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19세기말 유럽과 나

변화, 지속 그리고 반복

 

육영수 陸榮洙

중앙대 사학과 교수.

* 이 글은 1999년 12월 ‘문화사학회’에서 발표한 초고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토론에 참가해 비판과 제안을 아끼지 않았던 회원들에게 감사한다. 또 수정된 원고를 읽고 흥미로운 지적들을 해준 중앙대의 고부응·김누리·장영준 교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1. 시간의 역사

 

봄이 오고 있다. 작년에 왔던 봄이 아니라 새 천년, 새로운 세기의 첫 봄이 오는 것이다. 지난해, 그러니까 20세기 마지막 해의 끄트머리를 장식하던 흥분과 불안감은 태평양 피지섬에서 서울 광화문까지의 함성과 불꽃놀이와 함께 스러졌다. 세번째의 밀레니엄과 21세기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는지를 둘러싸고 역사가들이 신문과 권위있는 학회지 등에서 펼친 논쟁1도 이제는 과거지사가 되었다. 여하튼 서양의 기독교 중심적인 시간관념에서 파생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간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간의 변화에 대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사람들은 언제부터 세대·희년(禧年)·세기·밀레니엄 같은 용어를 차용하며 시간의 흐름을 분절적으로 파악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시간을 정확히 측정·예측·엄수하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매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부터의 일이다.

오늘날 동서양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양력의 기준이 된 그레고리 책력이 유럽에 도입된 것은 1582년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제도적인 도입과 그것이 보통사람들 사이에 파급되어 시간관념의 기준으로 정착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교황과 가톨릭의 권위에 반발한 신교도들은 200년 후에야 그레고리 책력을 수용했다. 영국은 왕의 재위년도를 공문서에 기록하던 오랜 관습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1752년에 이르러서야 그레고리 책력을 채택했다. 프랑스인들은 18세기 중반까지도 본인의 정확한 나이를 계산하지 못하고 대충 열살 단위로 추정했다.2 유럽인들은 18세기 중엽 이후에야 일직선상의 세속적인 진보를 역설하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시간의 흐름을 실질적인 문명의 변화와 연관시켜 사고하는 습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적 흐름을 100년 단위로 끊어 인식하는 경향 역시 최근의 산물이다. 이전까지는 막연한 시간의 단위로 사용되던 ‘세기’라는 용어의 역사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말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있던 『메르뀌르 갈랑』(Mercure Galant)지는 1699년 12월초에 처음으로 ‘다음 세기는 1700년에 시작되는가 아니면 1701년에 시작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뜨거운 지상논쟁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에게 점차 널리 인식되기 시작한 ‘세기’는 1789년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표준적인 시간측정의 도구로 정착되었다. 시간을 10진법 기준으로 계산하던 혁명책력의 영향을 받고3 기억하기 쉬운 단위를 선호하는 보통사람들의 기호에 부응해 세기가 시간의 새로운 주연으로 부각된 것이다. 또한 우연히도 미국독립 100주년(1876)과 프랑스혁명 100주년(1889) 같은 기념행사가 19세기에 집중되어 거행됨에 따라 세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퍼졌다. 19세기 중반 이후 활발했던 시계의 보급도 시간관념의 변화를 촉진했다.4 그 연장선상에서 19세기말 유럽을 특정적으로 지칭하는 고유명사인 ‘세기말’이란 단어도 탄생했다. 굳이 족보를 따져 말하자면, 요즘 우리들의 요란스런 시간관념은 기껏해야 한 세기밖에 나이를 먹지 않은 현대적인 산물인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 적용하려는 시간개념은 ‘역사적 시간’이다. ‘역사적 시간’이란 어렵고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같은 사건이나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발생한 공간과 시간에 따라,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에 따라 그 역사적 의의가 다르다는 인식이다.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셀 수 없는 과거의 편린들을 오늘 나의 관점으로 선택·여과·해석하는 작업이다. 홍수처럼 넘치는 과거의 바다에 어떤 크기의 그물을 던져 어떤 모양의 과거를 잡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에꼬(U. Echo)의 예언처럼, 개인이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 과거사건을 읽고 세계를 해석하는 ‘각자의 역사’ 시대가 21세기에는 정말 도래할지도 모른다.5

이 글은 19세기말 유럽·유럽인들이 겪었던 특이한 경험들이 21세기를 맞은 한국·한국인들이 반추해볼 만한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낯선 시간을 살았던 낯선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봄으로써 오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의 뿌리와 그 해결의 갈래를 가늠해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은 세기말 유럽의 본질이 새로운 미학적·예술적 운동(가)의 출현에 있다고 보는 기존의 연구경향6을 따르는 대신, 세기말을 세기말답게 만든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는다. 이런 의도로 이 글에서 묘사된 유럽은 당시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풍경화가 아니라 내 멋대로 재구성해본 ‘또 하나의 유럽’에 불과하다. 죽은 과거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역사가의 작업이 때로 즐거울 수도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 입맛대로’(à la carte) 과거를 요리하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이다.

