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6월항쟁 20년, 새로운 통일담론을 위하여
이승환 李承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주요 논문으로 「민간통일운동의 현황과 과제」 등이 있음. sknkok@paran.com
* 이 글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희망제작소가 공동주최한 토론회‘6월항쟁의 현재적 의미와 시민사회운동의 진로모색’(2007.6.7)의 발제문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평화체제의 전망」을 대폭 수정·보완한 것이다.
1. 6월항쟁 20주년과 통일담론의 변화
누구나 인정하듯이,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통일담론이었다. 지난 87년 이래 탈냉전과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민족국가적 패러다임이 도전받게 된 세계적 상황과 대조적으로, 한국사회에서는 통일담론의 그늘 아래 민족국가적 패러다임이 여전히 큰 위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냉전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현실적 상황과 함께, 통일이‘정상적’민족국가로의 발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강력한 소망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담론이 세계화시대를 맞이한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중요한 출구가 되었다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통일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통일에 부여하는 의미는 더이상 모든 사람에게 균일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뉴라이트의 등장과 구좌파의 퇴조 등 이념구도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통일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통일담론 무용론까지 제기되었다. 그 결과 6월항쟁 이후 20년이 흐르면서 한국 시민사회의 통일에 대한 태도, 통일담론을 다루는 입장은 매우 다양해졌다.
세계화와 탈냉전 그리고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는‘평화와 인권’‘생태와 환경’‘참여와 정의’등의 가치들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에 따라‘통일’문제는 1차적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시민사회는 통일담론과 관련하여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전통적 통일담론(민족우선주의적 통일담론)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통일담론이나 전망을 제시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1
그러나 시민사회 전반의 이러한 소극성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전통적 통일담론과 구별되는 새로운 흐름들이 나타났는데, 그 하나는 통일담론 무용론 내지 평화담론으로의 이전론이고,2 다른 하나는 주로 대북인도지원과 사회문화교류 등을 통해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화해협력운동’의 흐름이다. 후자를 하나의 담론체계로 묶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전통적 통일담론과 평화담론 사이에 넓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중도적 통일담론’정도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3
2. 87년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개
87년 이후의 남북관계
이 시기의 남북관계는 한마디로 남북관계의 주도권이 남으로 점차 전이되었고, 남의 경우 시민사회에서 제기한‘남북의 공존과 점진적 통일 방침’이 국가적 차원에서 수용되어갔으며, 북의 경우에는 통일이라는 언술적 공세는 지속되면서도 그 내용은 사실상‘현상유지’를 의미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갔다고 정리할 수 있다.
북의 공세적 대남정책과 남의 북방정책이 교차하던 노태우정부 시기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변화는 89년의 문익환-허담 4·2공동꼬뮈니께의 발표와 북한의 유엔 남북동시가입 인정 및‘하나의 조선’정책 포기였다.
89년의 4·2공동꼬뮈니께는 “쌍방은 (…)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 (…)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통일문제에서 남과 북이 기본원칙에서‘공존’그리고 과정에서‘점차성’에 합의한 역사적 문건이었다.
한편 91년 9월의 유엔 동시가입은 북한 스스로 남한정부의 실체를 인정하고‘법적 분단’의 공식화를 수용한 것이었다. 이는‘하나의 조선’이 아니라 남북의 공존과 사실상의‘현상유지’라는 방향으로 북한의 대남정책이 변화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해 12월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는데, 이 역사적 문서는 북의 변화된 대남정책이 아니었다면 합의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김영삼정부하의 남북관계는 전형적인 널뛰기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남과 북 모두, 특히 김영삼정부의 천박한 갈지자 대북정책으로 인해 남북관계 진전의 역사적 호기를 놓쳐버린 시기였다.
‘국민의 정부’로 불리던 김대중정부의 통일정책은 기본적으로 직접적인 통일보다는 교류·협력과 평화정착을 앞세우는‘선평화공존 후통일’, 즉‘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추구했다. 이는 4·2공동꼬뮈니께에 나타난 공존과 점진성의 원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98년에는 소떼 방북, 금강산관광 등 민족화해의 상징적 사건들이 전개되었으며, 2000년 6월에는 드디어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고‘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6·15공동선언에서는 4·2공동꼬뮈니께의‘공존의 원칙과 과정의 점진성’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으며(“남의 연합제 안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의 공통성을 확인”),‘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와 함께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다방면에 걸친 교류협력이 천명되었다.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개성공단 건설과 철도·도로 연결사업 추진 등 화해협력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다방면에 걸친 교류협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협력 기조는 북핵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전략적 개입과 북한의 대미긴장 확대정책으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더디게 진행되었고,‘평화번영정책’을 내세운 노무현정부의 등장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87년 이후의 북미관계
이 시기 남북관계가 여러 곡절 속에서도 큰 틀에서 화해와 협력의 방향으로 전개되
- 유수한 시민단체의 한 간부가 “우리 시민운동은 전통적 입장의 통일운동을 바라보면서 박수나 치고 있거나 혹은 그들의 협조요청에 들러리나 서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통일문제 아니어도 할 일은 널려 있는’한국의 시민사회가 통일문제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서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
-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대표적 논자들은 구갑우(具甲祐), 이대훈(李大勳) 등이다. 구갑우의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후마니타스 2007)는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
- 이들을‘중도적 통일담론’이라 명명한 것은 백낙청(白樂晴)의‘변혁적 중도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의‘변혁적 중도주의’와‘현재진행형으로서의 통일’논의는 이러한 흐름을 어느정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30~31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