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금희 錦姬
1979년 중국 지린성 주타이시 출생. 2007년 『연변문학』 주관 윤동주신인문학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이 있음. jinjinji79@naver.com
촌장선거
샴푸 세트 마흔개가 출고되기로 한 아침, 중민은 광철이 안민촌 촌장으로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추석을 열흘가량 앞둔 늦가을이었다. 좋고 궂기를 여러날 반복하던 하늘에서는 신새벽부터 애꿎은 빗방울들이 부슬부슬 흩뿌려 내렸다. 한달 전쯤 갓 중학생이 된 아들애를 학교까지 데려주고 집에 들어서는 중민에게 아내가 그랬다. “린스 있는 거 말고 수건 들은 거야, 마흔개 전부.” 중민은 우산을 접어 현관문가에 세워놓은 뒤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쪽파단을 주방으로 가져갔다.
아내는 한창 화장대 앞에 앉아 주름살이 패기 시작한 이마며 볼 위로 퍽퍽 퍼프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왜 또 바꿨대? 하고 물으려다가 중민은 그만두었다. 마흔개 전부라면 일전에 알고 있던 바와 달리 여섯개의 모듬 세트는 취소되었다는 얘기고, 샴푸린스 세트가 샴푸수건 세트로 바뀌었다는 것은 예상한 총금액에서 600위안가량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내사 매년 주는 콩기름보다야 이게 낫다 싶은데……’ 하면서 샴푸 박스를 가리키던 여자의 매끈한 손가락과, 손톱 위에 칠해진 빨간 매니큐어가 생각났다. 여자한테 이러니저러니 토를 달 상황은 아니었다. M시 통계국에서 출납으로 일하는 여자는 아내가 대형마트에서 ‘서울생활관’이라는 매장을 오픈한 뒤 갑자기 늘기 시작한 손님 중 지금까지 남아준 의리 있는 단골이었다. 춘절이나 단오 또는 추석 같은 명절을 당하여 직원들한테 배급해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 여자는 특별히 아내의 가게를 찾아왔고 가끔은 본인이 쓰려는 것으로 보이는 그릇 세트와 커피잔이며 냄비 들을 구입해가기도 했다. 샴푸수건 세트로 전부 바뀐다 하더라도 마흔개면 2000위안이 넘는 매상, 요즘처럼 경기가 좋지 않은 세월엔 크게 힘이 되는 주문이었다.
화장을 끝낸 아내는 식탁 위에 올려둔 만두와 좁쌀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열심히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여자보다 겨우 두살 위라지만 마흔 줄에 들어서면서부터 급속히 살이 찌기 시작하여 어느덧 중민의 두 팔 안에 온전히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허리가 굵어진 아내였다. 의자에 퍼더버리고 앉아 죽을 퍼먹고 있는 아내의 상반신을 보면서 중민은 그 이미지가 밭고랑에 물앉은 늙은 호박, 것도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 버려진 상한 호박 같다고 생각했다. 그놈의 타오바오(淘寶, 중국의 대형 쇼핑몰) 때문에 아주 그냥 미칠 것 같다고 아내는 툴툴거렸다. 가방을 찾아 들고 신발을 꿰신다가는 기어이 문어귀에 세워둔 빈 맥주병을 쨍그랑 걷어찼다. 맥주병은 깨지지 않았고 남은 맥주 같은 것이 흐르지도 않았지만 중민의 신경을 묘하게 거슬렀다. “아니, 마셨으면 제때제때 병을 물리든가……” 아내는 슬쩍 곁눈질로 남편의 안색을 훔쳐보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에 아내가 들어가는 소리까지 들은 다음 중민은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흥, 저러니 내가 잘해줄 수 있을까,라는 욕지기가 입 안에서 뱅뱅 돌았다. 아들애가 먹다 남긴 죽그릇은 물론, 아내는 지어 자기의 죽그릇이며 수저마저 치우지 않았다. 가정의 경제를 다년간 감당해왔다고 저 유세인가. 아니면 한때 호황을 누리던 장사가 연 3년 내리막길을 걷다 못해 점점 더 지지부진해져서일까. 개수대 안으로 그릇들을 텀벙텀벙 집어넣고 쏴— 물을 뿌리다가 중민은 전날 저녁 그의 넓적다리께에 비비적거리던 아내의 푼더분한 엉덩이를 떠올렸다. 아들애는 자기 방에서 잠이 들었고 중민과 아내는 안방 침대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더랬다.