 

 

2. 19세기말 유럽의 이중변주곡

 

세기말 유럽인들은 어떤 환경과 질서 속에서 살았을까? 그때 그곳에서는 우리가 기억할 만한 무슨 특별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런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19세기 후반 영국·프랑스·독일제국의 기본적인 정치·사회·경제적 구조와 성격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국의 세기말은 자유주의 위기의 시기(1875〜1914)이며 동시에 통치자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의 이름에서 비롯된 빅토리아 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일찍이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경험하고 맬서스·벤섬·밀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치사상가들을 배출한 영국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본고장이었다. 특히 19세기는 중산층에서 출발하여 노동자계층까지 참정권을 확장시킨 세 차례의 선거법개정(1832·1867·1884)을 위시하여,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는 곡물법의 폐지(1846), 사상과 지식의 자유로운 전파를 억제하던 인지세의 폐지(1855〜61), 노조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조합법 제정(1871)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꼬리를 문 자유주의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875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고비로 자유경쟁에 입각한 신념이 흔들렸고,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영국의 막강했던 자신감도 후발주자인 독일·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세기말의 프랑스는 정치적 불안감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빠리꼬뮨’이라는 피비린내나는 내란을 진압하고 힘겹게 탄생한 제3공화국 정부는 좌우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했다. 1888년 국방장관에 임명된 불랑제(G. Boulanger) 장군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군의 개혁정책으로 얻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정부에 도전했다. 쿠데타음모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쏠렸던 국민의 지지와 기대감은 허약한 공화주의와 의회주의에 대한 반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몇년 뒤 파나마운하 건설회사가 정부의 고위관료들에게 재정적 원조를 요청하며 뇌물을 제공한 파나마운하사건(1892)이 터지자 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한층 심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태인 출신 드레퓌스(A. Dreyfus) 대위의 간첩행위 여부를 둘러싼 이른바 드레퓌스사건7이 1895년에 폭로되자 프랑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졌다. 1894〜1906년에 10명의 수상과 12명의 국방장관이 교체될 정도로 세기말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의 절정기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세기말이 정치·경제적으로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면, 이 시기의 독일제국은 겉으로는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지하듯이, 프로이쎈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 Bismarck)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여러 독일의 영방들을 통일하여 카이저를 수반으로 하는 독일제국을 1871년에 출범시켰다.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로 이웃나라를 위협할 정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독일제국은 빌헬름 2세의 친정체제가 출범한 1888년 이후 세기말적인 정치불안과 군사적 위협에 시달린다. 통일이 안겨준 잠시 동안의 도취에서 깨어난 국민들은 제국의 통치구조와 사회적 질서가 너무나 권위주의적이며 임시방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세기말 유럽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부활의 시기였다. 1880년대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1900년까지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올랐고 (…) 서구의 당대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운동”이 되었다.8 신대륙과의 노예·설탕·커피 무역을 중심으로 한 17〜18세기의 ‘비공식 제국주의

  1. 차하순, 「21세기는 어느 해에 시작하는가」, 『역사학보』 161(1999); 주명철, 「새천년준비위원장께」, 『교수신문』 1999.12.27.
  2. E. Weber, Apocalypses: Prophesies, Cults, and Millennial Beliefs through the Ages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99), 12〜13면
  3. 1793년 혁명정부는 반기독교운동의 일환으로 1주일을 7일이 아닌 10일로 하는 혁명책력을 발표했다. 혁명책력에서 세기적 산술법의 역사적 기원을 찾는 프랑스 역사가는 Daniel Milo이다.
  4. 같은 책, 14〜16면.
  5.  움베르또 에꼬 외, 문지영·박채환 옮김, 『시간의 종말: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네 가지 논의』(끌리오 1999), 248면.
  6. 예를 들면, M. Berma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New York: Penguin Books 1982); R. Shattuck, The Banquet Years: The Origins of the Avant-Garde in France, 1885 to World War I (New York: Vintage Books 1955) 등을 보라. 주로 예술가들이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미 지성사의 고전이 된 C.E. Schorske의 Fin-de-Siècle Vienna (New York: Vintage Books 1980)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7. 이에 대해서는 니꼴라스 할라즈, 황의방 옮김,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과 에밀 졸라』(한길사 1998) 참조
  8. E.J. Hobsbawm, The Age of Empire, 1875〜191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87), 60면. 제국주의의 어원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통치권(imperium)을 행사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1883년에 사망한 맑스의 저작에서는 이 용어가 등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