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사과
1984년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재학중. dryeyed@gmail.com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
영이
영이야. 아이들이 영이를 부른다. 영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영이까지 합쳐서 다섯 명의 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은영이의 영이가 명랑하게 뛰어간다. 정현이의 영이도 은영이에게 달려간다. 주희의 영이는 아주 예쁜 레이스 치마를 입고 있다. 검은색 에나멜 구두가 주희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채은이의 영이는 이상한 머리핀을 했다. 채은이는 영이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채은이의 머리핀은 언제나 예쁘다. 마지막으로 영이는 달려가는 영이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영이는 영이 하나뿐이었는데 아이들이 부르자 하나의 영이와 네 개의 영이들이 되었다. 영이는 몹시 당황하여 숨었다. 하지만 영이들이 네 개나 있으니까 괜찮다. 은영이의 영이가 가장 열심이다. 정현이의 영이는 뒷모습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현이는 언제나 뒤에서 영이를 쳐다보기 때문이다. 영이는 정현이가 그렇게 자기를 풀죽어서 바라보는 것이 싫다. 정현이는 개처럼 처량하게 영이의 뒤통수를 쳐다본다. 정현이의 영이는 언제나 은영이의 영이다. 그래서 정현이는 슬프다. 나도 슬프다. 주희의 영이는 언제나 예쁜 치마를 입고 있다. 주희의 영이는 머릿결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희의 영이는 똑똑하다. 그래서 나도 주희의 영이가 제일 좋다. 주희의 영이는 아침마다 고민한다.무슨 치마를 입을까, 머리는 어떻게 땋을까? 세 영이는 참 보기가 좋다. 그런데 네번째 채은이의 영이는 흉하다. 채은이의 영이는 보잘것이 없다. 채은이의 영이는 빵 부스러기 정도다. 그런데 영이의 채은이는 여왕이다. 채은이는 우리 반 모두의 여왕이다. 채은이는 마치, 엘레나 같다. 사과를 좋아하는 엘레나. 사과같이 예쁜 엘레나. 그러니까 헬레나. 거울만 보는 왕비님. 채은이는 새하얀 니트 원피스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까 영이하고는 상대도 안된다는 말이다. 아, 영이는 맨날 맨날 주희의 영이였으면 좋겠다. 주희의 영이는 공부도 잘한다. 그런데 채은이의 영이는 그냥 열심히 하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진짜 영이는, 그러니까 영이, 그냥 영이는 어떤가. 영이는 한가지다. 영이는 영이의 영이만 없으면 좋겠다. 영이의 영이는 흉하다. 썩은 콩보다 더 흉하다. 영이는 영이의 영이가 싫어서 집에 가는 것이 싫다. 영이의 영이가 나타나면 영이는 울고 싶다. 하지만 영이가 집으로 가는 길이면 영이의 영이는 어김없이 영이의 귓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영이의 영이는 뭔가? 영이의 영이니까 진짜 영이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영이의 영이는 영이의 영이일 뿐, 그러니까 수많은 영이들 중 하나일 뿐. 영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주희의 영이가 새까만 뒤통수인 것처럼, 채은이의 영이가 이상한 머리핀인 것처럼, 은영이의 영이가 온통 미소인 것처럼 영이의 영이는 흉한 영이이고 모두 각각의 영이들일 뿐이다. 꽃다발처럼 많은 영이들이 너무 열심히 해주면 어떤 영이는 달이 되고 어떤 영이는 수세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영이는 그게 무서운데,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 없다. 얘기하는 것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이 혼자서는 너무 벅차다. 나의 영이가 진짜 영이일까? 영이는 물어본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달콤하게, 훌륭한 음성이 쏟아져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영이는 발밑을 두리번거린 적도 있다. 하지만 바닥에는 회색 먼지만 가득했고, 영이의 고민은 점점 더 헝클어졌다. 머리가 아파진 영이는 영이의 영이를 그냥 나의 영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나의 영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영이의 영이라는 말은 너무나 성가시고 헷갈려서 이제부터 그 영이는 순이라고 부르겠다. 일단 순이는 너무 무섭다. 아직까지는 그게 다다. 순이는 무섭다.
