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2천년 벽두의 새 물결

 

 

지난해 11월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 열렸던 미국의 씨애틀을 ‘잠 못 이루는 밤’으로 만들었던 비정부기구(NGO)운동이 올 벽두에는 세계경제포럼(WEF)이 개최된 스위스의 다보스를 강타했다. 보도에 의하면, 1월 29일 스키복 차림으로 모여든 1500명의 시위대가 중심가에서 군경과 충돌하면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급진적 민중운동의 퇴장과 온건한 시민운동의 대두에 축배를 들었던 신자유주의자들을 머쓱케 한 일련의 사태는 급기야 한국에서 더욱 폭발력을 보이고 있다. 정치기득권을 지키는 데에는 여야가 기막힌 공조를 보인 선거법협상의 우스꽝스런 타결로 인해 ‘2000년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낙후한 정치에 대한 누적된 불만을 먹이로 맹렬하게 발화(發火)함으로써 2000년 벽두의 한국사회는 요란한 활기로 싱싱하다. 오랫동안 변혁운동의 가능성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아온 한국의 운동력이 나라 안팎의 상황변화 속에서 거의 소진된 것이 아닌가 싶더니, 순식간에 6·10항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운동의 복원력을 보여준다. 참으로 대단한 국민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바는 n세대의 정치적 각성이다. 고도성장이 초래한 생활세계의 큰 변화 속에 성장한 이 세대는 보수/진보, 두 진영이 각축을 벌였던 광장으로부터 썰물처럼 빠져나가 기성의 영역 바깥에서 뿔뿔이 자유로웠다. 그런데 인터넷 속으로 즐거이 흩어졌던 n세대가 인터넷을 타고 속속 합류하고 있다. 운동에 닥친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할 경진년(庚辰年)의 길조가 아닐 수 없는데,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다. 김종필씨가 공천부적격자 명단에 포함된 것이 충청과 보수 결집의 구실로 악용됨으로써 낙천·낙선운동이 오히려 분할적 지역구도와 수준 낮은 이데올로기정치의 재현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보듯이, 운동의 대의에 대한 공감과 실제 투표행위 사이의 괴리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들이 더욱 신중하게 천착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부문운동으로 갈라졌던 시민단체들의 광범한 연대가 전국적으로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싯점에서 단기적 목표의 성취 이후에도 모처럼만의 결합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운동론의 모색 또한 필수적이다. 예전식으로 이견을 배제하는 전제적 통일이 아니라 이견은 이견대로 남겨둔 채 공동의 부분을 확장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에 입각한 유연한 협동, 생동하는 합작을 추구하는 지혜의 훈련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협동적 연대를 착실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향도할 ‘큰 이야기’의 구상과 토론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마침 북미관계와 북일관계에 새 돌파구가 열림으로써 남북관계에 봄바람이 예상된다는 싯점도 절묘하다. 북한과 미국이 1월 28일 관계개선을 위한 양국간 고위급회담을 2월이나 3월중 워싱턴에서 열기로 합의하면서, 일본 또한 오래 중단되었던 국교정상화회담을 4월에 재개하기로 하였고, 김대중 대통령도 새해 들어 남북관계의 전향적 변화를 시사한 바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에 미묘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는 점에서도 새해 벽두에 출현한 낙천·낙선운동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고 과거의 민중운동식 ‘큰 이야기’로 단순 복귀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작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큰 이야기’의 모색, 요컨대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할을 넘어서서 더 큰 결합을 이끌 새로운 담론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2천년 벽두의 새 물결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 이번호에서는 현안의 운동을 점검하는 긴급진단 ‘낙천·낙선운동, 유권자혁명의 향방’과, 좀더 근본적인 전망 아래 새 담론을 모색하는 특집 ‘21세기 한반도와 새로운 공동체’를 마련하였다. 긴급진단에는, 현장에 밀착하여 운동의 경위를 개괄하면서 그 미래까지 전망한 조희연 교수와, 각각 여성과 지방의 관점에서 그 운동의 과제를 예리하게 점검한 정현백·송기숙 교수가 참여했다. 급박한 원고청탁에 기꺼이 응해주신 세 분께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특집은 창비 ‘21세기 기획’의 일환이다. 이번호에서는 21세기 한반도 안팎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측량하면서 우리가 추구할 공동체의 준거들을 새로이 점검하였다. 20세기 한국의 운동에서 그 열정의 절대적 근원의 하나였던 국민국가에 대한 충성이 약화되고 있는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면서, 그럼에도 손쉬운 해체론으로 떨어지지 않는 균형 속에서 동아시아와 관련하여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가능성을 묻는 박명규 교수와, 지역주의의 흥미로운 실험장 유럽을 점검한 이호영씨,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축으로 비정부기구운동의 과제를 이론적으로 분석한 조효제 교수,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공동체로부터의 탈구(脫臼)가 문제로 되는 현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해명한 박영도씨, 그리고 가상공간의 도래가 자리잡아가는 한국의 현실에서 가상공동체의 양면성을 점검한 김도현 교수가 참가한 특집은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운동의 새로운 조정이 요구되는 요즘, 때를 맞춘 중요한 토론거리를 제공해준다. 특집의 형식을 약간 바꿨다. 좀 긴 기조논문과, 각 쟁점들을 예각적으로 점검한 짧은 꼭지들을 배치하여 특집을 감량하였다. 내용의 경량화는 물론 아니다. 중후한 바탕은 배면에 깔고 문제의 본질로 직핍하는 잡지의 기동성을 더욱 살리자는 취지다. 독자를 더욱 의식하는 필자들의 글쓰기 훈련을 통해 독자들의 접근성을 좀더 용이하게 함으로써 소통을 원활히 하고자 할 따름이다. 독자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면 앞으로 이런 식으로 특집을 구성할 것인데, 아울러 최근 편집진 전용의 인터넷 그물망을 개설하여 원고들의 검토와 토론이 전방위적으로 강화됨으로써 이런 쇄신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명기하고 싶다.

