결하는 힘”이고 나아가 “윤리적인 것”이 된다는1) 단언은, 작가의 시선이 왜 의식적인 행위가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만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저 그림으로부터 어떤 ‘생생한 현실’을 느낀다면, 어떤 죽음도 ‘일반’이라는 범주로 보편화될 수는 없고 개별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그 참극의 현장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향한 시선과 그 시선에 담긴 의지가, 시공간을 넘어 찢긴 육체의 고통을 느끼고 원망에 찬 절규를 듣게 한다. 관객의 시선과 의지를 맞받는 작품의 자리에는, 형식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이끌고 시야를 제공하는 작가의 시선과 의지가 놓여 있다.
이 글은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그려낸 현실을, 이들이 만들어낸 형식과 그 형식을 낳은 시선의 의지라는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2010년 이후 등단한 작가 중 특히 김엄지와 최은영(崔恩榮)의 소설들을 다룬다. 두 작가의 이력을 평균 내보면 나이는 서른, 등단 햇수로는 5년 정도가 된다. 생물학적 연령 면에서나 등단 경력으로 보아 이들은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가 직면한 현실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특히 이들 두 작가의 작품을 고른 이유가 있는데, 이들이 완전히 상반된 창작 스타일을 지녔기 때문이다. 김엄지는 구성이나 표현 면에서 인위적인 조형감각을 보여주는 작가다. 반면 최은영은 주인공의 삶에 얽힌 사연으로 서사를 진행하는 스토리 중심의 작가다. 요컨대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김엄지는 ‘어려운 소설’을 쓰고 최은영은 ‘쉬운 소설’을 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리얼리티란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수한 기교를 동원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시선과 형식이 어떤 자기부정적 욕망 속에서 탄생하고 육체를 갖게 되는가에 있다. 물론 서로 상반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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