영이와 순이와 네 명의 영이들은, 또 채은이와 주희와 은영이와 정현이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영이와 순이와 네 명의 영이들과 채은이는, 주희 은영이 그리고 정현이와 헤어졌다. 그러니까 영이는 주희의 영이, 은영이의 영이, 그리고 정현이의 영이와도 헤어졌다.5분 뒤에 영이와 순이는 남은 한 명의 영이와 채은이와도 헤어졌다. 채은이는 아파트단지로 들어갔다. 채은이의 영이는 채은이네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채은이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영이의 집이 점점 가까워지자 숨어 있던 순이가 영이의 귓속에서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이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아파트단지를 지나 주택가 골목길로 들어갔다. 이제 순이는 완전히 다 흘러나왔다. 영이는 입을 꾹 다물고, 어깨는 아무렇게나 두고, 까맣고 까맣기만 한 인형 눈을 하고는 타박타박 걷고 있다.영이는 순이와 함께 붉은 벽돌로 쌓은 똑같은 모양의 이층집들 사이를 걷다가 그중 하나로 들어가려고 한다. 불쌍한 영이의 머리카락들이 어깨 위로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람이 왔다갔기 때문이다. 영이의 손은 맥주색 철문을 만나자 모기처럼 약해졌다. 왜냐하면 영이는 문을 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이의 발들은 돌계단 삼형제를 만나자 깜짝 놀라 움츠렸다. 왜냐하면 영이는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당에 깔린 푸르른 잔디들도 엉엉 울고 있었다. 감나무의 구슬픈 목소리는 여기까지 들려온다. 나는 지금 이 풍경을 너절하게 늘이고만 있다. 왜냐하면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도 영이만큼이나 영이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말도 안되는 말들의 계단을 쌓고 또 쌓아서 가능한 한 영이가 늦게 늦게 집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집에는 술에 취한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영이가 술에 취한 아빠를 만나고 싶지 않은 만큼 나도 술에 취한 영이의 아빠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순이가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영이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영이의 발은 껌이 되어 문에 찰싹 달라붙고만 싶다. 열쇠를 꺼내는 영이의 손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정작 영이의 목구멍은 태연하다. 영이의 목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타고 있는 돼지막창처럼 얌전하게 타들어가고만 있다. 찰칵 하고 문이 열렸다. 순이는 커다란 맥주색 철문을 열고 황량한 사막, 아니면 지옥의 늪, 혹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걸어들어간다. 영이는 까맣게 탄 식빵처럼 바싹 말라붙었다. 바로 그때, 순이가 영이의 작은 어깨를 확 밀었다. 그래서 영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대담하게,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빠는 식탁에 앉아 기분좋게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갈색 스웨터에 베이지색 잠옷 바지를 입고 있다. 헤벌쭉 웃더니만, 딸기 같은 얼굴로 상냥하게 영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순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주정뱅이일 뿐이다. 었고, 이고, 일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똑똑한 순이는 영원이란 깨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빠는 깨진 독에 물을 들이붓듯이 목구멍 속으로 술을 들이붓는 사람이다. 아빠가 영이를 부른다. 그것은 아빠가 순이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순이는 온통 울고 싶다. 온 거실을 빙글빙글 돌면서 울고 싶다. 그러다가 두 주먹으로 있는 힘을 다해 피아노 건반을 내리치고 싶다. 그러고 나서 걸려 있는 액자들을 모두 부수고 소파와 소파 위의 쿠션을 다 찢어버린 다음에 쿠션 솜을 다 먹어버렸으면 좋겠다. 먹다가 목이 막혀서 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이는 순이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한다. 영이는 영문도 모른 채 진동안마기처럼 부르르 떨고 있는 순이를 질질 끌며 힘겹게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바로 그 순간, 아빠가 영이의 팔뚝을 잡았다. 영이의 몰랑몰랑한 살이 아빠의 커다랗고 메마른 손바닥에 가득 찬다. 화가 난 순이는 이제 낡은 계단처럼 삐그덕 삐그덕 울기 시작했다.몹시 놀라고 당황한 영이는 두 손을 뻗어 작고 예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영이는 울기 시작한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영이는 아빠를 돌아본다. 그러자 난처해진 아빠가 영이의 팔을 놓고 비틀거리며 다시 식탁에 가 앉았다. 한숨을 푹 쉬더니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운다. 덩달아 술병도 빠른 속도로 비어간다. 그런 아빠를 순이는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빠는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순이는 광대뼈 옆으로 흘러내린 붉게 충혈된 누리끼리한 눈알을 발견했다. 축 늘어진 붉은 혓바닥은 뱀처럼 사악했다. 고무장갑처럼 빨간 얼굴에선 온통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아빠의 피부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순이는 순도 높은 염산을 구해서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깜깜한 콧구멍에서는 검붉은색 지렁이들이 혈관처럼 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지렁이들이 영이의 발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란 순이가 갑자기 떨림을 멈췄다. 그래서 가까스로 영이는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영이는 힘겹게 침대 위로 쏟아져내렸다.
영이는 울고 있는 것은 영이가 아니라―순이도 아니고―단지 자기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울고 있는 것은 영이가 맞다. 울지 않는 것은 순이였다. 순이는 어느새 천장에 닿아 있었다. 천사처럼, 아니면 나방처럼 천장을 파닥파닥 날아다니면서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영이를 봤다. 빨갛게 달아오른 영이의 뺨이 순이는 맘에 안 들었다. 들썩거리는 영이의 작은 어깨도 싫었다. 순이는 울고 있는 영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순이는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