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4·24교육투쟁과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폭력의 흔적과 연대의 기억

 

 

정영환 鄭榮桓

메이지가꾸인 대학 교양교육센터 교수. 저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등이 있음.

chong@gen.meijigakuin.ac.jp

 

 

1. 머리말 : 어떤 폭력의 흔적

 

“북한이라는 나라에 일본이 엄격한 자세를 취하고 필요한 외교 압력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교육을 둘러싼 문제를 그와 동일선상에서 파악해도 괜찮을까.” 2010년 2월 24일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사설에서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제도에서 배제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해 이렇게 이의를 표시했다. 이어서 조선학교는 한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 및 북한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재일조선인의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교육 내용은 많이 변했”으며, “북한의 체제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심정으로 아이를 보내는 가정도 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2010년 일본사회의 큰 쟁점이던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 적용을 두고 ‘적용론’의 입장에서 쓰였다. 당시 민주당정권이 시행한 고교무상화법은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학교도 무상화에 포함하는 것으로, 일본의 외국인학교 정책사상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1 그러나 이 법이 국회에 상정된 직후부터 야당인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 내 보수파도 조선학교를 포함하면 북한에 이익을 준다며 격렬하게 비판했다.

조선학교의 교육 내용이 지난 시기와 비교해서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고, 아이를 보내는 부모의 의식이 달라졌다는 지적도 사실이나 필자는 이 사설을 접하고 무척 의아했다. 무상화법은 교육의 내용을 불문하고 일정한 교육과정 조건을 충족하는 학교에 다니는, 외국인을 포함한 학생의 권리를 인정한 것인데 왜 이 사설은 ‘내용의 변화’를 거론하며 배제론을 반박할까. 법이 인정한 학생의 권리를 부정할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지가 문제인데, 왜 그와 무관한 ‘북한과의 관계’라는 배제론자가 만든 잣대를 적용론자마저 공유하는 것일까. 바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또한 재일조선인사 전공자로서 가장 큰 문제로 여겨진 점은 이 사설에 전후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지원을 받고 북한의 영향하에 있던 시기와 달리 최근 조선학교는 많이 변했다, 학생들도 축구나 럭비, 권투 대회에 나갈 정도다, 그러니 배제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식의 인식을 적용론자들마저 공유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변하기 전 전후 일본정부의 오래된 조선학교 정책은 타당하고 합리적이었다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의문의 핵심이다.

본고는 이런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70여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4·24교육투쟁’에 초점을 맞춰 전후 일본정부가 실시한 조선학교 배제정책의 역사적 기원을 찾아보려 한다. 조선학교가 고교무상화에서 배제된 것은 1990년대 이후 조일(북일) 간 긴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직접적으로는 2002년 일본인납치사건 폭로와 이후 이어진 핵과 미사일 실험으로 인한 일본사회의 대북인식 악화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배제정책은 전후 일본정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한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구조의 토대 위에서 시행되었다. 특히 패전 직후 연합국 점령기에 새로운 교육제도가 정비될 무렵 만들어진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4·24교육투쟁이란 무엇인가. 2차대전 이후에도 일본에 잔류하게 된 약 60만명의 조선인들은 각지에 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1948년 1월 24일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의 이름으로 ‘조선인 설립 학교 취급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통달을 발해 조선인은 일본 법령에 따라야 하며, 조선인 아동은 일본학교에 취학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 결과 같은해 3월 이후에 야마구찌(山口), 오까야마(岡山), 효오고(兵庫), 오오사까(大阪), 토오꾜오(東京) 등에서 지사에 의한 학교 폐쇄명령이 발령된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재일조선인 단체는 폐쇄명령 철회와 교육 자주성 승인을 요구하며 각지에서 투쟁을 전개했으나, 미군과 일본경찰의 강경한 탄압 앞에 학교 측은 대폭 주장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을 치안당국은 코오베(神戸)·오오사까 사건,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사에서는 4·24교육투쟁(한신〔阪神〕 교육투쟁)이라 부른다.

