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21세기에 던지는 김정한 문학의 의미

탄생 100주년을 맞은 요산의 문학

 

구모룡 具謨龍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저서로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시의 옹호』 등이 있음. gumo09@chol.com

 

 

탄생 100주년을 맞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1908~96)의 삶과 문학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동안 요산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 오롯한 정본 전집이 발간되지 못한 것처럼 메워야 할 공백들도 적지 않다. 특히 스스로 만든 절필과 복귀 담론은 요산 문학의 전체를 조감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요산의 글쓰기의 전모를 드러낼 전집에 대한 요구는 그의 생애를 재구성할 평전에 대한 기대와 함께한다. 다행히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그의 고향인 부산지역의 후배와 제자들이 정본 전집을 준비하는 한편, 그의 문학을 새롭게 읽으려는 노력들을 전개하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그동안 문학적 생애 구성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충하고 오늘의 맥락에서 요산문학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요산의 의도를 좇을 때 그의 문학적 생애에서 1940년 절필 이전과 1966년 문단 복귀 이후가 서로 분절되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자연히 일제말과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 자유당 독재와 4·19혁명 등 요산의 삶에서 중요한 시기들이 균형있게 설명되지 못한다. 실제 절필과 복귀는 작가가 스스로 정한 규정에 불과하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규정은 소설가라는 자의식의 산물로, 유의미한 작품활동을 강조하려는 의도와 결부된다. 하지만 작가의 절필-복귀 발언의 심층에 내재한 여러가지 심리적인 유인들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이를 단순한 참조사항 정도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산문학은 시대와 삶, 행동과 글쓰기를 전체적인 맥락으로 읽을 때 그 본령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동안 생애와 문학을 행동과 글쓰기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와 문학을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기보다 제한적인 관점으로 읽어온 경향이 더 많았다. 요산에게 행동과 글쓰기는 상관적이다. 행동이 먼저일 때 글쓰기는 그 뒤를 잇고 글쓰기로써 행동을 대신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행동하는 지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미완의 유고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남긴 미완의 유고들1은 그에 대한 문학적 기대를 지닌 이들에게 아쉬움을 더한다. 특히 장편 부재를 요산문학의 한계로 지적한 이들에게 요산이 시도하다 만 여러 미완의 장편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실제 요산은 리얼리즘의 규범이나 완결된 소설미학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보다 그는 제국과 국가의 폭력에 신음하는 민중의 구체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려 했고 그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증명하려 했다.

 

 

1. 세계관 형성과 글쓰기

 

많은 문인들이 그러했듯 요산도 처음에 시를 썼고 여기에 인격형성기의 감상과 고뇌가 담겨 있다. 요산에게 시는 문사적 전통을 담지한 조선인으로서의 공통감각의 소산이다. 그는 생애 내내 자신의 글에서 한시를 예로 들거나 시조를 읊조리는 모습을 보였다. 특별히 시인이 되려 했다기보다 문인이 되려 한 것이다. 요산에게 근대적인 문학관습으로서의 장르는 자신을 구속하는 요인이 되지 못했다. 시를 쓰다 소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소설이라는 그릇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전모가 전해지지 않은 옥중시의 존재나 허다한 산문이 말해주듯 그에게 시쓰기, 소설쓰기, 산문쓰기는 모두 글쓰기라는 하나의 행위범주에 속한다. 그는 현실상황에 응전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장르라는 그릇을 빌려 썼다.

요산이 소설을 쓴 것은 와세다(早稻田)대학 유학시절이다. 당시 쓴 소설인 「구제사업(救濟事業)」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요산은 시를 쓰다 소설을 쓰게 되는 과정을 “우에노동물원에 갇혀 있는 조선학을 보고 꺼적거려 본 이런 비분강개조의 시조(「조선학」)를 『대조』에 발표한 뒤로는, 쓰는 걸 당분간 그만두었다. 몇군데의 문학단체에 이름을 걸어두었지만, 그 뒤 소설이라고는 「그물」(1932)이란 걸 국내 잡지에 발표했고, 「구제사업」이란 건 『집단』인가 『신계단』인가에 목차만 들어가고 원고는 압수되고 말았다”(「저항의 물결 속에서」)고 진술한 바 있다.2 “「그물」이란 걸 국내 잡지에 발표했고”라는 대목에 유의할 때 이 두편의 소설이 유학시절에 씌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요산은 유학시절 시쓰기에서 소설쓰기로 나아간다.

요산의 문학적 생애에서 와세다 유학시절은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요산의 주된 관심은 사회과학이었다. 와세다대학은 당시 오오야마 이꾸오(大山郁夫)를 비롯한 사회주의 지성계의 중심이었다. 요산이 공부단체인‘동지사(同志社)’에 신고송(申鼓頌), 이찬(李燦), 박석정(朴石丁) 등과 함께 이름을 내보인 것은 1931년 11월이다. 주지하듯이‘동지사’는 카프(KAPF) 토오꾜오지부 해체와 더불어 등장한‘무산자사(無産者社)’를 뒤이은 재일조선인 예술단체이다. 1931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관련하여 고경흠(高景欽) 등이 체포되면서 조직 와해의 위기에 처한‘무산자사’와 카프 맹원들이 결성한 것이다. 『무산자』는 카프 토오꾜오지부 기관지 『예술운동』을 이은 매체로, 김두용(金斗鎔), 임화(林和), 이북만(李北滿), 김남천(金南天), 이찬 등이 관여했다. 김남천, 임화, 안막(安漠)이 귀국한 것은 1930년 봄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막이나 이찬과 요산의 교분을 염두에 둔다면 요산이 카프 토오꾜오지부의 자장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30년에 집중적으로 해오던 시쓰기가 1931년 초에 이르러 뚝 그치게 되는 까닭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3 1932년 여름 귀국하기까지 2년여 동안 요산은‘무산자사’‘동지사’와 더불어 활동한 것이 분명하며, 이 시기 요산의 세계관도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물」은 소품이지만 요산의 세계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소

  1. 완결성을 지닌 「새양쥐」(1936)라는 단편을 비롯하여 미완의 장편 여럿이 요산문학관에 유고로 남겨져 있다.
  2. 현재 접할 수 있는 『집단』과 『신계단』의 목차 어디에도 「구제사업」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계단』 창간호가 나온 게 1932년 10월이고 이후 1933년 초까지 발간된 이 잡지에서 제목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투고된 잡지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1932년 1월의 『집단』 창간호가 아닌가 한다.
  3. 이순욱은 요산의 시 30편을 조사했다. 이 가운데 23편이 토오꾜오 유학시절에 쓴 것으로, 1929년 6편, 1930년 15편, 1931년 2편이다. 이순욱 「습작기 요산 김정한의 시 연구」, 경남·부산지역문학회 『지역문학연구』 제9호(2004), 46~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