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리얼리티 탐구의 문학적 형식들

 

‘87년체제’를 애도하다

김숨과 이인휘의 근작들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역서 『지식의 불확실성』 『한 여인의 초상』(공역)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1. 머리말

 

평문 제목을 위와 같이 걸고 왕년의 노동문학도 다시 훑어보는 과정에서 필자가 곱씹어본 텍스트 중 하나는 안재성(安載成)의 장편 『파업』(1989; 사회평론 2009)이었다. 1987년 당시 분출된 변혁의 생생한 열정이 ‘노동해방’의 대의로 관념화되는 대목들에서 오늘날 변질된 건 그런 열정이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학출(學出)’인 정기준이라는 인물이 동지인 홍기에게 “삼십년 후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사회주의? 자본주의? 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라고 묻는 장면도 기억에 남았다.1) 그로부터 삼십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들을 통틀어 가히 ‘넘사벽’인 자살률이 웅변한다. 20006·15남북공동선언의 감격조차 먼 옛일 같고, 이명박정부를 거치며 876월항쟁이 일궈낸 숱한 과실들도 거덜나다시피 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박근혜정부의 국기문란/국정농단 사태는 87년체제도 사실상 임종에 돌입했음을 선고한바, 이 체제를 장사(葬事) 치르지 않고서는 남녘이든 북녘이든 ‘헬조선’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바로 이 시각에도, 참으로 눈물겹도록 일깨우는 중이다. 876월항쟁에 맞먹는 모종의 대전환이 아니고서는 한반도로 밀려드는 ‘먹구름’에 속수무책인 시국인 것이다.

그런데 시국 타령을 할수록 새삼 절실해지는 것은 큰 포부를 품고 문학의 역할과 의의를 생각하는 비평 연습이다. 문학이 여전히 한 나라의 문화 수준과 저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일종의 척도이고 작가는 현실의 위기를 앞장서서 경고하는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라는 말이 한낱 허언이 아니라면, ‘문학을 문학으로’ 읽어내는 일도 엄중해질 뿐이다. 그건 87년체제의 극복을 확고하게 지향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 글은 김숨과 이인휘(仁徽)의 근작들을 읽으면서 ‘87년체제의 극복’을 하나의 화두로 굴려보려는 시도다. 개념상의 논의는 자제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씨름하며 문제의 뿌리를 탐지하는 두 작가의 분투에 집중할 생각이다.

 

 

2. 기록/증언, 작품, 『L의 운동화』

 

필자는 한강(韓江)과 공선옥(孔善玉)의 근작을 논하는 자리에서 “참혹한 사건의 진상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기억하는또한 그런 밝힘과 기억의 자리에 시민들을 불러 모으는글쓰기가 ‘작품’이 되는 데는 각별한 기술이 요구된다”고 쓴 바 있다.2) 작품에 홑따옴표를 붙인 건 소설이나 시 같은 특정 장르의 문예 텍스트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하기 위해서였다. “각별한 기술”이라는 것도 기술자의 솜씨 같은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이때의 기술이 작가의 문제의식을 좀더 잘 담아낼 ‘그릇’을 조형하는 능력에 가깝다면, ‘작품’은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묻는 역사의식이 자유로운 글쓰기와 따로 노는 것을 경계·견제하기 위한 방편적 개념인 셈이다. 2)

이런 전제하에 작단을 둘러본다면, 작년과 올해 세편의 장편소설을 잇달아 내놓은 김숨의 숨가쁜 작업은 기록/증언의 싸움과 작품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데 맞춤한 사례가 될 듯하다. 그의 최근 작업은 우리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역사적 상처를 실증적으로 소설화하는 데 집중되는데다가, 87년체제와 직접 연결해볼 수 있는 고리도 제공한다.

『바느질하는 여자』(문학과지성사 2015)의 경우 우리네 복식(服飾)문화와 관련된 지식을 가히 백과사전적으로 집성해 이야기로 만든 장편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한복과 바느질에 맞춰진 일종의 알레고리로 느껴질 정도다. 이한열(, 1966~87) 운동화의 복원 과정을 극미하게 파고든 『L의 운동화』(민음사 2016)와, 일제강점기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섭렵하고 316개의 각주를 달아 당대 여성들의 짐승만도 못했던 삶을 증언한 『한 명』(현대문학 2016)도 ‘있었던 사실’에 대한 집념이 유달리 강하다. 이 세 장편을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역시 쇄말(瑣末)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세/미세한 것에 대한 거의 집착적인 나열과 묘사다. 최근 김숨 소설의 이같은 ‘경향’은 가령 조선소 노동자들의 현실에서 시공간의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개인의 개별성도 폭력과 착취의 악순환이라는 맷돌로 갈아 연기처럼 날려버린 『철』(문학과지성사 2008)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삶의 한 단면에 (극)사실적으로 몰두하는 자연주의문학이 개체성/개별성이 소거되고 인간세계의 관념에 경도된 모더니즘의 어떤 면모와 맞닿는 역설을 연상케 하는 대조라 할 만하다.

본격적인 고찰을 시도할 계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장편 규모로 본다면 아직 김숨은 양극단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점을내지는 제대로 된 ‘파격’을얻지는 못한 듯하다. 다만, 그의 최근 장편들이 ‘지금 현재’를 만든 ‘과거의 현재성’에 관한 경외와 치열한 탐구가 없이는 문학이라는 것도 허사에 불과함을 새로이 성찰하게 하는 면모는 짚어볼 만하다.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