1948년에 발생한 이 일련의 사태는 전후 일본정부가 실시한 민족교육 단속의 첫걸음으로 한반도의 분단과 얽히면서 일어났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사건은 일본국헌법 공포나 교육기본법·학교교육법 공포, 점령정책의 역(易)코스 같은 일본현대사의 연표 속에서만 언급될 것이 아니라 제주 4·3사건이나 남북연석회의, 그리고 5·10단독선거와 같은 동시대 한국현대사의 사건들과 함께 기록될 필요가 있다.

1948년 4월 누군가는 코오베에서 경찰서 천장에 매달려 구타당했고, 누군가는 오오사까 공원에서 사살되었다. 왜 그들은 이러한 일을 당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동시대 일본이나 한반도 사람들은 이러한 폭력 행사를 어떻게 보았을까. 천황제국가의 해체와 재편 과정에서 재일조선인이 벌인 자주적인 민족교육운동에 대해 일본정부나 점령군은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했을까. 인간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발전시키려는 ‘교육’이라는 행위가 왜 이처럼 폭력적인 탄압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또한 이러한 폭력에 대항하는 움직임의 지역적 범위는 어떠했을까. 동시대 한반도 사람들은 해외 ‘동포’들의 고투를 어떻게 보았을까.

 

 

2. ‘4·24교육투쟁’이란 무엇인가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의 시작과 일본정부의 정책

조선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각지에 국어강습소를 설립했다. 1945년 10월 15일 창립된 재일본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은 이 학교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한다. 조련의 통계를 보면 이미 1946년 10월에 학교 수가 500곳을 상회했고 학생 수도 4만명이 넘었다.2 1955년 조총련 결성 이후 초급학교가 100곳을 넘은 적은 없고 학생 수도 최대 2만명이었음을 고려하면3 당시 학교와 학생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일본정부는 이 조선학교들에 대해 처음에는 방임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1948년 이후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1948년 1월 24일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은 각 도도부현(都道府県) 지사에게 「조선인 설립 학교 취급에 대하여」(이하 1·24통달)라는 통달을 발했다.4 1·24통달은 조선인 아동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시·정·촌(市町村)립이나 사립 소학교 또는 중학교에 취학시켜야 한다”고 한 후, 사립 초중학교 설립은 학교교육법에 따라 도도부현 지사의 인가를 얻어야 하며, 학령 아동의 교육에 대해 각종학교 설립은 인가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1·24통달의 배경에는 점령군의 의향이 있었다. 로버트 리케츠(Robert Ricketts)에 따르면, 미 제8군은 일찍이 조선학교에 주목해 연합국최고사령관(SCAP)민간정보교육국과 대응을 협의해왔다.5 1947년 4월에는 제8군 군정부가 각지의 군정팀에 조선학교를 일본의 교육법에 따라 문부성의 인가를 받게 하도록 명령했다. 오오사까의 군정팀은 조선인 학교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한다고 우려했는데, 이는 쿄오또(京都)의 제1군단을 거쳐 SCAP민간정보교육국으로 전달된다. SCAP가 이 보고들에 입각해 조선학교가 일본의 교육정책에 따르도록 문부성에 조치를 강구할 것을 지시하면서 1·24통달이 작성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미군의 압력에 의해 1·24통달이 발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를 들면 오오사까 군정팀의 맬컴 크레이그(Malcolm Craig)는 조선학교에 관한 일본경찰 관계자의 정보를 그대로 군의 상부에 전달하기도 해 일본의 치안당국이 점령군을 움직인 측면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6

어쨌든 이렇게 발령된 1·24통달은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각지의 조선학교는 기존 상태로 존속하기가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한해 전에 일본 문부성은 조선인이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각종학교를 신설할 경우 지사가 이것을 인가하도록 용인한 바 있다. 그런데 1·24통달은 조선인 자제를 취학시킬 의무가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학령 아동과 학생의 교육을 행하는 각종학교의 설치를 인정하지 않는 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물론 사립 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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