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영문과 교수. 최근 『21세기문학』(1999년 겨울호)에 대담 「시대적 전환을 앞둔 한국문학의 문제들」을 발표.

 

 

 

2000이란 숫자가 묘해서 ‘2000년대’라고 하면 여러 규모의 시간대가 떠오른다. ‘새로운 천년’이라는,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희대의 선지자가 아니고는 예측 못할 시기가 있는가 하면, ‘21세기’라는 훨씬 짧은 기간도 있다. 훨씬 짧다고는 해도 역시 남다른 경륜과 선견지명을 가진 이나 그려볼 수 있는 기간이며, 그나마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한 세기를 다시 십등분한 10년의 세월, 언젠가는 ‘공공년대’라고 불리게 될지도 모를 2000년대 첫 십년을 염두에 두고 몇가지 토막생각을 개진할까 한다.

10년 단위의 미래만 해도, 변화의 속도가 지난 10년보다 더욱 빠르리라는 것말고는 확실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 드물다. 희망 섞인 판단으로는 이 기간에 한반도 분단체제극복 과정은 어떤 결정적인 고비를 넘기면서 일단의 성사를 볼 듯도 한데, 10년 이상을 미리 내다보는 일이 위태로운 것도 바로 이 결정적인 단계의 성사 여부와 그 구체적인 양상에 따라 추후의 사태가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논리로, ‘21세기’ 전체를 들먹이는 일이 허황되기 십상인 것은 단순히 백년의 물리적 길이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기 들어 여러 십년이 가기 전에 아마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결정적인 변혁을 겪으리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 실상을 지켜보기 전에 다음 일을 예견하기가 지난한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올 10년을 두고, 문학 분야에 한정해서조차 무슨 예언을 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다소나마 도움이 될 생각들을 정리해보는 정도인데, 지난 10년의 한국문학을 되새기는 작업부터가 나로서는 준비가 태부족인 과제임을 미리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정한 평가를 저해하는 것들

 

개인의 역량이나 정직성 문제를 떠나, 한 시대의 문학에 대한 공정ㆍ원만한 평가를 저해하는 요인들은 어떤 것일까. 우리 문학의 경우에는 일단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문학관(또는 시국관)을 기준으로 문인들을 ‘진영’으로 가르면서 작품에 대해서도 편파적 판정에 흐르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십년대가 바뀔 때마다 거대언론매체와 일부 작가ㆍ평론가들이 들고나오는 세대론이다.

나 자신은 ‘등단’의 시기조차 불명확한데다 그 무렵 신세대로 각광받던 ‘4ㆍ19세대’에 정확히 속하는 나이도 아니어서, ‘60년대 문학’ 논의 때부터 그런 식의 세대론에는 큰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70,80,90년대를 지나면서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영’ 개념에 대해서도, 민족민주운동의 격전기에 뜻을 같이하고 행동을 함께하는 문학인들의 일정한 조직화와 연대의식은 지지했지만, 이러한 조직도 “좋은 작품과 덜 좋은 작품 또 아주 좋지 않은 작품을 가리는 데 있어서 공명정대한 문인들의 모임”이 될 것을 바로 격전이 한창이던 80년대 중반에 주문했었다(「민족문학과 민중문학」,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351면). 그러나 원칙의 천명과 구체적인 실행은 별개 문제다. 싸움이 격해지고 오래가다 보면 함께 싸우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의식이 작품에 대한 당연한 애정과 관심을 넘어 편파적 옹호로 이어지기 쉬우며, 더욱 중요한 것은—마음의 여유와 절대적 시간의 여유가 모두 부족한 가운데─싸움에 나서지 않는 작가들에 대한 무지나 편견을 낳게 마련인 것이다.

스스로 반성하건대, 『창작과비평』 25주년을 기념하는 토론장에서 발제를 맡은 나는 90년대 문학을 전망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때 거명한 작가들 가운데는 정작 90년대 들어 가장 주목받는 활약을 벌인 시인과 소설가들이─고은ㆍ신경림 같은 낯익은 이름을 빼고는─거의가 빠져 있었다(1991년 봄호의 ‘90년대 민족문학의 과제’ 발제 및 토론 참조). 80년대에 이미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에 대해서도 아예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한 예가 많았던 것이다.

개인의 역량부족은 근절이 불가능한 항구적 숙제지만 적어도 ‘진영’ 개념의 질곡만은 벗어던질 필요가 절실했다. 이 작업을 내 나름으로 시도한 것이 「지구시대의 민족문학」(『창작과비평』 1993년 가을)인데,1 여기서 나는 김기택의 시 및 신경숙의 소설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를 현기영ㆍ박노해ㆍ공선옥에 관한 논의와 아울러 진행했다. 그때만 해도 주변의 반응은 대체로 안 좋았다. 작품상의 성과를 인정하더라도 작품론을 자주 쓰지도 않는 사람이─사실 이 점은 90년대 내내 나를 짓누른 부담이었고 아직도 그렇다─굳이 ‘우리쪽’을 젖혀놓고 그들을 거론할 필요가 있느냐는 솔직한 섭섭함의 표시가 있는가 하면, 평가 자체도 과장되었다는 비판 또한 없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두 작가에 대한 평가와 기대가 많이 빗나간 것은 아니었지 싶다. 『태아의 잠』에 이어 『바늘 구멍 속의 폭풍』(1994)과 『사무원』(1999)을 낸 김기택은 80년대에 등단하여 90년대에 착실한 이바지를 해낸 시인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며, 신경숙의 경우 장편 『외딴 방』(1995) 하나만으로도 90년대를 빛냈다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평자의 한정된 독서나 논술상의 불가피한 선택에 따른 본의아닌 불공정행위들이다. 몰라서 언급 못한 경우와 의도적인 묵살이 혼동되는 일은 어느 때나 있지만, 독서량이 부족한 평자에게는 특히나 짐이 되는 것이 그것이다. 93년 당시 아직 등단 안한 작가들이나 9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인간의 시간』(1996) 『길은 광야의 것이다』(1998) 두 시집으로 역시 90년대를 빛내준 백무산이 빠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정ㆍ원만한 평가라는 비평가의 본분에 멀리 미달했음이 사실이다. 그 점은 이런저런 자리를 통해 약간의 보완을 시도한 뒤인 지금도 크게 달라졌달 수 없다. 두고두고 갚는 데까지 갚아나갈, 세상에 대한 빚인 것이다.

