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20세기 동아시아의 ‘국학’

동아시아적 시야를 열기 위한 반성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사의 시각』 『실사구시의 한국학』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등이 있음. htlim@yulim.skku.ac.kr

*이 글은 “‘National Studies’ in 20th Century East Asia: Reflections for an East Asian Perspective”(Sungkyu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vol. 4, No. 1, 2004)의 국문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글은 지난 세기 ‘국학(國學)’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조명하여, ‘오늘 우리의 학문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더불어 사고하고 토론하는 재료를 제공해보자는 취지에서 작성한 것이다.

지난 세기는 벌써 흘러간 물이 되었지만 그 시대의 부채는 한국인의 삶의 저변을 억누르고 있다. 그 상반기에 통과한 식민지적 질곡 때문에 여태껏 ‘정신적 포로’처럼 반응하는가 하면, 하반기의 분단상태는 ‘현실적 족쇄’로서 엄연히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국학은 식민지시기의 산물로서 분단시대에 와서 폐기처분을 당했던 터임에도 망령처럼 한국인의 뇌리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근래 ‘세계화’의 대세에 쫓기는 심경에서 ‘한국학’이란 이름으로 국학은 부활하는 것도 같다.

우리의 눈을 이웃나라로 돌려보면 국학이란 학술현상은 일국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일본의 경우 17세기로부터 유래했던 터이고, 중국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서 국학운동이 한국에 앞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본고에서 국학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조명하려는 역사적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20세기적 ‘근대’의 극복, 그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문제는 당면한 과제로 생각하는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는 20세기 국학을 냉철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먼저 들어가는 말로 쳰 무(錢穆,1895〜1990)란 중국 현대 학자가 자기의 저서 『국학개론(國學槪論)』의 머리에 얹은 글의 첫 대목을 옮겨보겠다.

 

학술은 원래 국경이 있을 수 없다.‘국학’이란 개념은 과거에 전승한 바 없으며 장래에도 또한 존립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단지 한 시대의 명사일 뿐이다.(「弁言」,1933)

 

‘국학’이란 “한 시대의 명사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진리의 보편성에 비추어 국학의 본질적 의미를 부인한 위의 논법은 십분 타당하다. 하지만 쳰 무의 발언은 원론적 차원에 불과하며, 그 스스로 심혈을 기울여서 『국학개론』이란 저서를 쓴 것이다. 한시적 존재로 규정된 국학, 이 국학을 요청한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였을까?

국학이란 명사는 지난 20세기 중국 학술사의 무대에 등장하는데, 국학운동이 곧 중국 근대학문의 성립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역시 (물론 구체적인 경위는 꼭 같지 않지만)‘조선학’ 혹은 ‘국학’이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학문의 길을 개척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은 근대학문의 징표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근대의 기본과제가 ‘민족주권’에 있으므로 자국의 정체성을 의도하는 학문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응당 필요하지만, 진리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작업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하필 국학이란 명사로 근대학문을 일으킨 저 시대배경은 문제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에서 국학은 첫머리에 언급했듯 이미 17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면 뚜렷하게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는데,20세기에 와서는 도리어 이 개념이 폐기되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실로 적잖은 의문점이다.

이 글에서 나는 20세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각기 존립한 국학, 특히 국학운동의 의미에 관심을 두어 전체적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

물론, 사안 자체가 워낙 방만한데다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필자의 지식이 별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본고는, 한국에 관해선 필자가 이미 다룬 터이기에 논의를 간략히 하고 잘 모르는 중국·일본 쪽에 비중을 두었다. 잘 모르므로 공부삼아 해보자고 나선 셈인데 나름으로 뜻이 있다.오늘 우리가 학문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학문의 틀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관건은, 지난 20세기 국학의 일국적 한계를 넘어서서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혀나가는 데 있다고 믿는다.

지금 동아시아 담론이 무성하고 있다. 동아시아를 어떤 하나의 통일적 공간으로 관심하게 된 것이다. 이제 현재의 과거로 눈을 돌려 동아시아의 ‘역사적 공통성’을 인지할 필요가 생겼다. 우리가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다고 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본고에서 필자는 역사적 공통성에 유의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닌 사회·문화의 ‘상동성’ 및 상동성 가운데 차이점(=상이점)을 분석의 착목처로 제기하고자 한다.

 

 

2

 

중국 근대의 학술운동사에서 『고사변(古史辨)』의 편찬으로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꾸 졔깡(顧頡剛,1893〜1980)은 중국 근대학문의 성립과정상에 두 표점(標點)을 잡고 있다.

