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조갑상 曺甲相

1950년 경남 의령 출생.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 『길에서 형님을 잃다』 『테하차피의 달』, 장편 『누구나 평행선 너머의 사랑을 꿈꾼다』 『밤의 눈』이 있음. gsc@ks.ac.kr

 

 

 

병산읍지 편찬약사

 

 

세사람 앞에 캐논 프린터기에서 출력된 에이포 용지 석장씩이 놓였다. 종이는 오븐에서 막 꺼낸 바게뜨처럼 바삭하고 따뜻했지만 활자에 박힌 시선들은 차가웠다. 문제가 생긴 원고를 읽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병산의 어제와 오늘』 발간 전체를 통괄하는 편찬위원장과 실무를 책임지는 편집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읽으려는 글의 제목은 역사 편의 한 꼭지인 ‘해방정국과 6·25전쟁’이었다. 편찬위원장은 처음이지만 뒤의 두사람은 이미 한번 읽은 글임에도 탁자에 코를 박았다.

1945815일 마침내 해방이 찾아왔다.’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됐다.

 

1945815일 마침내 해방이 찾아왔다. 일제의 사슬에서 풀렸다는 해방(解放)이라는 말이 피동적이라 빛을 되찾았다는 광복(光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임시정부 우리 군대의 이름이 광복군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세계사적으로 8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니 우리 민족의 해방의 기쁨도 세계사적 테두리 속에서의 그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그날이 왔지만 삼각산은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지 않고 한강물도 용솟음치지 않았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38선이 그어지고 남에서는 미군이, 북에서는 소련군이 군정을 실시하였다. 삼봉·병산도 해방정국하에서 모든 지역들이 밟았던 길을 따랐다. 일제 패망 직후 지역인사들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바 좌우합작 성격의 건준은 미군 진주 후 해체되고, 좌익계열 중심의 삼봉군 인민위원회 지부가 설치되었다. 이런 좌익중심의 활동에 반발한 고태수 김노병 등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부를 만들었다.

해방정국은 새나라 건설을 목표를 하는 임시적 시간이기에 분열과 혼란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어떤 형태의 국가를 세우느냐 하는 문제는 친일청산에서부터 일본인 재산(적산) 처리, 토지(농지) 분배, 외세와 남북분단 문제 등과 결부되기에 어렵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서로 다른 생각을 크게 묶어 말하면 좌우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의 정점은 신탁통치 찬반여부로, 좌익은 찬성이라는 선택을 통해 고립화를 자초하였다. 이어서 19482월 유엔 결의에 따라 남한지역에서의 총선거가 그해 510일 이루어졌는데 삼봉 지역의 제헌 국회의원 당선자는 무소속의 김기탁이었다. 제헌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하고 815일 미군정 폐지와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광복 3년, 남북의 서로 다른 정부 수립 2년 만에 전쟁터가 되었다. 후방에 속한 삼봉·병산은 병참부대를 비롯한 군부대들이 주둔하여 대한민국 수호에 일익을 담당했다. 비록 전화의 직접적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인적 피해는 피해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인적 손실의 기본은 당시 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희생이지만 병산은 물론 삼봉군 전체의 전몰군경과 전상자 숫자의 파악은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 전후 혼란과 행정 미비가 원인일 텐데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민간인 희생도 뒤따랐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특별한 사례가 있어 상세한 기술이 요구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12월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좌익 쪽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관변단체이다. 창설 초기 가입자의 대다수는 전향자들이었으나 정부는 조직 확대과정에서 의무가입 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고, 자의적인 이 규정에 의해 좌익과 무관한 국민들이 가입하게 되었다. 지역의 가입인원은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되어 공무원과 유력인사들이 가입을 독려하고 강제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좌익에게 물자제공과 편의를 제공한 혐의자나 주민 간의 사적 감정에 따라 보복성으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19491120일 부산에서 결성된 경상남도 보도연맹 산하의 삼봉군 결성일자 및 조직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보도연맹 가입자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적에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구금되고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되는 처지에 놓였다. 이들에 대한 구금과 처형은 국군과 경찰의 후퇴와 같이 이루어졌으며 낙동강 방어전선 아래 지역에서의 구금과 심사기간은 길고 가혹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인 CIC를 비롯한 군 정보기관과 경찰 사찰계가 중심이 된 학살은 이승만정부 최상부의 결정과 명령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삼봉군의 대다수 보련원들은 8월 초순부터 중순 사이에 구금되어 815일 전후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 수는 조사 시기와 조사 주체, 보도기관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7백여명 전후로 추정된다. 1차조사는 19604·19혁명 뒤 삼봉군유족회가 결성되어 실시되었다. 이때 사체 발굴과 더불어 합동묘와 비석이 마련되었으나 5·16쿠데타 뒤 파괴되었다. 이후 2009년 정부 산하의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우리 병산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은 희생자를 줄였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때 병산 면장을 지낸 김후곤과 당시 병산지서 지서장으로 재임하던 허형도 경사의 남다른 노력과 결단이 있었다. 보련원들은 좌익활동의 경중에 따라 ABC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어 갑의 경우는 전쟁 발발 직후 본서에서 구금했다. 그외의 보련원들은 삼봉읍은 본서에, 나머지 11개 면은 지서별로 소집과 해제를 거듭하다 8월 초순부터 농업창고 등에 구금하였다.

병산지서 역시 몇차례 소집과 해제를 거듭하다 본서로부터 구금자 전원을 이송하라는 전화통지를 받았다. 보련원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지던 이 절박한 시기에 병산 면장을 지낸 김후곤이 허형도 지서장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면장은 뜻밖에도 구금 중인 보련원들을 본서로 보내지 말고 풀어주면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엄중한 시절에 이런 의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병산이 허형도의 진외가(아버지의 외가)였고 김면장은 그의 아저씨뻘이었기 때문이다. 김면장이 덧붙인 말은 내일이나 모레 본서로 보낼 보련원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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