백낙청 교수를 비롯해 황광수·임홍배·유희석 씨가 참여한 평단도 특집과 흥미롭게 호응한다. 오랜만에 문학평론을 선보인 백교수의 단상은 논쟁적이다. 90년대 문학의 해체적 징후의 양면성을 분별하면서 민족문학론·리얼리즘론·민중문학론 등의 쟁점을 재검토함으로써 80년대와는 다른 차원에서 문학운동의 새로운 복원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중요한 소설집을 대상으로 창작의 현장을 내재적으로 실사한 황광수씨,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파우스트』 2부의 현대성을 새로운 독법으로 분석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긴장에 처한 우리 문학의 현실을 간접 조명한 임홍배 교수, 말썽 많은 30년대의 모더니스트 이상(李箱)에 정공법으로 접근함으로써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우회적으로 참여한 유희석씨, 여기에 이희중 교수의 시집 서평이 어울려 판단의 고비에 놓인 한국문학의 현실을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점검할 귀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풍부한 학구를 바탕으로 우리 문자생활의 과거와 현재를 개관함으로써 뜨거운 쟁점의 하나인 어문논쟁을 새로이 조명한 임형택 교수와, ‘오늘 그리고 이곳’의 관점에서 지난 세기말 유럽사회의 속내를 흥미진진하게 드러낸 육영수 교수가 참가한 논단 또한 지극히 암시적이다.

봄호에서 우리는 시단에 정성을 쏟았다. 자문을 거쳐 20인의 신예시인을 엄선, 각자의 개성을 뽐낼 작품들을 가려 두 세기의 갈림길에 선 한국시의 현재를 점칠 시의 향연을 마련하였다. 최근 한국시단 전반의 침체를 넘어설 단초가 된다면 더없는 보람이다. 작단은 정도상·은희경·김윤영씨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수준의 리얼리티를 포획하는 데 성공한 정도상씨의 신작은 80년대 민중문학의 뜻깊은 복귀로 경하할 일이고, 외국여행의 와중에서도 뛰어난 단편을 완성한 은희경씨도 고맙고,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이후 새 작품을 내놓은 김윤영씨의 각고도 기억하고 싶다.

지난호에 이어 현장통신은 교육문제를 다뤘다. 이번에는 각도를 바꿔 학부모 박유희·배숙자·신연숙, 세 분을 모셨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우리 교육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학교붕괴현상을 처음으로 보고함으로써 작지 않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이 난에 대한 주목은 봄호에도 여전하리라고 믿는다. 이밖에 『주역(周易)』을 이해하는 데 훌륭하게 기여한, 서평의 모범을 보인 이강수 교수, 독자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촌평의 필자들, 이번호에 참여한 모든 필자들께 감사드리고, 지면을 새로 할애해야 할 긴급상황 때문에 부득이, 분량상 다음호로 이월된 필자들께는 죄송할 따름이다.

 

공지사항. 그동안 노고가 컸던 고형렬씨가 편집위원을 면했다. 출판사의 문학부문 강화에 전념할 것이다. 염종선씨 대신에 장철문씨가 잡지팀에 합류했다. 퇴임자의 수고를 치하하며, 신입자를 환영한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한말씀 드리고 싶다. 독자배가운동에 대한 뜻깊은 호응으로 정기독자가 드디어 7천명을 돌파하였다. 전철에서 『창비』를 숙독하는 독자를 만난 감동을 상기하면서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독자들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대책을 다양하게 강구중인데, 독자들께서도 쌍방향성의 구축을 위해 『창비』에 한걸음 더 개입하시기 바란다. 우선 홈페이지(www.changbi.com)를 방문하셔서 즐거운 나눔을 누리시기를 기대하며, 그 연장에서 ‘독자의 편지’란이 활성화되었으면 한다. 그 어떤 잡지보다도 수준 높은 독자들을 많이 모시고 있는 점은 자타가 공인하는 터인데, 독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잡지의 쇄신을 도모할 가장 귀중한 잣대가 아닐 수 없다. 최근의 경향을 관찰컨대 앞으로 한국에서도 수준있는 계간지는 외국처럼 정기구독 의존도가 더 강화될 것인데, 독자배가운동에 대해서도 창비와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독자 여러분의 더 적극적인 권유와 참여가 있기를 간곡히 호소하는 바이다.

崔元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