 

국고(國故)를 정리하자는 외침은 타이옌(太炎, 章炳麟, 1869〜1936) 선생이 선창을 했는데, 궤도상에서의 진행은 스즈(適之, 胡適, 1891〜1962) 선생의 구체적 계획에 의해 발동이 된 것이다.(『古史辨』 제1권 自序, 1926)

 

즉 ‘국고의 정리’,국학은 처음 쟝 삥린(章炳麟)이 시동을 걸었고 다음 후 스(胡適)에 의해 본궤도로 진입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학술사의 인식구도는 정론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보인다.『중국소설서사학(中國小說敍事學)』이란 책으로 한국 학계에 알려진 쳔 핑위안(陳平原)이란 학자가 최근에 『중국현대학술의 건립(中國現代學術之建立)』이란 좋은 저서를 내놓았는데, 이 책에는 “쟝 타이옌(章太炎)·후 스즈(胡適之)로 중심을 삼아서”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다.‘국고’란 개념은 현대 한국사람들의 귀에 생소하게 들릴 듯한데 이해를 돕기 위해 후 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국학이란 우리들의 안목에 있어서는 ‘국고학(國故學)’의 줄임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거 중국의 일체 문화·역사가 모두 우리의 ‘국고’요, 이 과거의 일체 문화·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 곧 ‘국고학’이니 줄여서 ‘국학’이라 일컫는 것이다.(「國學季刊宣言」,1923)

 

후 스에 따르면 ‘국고’는 과거 자국의 일체 문화·역사를 뜻하는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켜 ‘국고학’, 줄여서 ‘국학’이라 한다는 논지이다. 후 스의 이 개념정의를 우리가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지, 특히 국학이 포괄하는 시대범위를 과거사에 국한할 것인지 문제가 아무래도 간단치 않다. 그렇긴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일반화된 통념이고, 한국에서도 역시 크게 빗나가지 않는 개념범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중국의 국학운동을 선도한 쟝 삥린의 발언을 들어보자.

 

무릇 국학이란 국가가 성립하는 바 원천이다. 내 듣건대 경쟁시대에 처해서 국학에 의존하는 것만 가지고 국가가 자립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지만국학이 발흥하지 않고 국가가 자립하는 경우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또 국가가 망하고 국학이 망하지 않는 경우도 나는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국학을 흥기(興起)시키는 자 아무도 없다면 그 영향은 곧 국가의 존망에 미칠 터이다. 이 또한 전대에 견주어 더욱더 위태롭지 않은가.(『民報』 제7호,「國學講習會序」,1908)

 

이 글이 씌어질 당시인 20세기 초, 청말(淸末)의 시대정황을 간략히나마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쟝 삥린은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쑨 원(孫文,1866〜1925)과 정치노선을 함께한 인물이다. 청조체제의 보전을 주장한 캉 여우웨이(康有爲,1858〜1927), 량 치챠오(梁啓超,1873〜1929)와는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입장이 아주 달랐던 것이다. 쟝 삥린은 캉 여우웨이의 정치노선을 반박하고 민족혁명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고,1906년 출옥하여 일본으로 망명을 한다. 망명지 일본에서 쑨 원과 함께 흥중회(興中會)를 결성, 그 기관지로 『민보(民報)』를 발간했다.『민보』에 실린 윗글에서 천명한 ‘국학강습회(國學講習會)’는 민족혁명을 고취하기 위한 학술운동이었던 것이다.“혁명은 강학을 잊어선 안되고 강학은 혁명을 잊어선 안된다(革命不忘講學講學不忘革命)”는 주장이 그의 지론이었으니, 혁명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는 강학이 스스로 국학적 성격을 띠게 됨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위 인용문의 논지를 요약하면 국학은 국가성립의 원천으로, 국가존망에 직접적 관계가 되는 것으로서 중요시된 것이다. 근대학문이라면 출발단계에서부터 민족주의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진리의 보편성과 방법론의 과학성을 기본성격으로 하고 있었다. 근대학문을 ‘국학’으로 표방한 거기에 중국적 특수성이 있다고 하겠다. 다름아닌, 국민국가의 수립 초두에서 당면한 민족현실이었다.

20세기 벽두 중국에서는 ‘제구포신(除舊布新)’으로 표상되는 전면적 변혁과 전환이 과제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과분(瓜分,분할점거를 뜻하는 중국 근대사의 용어)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해 청조 당국은 나름으로 대응하긴 했지만, 부패와 문란으로 실정을 거듭한 나머지 위기는 더 큰 위기를 불러들여 날로 더욱 침중해갔다. 만족(滿族) 지배의 청조체제에서 벗어나는 민족혁명이 무엇보다도 긴급한 과제로 요망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의 급진개혁파에 있어서 ‘혁명’이란 말은 곧 청조체제의 전복을 뜻하였다.[1. 쟝 삥린은 “동족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혁명’, 이민족에 의해 탈취당하는 것을 ‘멸망’이라 하며, 동족에 의한 체제의 바뀌어짐을 ‘혁명’, 이민족을 몰아내는 것을 ‘광복’이라 이른다”고 전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