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80년대 후반 이후 경제구조 변화의 의미
유철규 劉哲奎
성공회대 교수, 경제학. 주요 저서로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과 21세기 한국경제』(공저), 주요 논문으로 「한국자본주의의 현안과 갇힌 진로」 등이 있음. yoocg@mail.skhu.ac.kr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성립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87년 헌정질서를 경제구조의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고, 또 그 경제구조의 변화는 우리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가? 이것이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87년체제’라는 표현은 최근 정치계나 사회학계에서 자주 사용되지만,헌법체제를 의미하는지, 사회경제적 씨스템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사회이념이나 시대정신 혹은 이를 담고 있는 특정 민주화세대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현 사회체제를 민주화체제라고 부르는 데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1987년 시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결과로 민주화시대가 열렸고, 현싯점에서도 민주개혁이라는 과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통해 ‘건국’하는 것이 시대정신이었던 시기, 잘살아보세의 산업화시대, 그리고 지금의 민주화시대로 우리 현대사의 시대정신을 나누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87년체제라고 부르든 민주화체제라고 부르든, 최근 현재의 우리 사회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그것이 정략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느정도는 공통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 사회가 반독재투쟁을 통해 형식상의 민주주의는 얻어냈지만, 실질 내용상의 민주주의는 요원하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후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치절차상의 민주주의 핵심을 일컫는다면, 실질적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이다. 실제 사회구성원 대다수의 경제적 삶이 어느정도 이상의 수준에서 평등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란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재벌과 외자(外資)가 주도하는 독과점 구조의 고착화는 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이에 따른 배제와 차별현상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한 주체였던 노동계의 분열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필두로 해서 절대 다수 노동자의 이해를 배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민주화 이후 사회적 갈등이 엄청나게 분출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이를 해결한 의사도 능력도 없는 것 같다는 한탄도 민주주의에 대한 또다른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경제질서 속에서 지속가능한 경제체제를 창출하고 한반도에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87년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종엽)
올해 7월에 개최된 창비·시민행동 공동 심포지엄‘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의 문장이지만 여기서 생각해볼 점은 많다. 약간 자의적으로 풀이해보자면, 우선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 틀이 1987년 이후의 민주화체제에 속해 있다는 것이고, 이 체제는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함께 폭발하듯 터져나오고 있는 사회적 갈등에 대한 책임이 있는데 그것들을 관리하고 처리해갈 능력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된 한반도를 이끌어가고 탈냉전 이후 무한경쟁의 세계경제질서에 대응할 수 있는 좀더 보편적인 사회이념이 부재(不在)하다는 것과, 민주화가 반드시 사회정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해석해본다면 87년체제의 극복이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이념, 사회적 과제를 모색하자는 제안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체제를 극복하자는 표현이, 19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분기점으로 이전과 구별되는 시대적 과제로 ‘민주화와 그것에 부합하는 사회개혁’이 제기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연장선에 있는 2005년 지금 민주화와 사회개혁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과제인지를 다시 묻는 것이라면 그 의미가 크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노동의 위기’ 그리고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인 ‘국민경제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이렇게 보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임기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아래에서 차례로, 시대적·사회적 과제의 변화와 연관지어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난 경제구조상의 중요한 변화들을 살펴보고,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민주화체제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금융자본의 세계화 이념(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린다)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우리 경제에 파고들게 된 내부적 조건을 점검해볼 것이다. 그리고 IMF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양극화·파편화된 경제체제를 재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1. 1980년대 후반의 경제·제도적 변화
정치적 측면에서 한국사회를 이전 시기와 구별짓는결정적 계기로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투쟁을 설정하는 것에는 어느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경제분석의 영역에서 이 시기를 이전과 다른 경제체제를 형성시킨 기점으로 설정하는 데는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경제변수의 시계열 분석이 갖는 성격상 시기구분점으로 통상 산업순환의 공황기 혹은 불황기가 선택되게 마련인데, 1987년을 전후한 시기는 당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렸던 1986~88년의 이른바 ‘3저호황’ 시기에 속한다.1987년은 경기순환에서 통계청 기준에 따른 제4순환기(1985년 9월~1989년 7월, 정점 1988년 1월)의 확장기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기순환상의 공황 혹은 경제위기를 시기구분의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한다면 1987년을 기준으로 삼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1979~80년이 더 중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박정희(朴正熙)의 사망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이전 시기의 마감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으며 경기순환 측면에서도 당시의 경제공황은 대단히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회적’ 과제와 갈등 그리고 위기의 근원을 좀더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 측면에서 관찰되는 1987년 이후의 변화를 경제구조 측면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또 후자로부터 발생해서 지금까지도 한국경제의 ‘위기구조’에 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