아무튼 이제 진영 개념의 비평적 위력은 대세의 흐름에 의해 거의 소멸된 듯하다. ‘민족문학 진영’으로 명백히 분류 가능한 작가들의 작품에만 국한하다 보면, 그러잖아도 위기설에 휘말린 민족문학의 빈곤을 스스로 부각시키는 결과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아니, 사단법인화(1996)로부터 최근의 새 집행부 구성에 이르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발전경로를 보더라도 지금은 이렇다할 진영 자체가 사라진 형국이다.

 

 

세대론과 문학운동론의 상호작용

 

진영 개념의 해소가 민족문학의 위기설까지 해소할 수 있을지는 따로 검토할 일이다. 우선은 공정한 문학적 평가를 저해하는 또하나의 요인으로, 새로운 연대마다 언론매체의 부추김을 받으며 등장하곤 했던 이런저런 신세대론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런 세대론은 상업주의적 매체의 위세에 비례해서 그 위력을 더해왔고, 90년대에는 그전 어느 때보다 맹위를 떨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연대의 구체적 양상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결코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진영론의 기반을 이루는 문학운동론─지난 한 세대 동안은 주로 민족문학운동론─과의 일정한 상호작용 속에 진행되었음이 드러난다.

앞서 ‘60년대 문학’론을 언급했으나 이는 지금 수준으로 보면 일시적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매스컴의 위력 자체가 비교적 한정된 시기인데다, 60년대 중엽에서야 시작된 그 논의가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70년대가 다가와버렸던 것이다. ‘60년대 문학’론자들은 삽시간에 구세대로 변해버리고, 언론에서는 황석영ㆍ최인호ㆍ조해일 등을 뒤섞어서 ‘70년대 작가’로 조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 경우는 시간이 부족했다거나 상업적 언론매체의 성장이 따라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식의 ‘70년대 작가’론을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가 되었는가?

해답의 큰 부분이 70년대초에 본격화된 민족문학론과 민족문학운동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담론과 운동을 통해 60년대와 70년대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가 어떤 ‘신세대적 감각’이 아니라 김지하의 「오적」(1970)과 황석영의 「객지」(1971)로 표상되는 새로운 문학정신의 대두이며, 그 뒷배를 이루는 앞시대의 주된 선배로서 68년과 69년에 각기 작고한 김수영과 신동엽의 우뚝한 자리가 매겨졌다. 동시에 이문구처럼 신세대 취급에서 제외됐던 소설가의 작업이 70년대 문학의 주류에 귀속될 수 있었다. 여기에 김정한의 문단복귀, 신경림의 재등장, 고은의 발전적 변모 등이 더하여 1970년대의 문학이 유신통치의 억압 아래서도 제법 화려하게 꽃피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1970년에 창간된 『문학과지성』의 경우, 민족문학론에는 동조한 바 없으나 일부 동인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과 잡지 및 출판을 통한 작품발굴로 중대한 기여를 했다. 다만 70년대를 ‘양대 계간지 시대’라는 식으로 정리하는 것은 편벽된 시각이며, 『한국문학』이나 월간 『대화』 등의 다양한 공헌을 감안하는 큰 그림 속에서 3개 계간지의 각기 다른 몫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80년대의 양상은 또 달랐다. 5ㆍ17내란과 광주학살의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감각 위주나 탈이념적인 세대론이 설 자리는 별로 없었다. 물론 그때도 연속 무크 『우리 세대의 문학』 같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언론의 주목을 계속 받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대론은 오히려 ‘민족문학 진영’ 내부에서 조직ㆍ이념상의 주도권을 노린 급진적 소장세대의 도전으로 거센 힘을 발휘했다. 이에 대한 거대매체들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는바, 한편으로는 그 또한 잡식성의 상업주의가 취급을 마다할 품목이 아니었지만, 다른 한편 언론사 자체로서는 대대적인 전파를 용인할 수 없는 논의였다. 그 결과 80년대의 세대론은 상업주의에 의한 활용이 없지는 않았으나, 상업주의의 전면화를 견제하면서 민족문학 담론의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동시에 편협한 ‘진영’ 담론의 형성에도 일조했으며, 줄곧 ‘소시민적 민족문학론’으로 공격받은 좀더 유연한 민족문학론으로서는 자기쇄신을 위한 값진 자극도 얻었지만 몹시도 고달픈 연대가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민중적 민족문학’ ‘민주주

  1. 본고는 연구논문이 아닌 단상의 성격이고 자기 점검과 반성 및 해명의 뜻을 담은 글이니만큼 남의 노작에 대한 섭렵은 적고 자신의 졸고에 언급이 잦은 점을 양해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