기름을 발라 반질반질한 머리를 중분으로 가르마 낸 일본군 앞잡이가 허술한 행색의 인력거꾼(지하당원)을 숨가쁘게 추격하고 있는데 벌써 잠이 든 줄 알았던 아내가 꿈지럭꿈지럭 중민 쪽으로 다리를 옮겨온 것이었다. 지하당원은 골목 모퉁이에 인력거를 버리고 인파 많은 시장통 속으로 달려들어갔고 눈치 빠른 변절자는 어느새 뒤쫓아와서 그의 덜미를 잡아챘다. 그때 아내의 육중한 다리가 중민의 다리 위에 올려졌고 중민은 비로소 그녀 엉덩이에서 뿜어지는 야릇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중민은 다리를 툭 털어 무거운 아내를 밀쳐냈지만 지나가는 행인과 옷을 바꿔 입은 지하당원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어 아내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청소기를 돌리다가 중민은 국휘의 장거리전화를 받았다. 작년 춘절휴가 때 고향 동네에서 만난 뒤로는 따로 연락이 없었는데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졌다는 풍문이 들렸으므로 중민도 딱히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지 않았었다. 시시껄렁한 잡담 몇마디 나누다가 국휘가 말했다. “인마, 너도 들었지? 걔 결국 됐다더라, 촌장.” 전화기 저쪽에서 국휘가 입꼬리를 사선으로 끌어올리며 쓰게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같이 후보에 올라서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던 국휘의 삼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다 생각도 되었지만 그래도 중민은 국휘의 꼬장꼬장한 말투에 슬그머니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 잘된 거지 뭐. 이젠 촌에 광철이만한 인물도 없지 않은가?” 하고 중민은 대꾸했다. ‘그만큼 젊은이가 없으니까’ 혹은 ‘너처럼 똑똑한 친구들은 다 도시로 나와버렸잖아’라고 한마디 곁들일까도 생각했지만 모른 체 있었다. 국휘는 “그런가? 그렇겠군” 하면서 하하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래도 말이야, 너한테 하는 얘기지만 광철이 그놈은 아직 안 돼, 이제 봐라, 걔……” 국휘는 거기까지 지껄이다가 그만 말을 멈추었다. “암튼,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까 그 자식도 많이 큰 것 같더라……”
청소를 대충 끝내고 빨 옷가지들을 세탁실에 꾸려넣은 뒤 좀더 두꺼운 잠바를 찾아 걸치고 중민도 집을 나섰다. 여자가 주문한 샴푸 세트를 비롯하여 이미 주문된 물건들은 점심 먹고 가지러 온다고 했으니 그전에 창고에서 매장으로 옮겨두어야 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줄 끊어진 구슬같이 빗방울들은 바람에 날려 멋대로 후드득후드득 차 앞유리에 부딪쳤다. 고가도로 진입로를 앞에 둔 사거리까지 왔을 때에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시야가 온통 뿌옜다. 고가도로를 5분가량 달리고 나서 다행히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또 예상외로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길고도 구불구불 굴곡진 도로 위에 차들이 장난감처럼 빼곡히 붙어 서 있었다. 출근시간이 빠듯한 이들은 연속 빵빵 경적을 울려댔으나 그 소리를 동력 삼아 움직일 수 있는 차량은 한대도 없었다. 중민은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중민이 즐겨 듣는 음악 채널에서 한창 정 즈화(鄭智化)의 「수부〔水手〕」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90년대 초반, 중국대륙을 휩쓸 정도로 인기 있었던 천재 장애인 가수의 노래였다.
그는 말했지, 인생의 풍랑 중에 이만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눈물을 닦고 두려워 말라고, 우리에겐 최소한 아직 꿈이 남았으니까
(他说风雨中这点痛算什么 擦干泪不要怕至少我们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