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87년체제의 궤적과 진보논쟁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웃음의 해석학』 『연대와 열광』 『시대유감』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등이 있음. jykim@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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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작가 황석영(黃晳暎)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얘기지만 80년 광주항쟁 이후 전국 민주화운동이 초토화됐다. 84년인가, 홍남순 변호사의 고희를 맞아 전국에서 숨죽이고 있던 재야 청년들이 우리 집에 다 모였다. 나는 신문연재 때문에 먹고살 만하다고. 160명이 몰려와 2층 계단, 화장실에까지 앉아 이틀간 맥주 80짝을 마셨다. 지금 4당으로 갈라진 정치인들이 여기 다 있었다. 나는 나이브한 문학예술가니까 지금 그 사람들 만나면 그때로 돌아가자, 87년체제 종언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한다.‘어떻게 잃어버린 세월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하는데 그 근거는 남아 있다. 과거 잔재 속에서 임시변통, 가건물 식으로 생긴 현재 대선판도는 깨지게 마련이다. 이 판이 깨지기 전에 바깥에서 전국의 시민세력들, 양심적인 사람들, 온건한 사람들이 제3의 세력을 형성할 것으로 본다. 6월항쟁 직후의 초심으로 돌아가 정열을 갖고 나라를 위해 일해보자는 것이다.1

 

87년 6월항쟁의 자리로 되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황석영은 지난 20년의 시간을 어디서부턴가 어긋나버린 행로로 인식하고 있다. 애도를 넘어 회귀를 천명하는 그의 몸짓 밑바닥에 있는 정서를 납득 못할 바 아니다. 또한 회귀가 전진을 위한 표어 구실을 하는 일이 역사 속에서 드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87년 6월항쟁 직후의 세력연합 상태로 되돌아갈 근거가 남아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의 자리에 서서 현재를 조망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87년의 경험은 그후 20년에 걸친 우리 사회의 궤적을 해명하고 현재에서 새롭게 출발하려 할 때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을 정돈하는 인식론적 관제고지(管制高地) 구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내 자신의 경우 연전에 87년체제론을 제기했던 이유이기도 하다.2 물론 87년체제에 대한 여러 논의가 많은 공통분모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87년체제라는 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난 몇년 동안 널리 쓰이게 된 밑바탕에는 87년이 우리의 현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특권적 지점이라는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런 통찰이 그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이런 경향이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손호철(孫浩哲)은 87년체제론이 현재 우리 상황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사회체제로 나아가는 데 어떤 인식론적 장애를 유발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 사회를 87년체제가 아니라 97년체제 혹은 신자유주의체제라는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도 외환위기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서 87년체제론에 일종의 단계론을 도입한다면 손호철의 주장과 87년체제론의 대립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97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87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87년에 대한 강조가 곧장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강화 그리고 비판적 지지론의‘악몽’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우려하는 손호철의 생각은 지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정치적 전략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전략의 문제는 뒤에 다룰 것이므로 먼저 지적인 차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3 그의 입장은 단적으로 말해 왜 우리가 97년 외환위기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분석하기 어렵게 한다. 97년 외환위기가 구조적 변동을 야기했다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왜 우리가 그런 위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그 점을 살필 수 없다면 현재에서부터 재출발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 토대가 허약해질 것이다. 나는 이 점과 관련해서 87년체제론이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점은 87년체제론에 입각한 분석의 성과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문제이며, 이 과정에서 87년체제론이 의미하는 바 또한 더 선명해져야 할 것이다. 사실 단순한 지칭 차원에서도 제법 널리 입에 올려진 87년체제라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는 적지 않다. 비근한 예로 최장집(崔章集)의 87년체제론에 대한 비판이 그렇다. 그는 87년체제론을 곧장 87년 헌정체제론으로 이해하고 87년체제론의 함의 또한 개헌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으로 파악한다. 87년체제의 중요한 축이 87년 헌정체제인 것은 맞지만, 87년체제론이 87년 헌정체제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그는 최근에 87년체제를 지역당구조/지역당체제라고 보는 박상훈(朴常勳)의 시각의 한계를 비판하기도 했다.4 이런 비판은 87년체제를 매우 폭좁게 해석한 입장을 전거로 87년체제론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부당한 것이거니와, 최장집 같은 대가에게 읽힐 만한 영광을 얻지 못한 몇몇 87년체제론자들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이런 식으로 87년체제를 정의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87년체제론이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체제 재편이든, 민주주의의 위기이든, 6·15공동선언 이후 형성된 분단체제의 형태 변화든, 한미FTA든, 이런 상황을 체계적으로 조망할 능력을 입증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87년체제의 궤적을 스케치해보고자 한다. 불가피하게 축약적일 이 논의가 자임한 과제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면한 문제들, 특히 올봄 내내 진행된‘진보논쟁’에서 드러난 몇가지 편향에 대해 비판적 논평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87년 6월항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전환점이었다. 87년을 전환점으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해체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박정희식 발전국가체제에서 벗어났다. 이전의 발전국가체제는 국가-은행-대자본의 연합과 민중부문 배제라는 두 측면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이런 체제의 종식으로 인해 노동뿐 아니라 독점자본 또한 국가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구체제에서의 해방이 곧장 어떤 체제로의 진화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했다.

민주화는 사회가 무엇을 정치의 대상, 즉 자기결정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그리고 그런 대상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제도화된 절차와 선거경쟁 속으로 밀어넣는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체제 이후를 어떻게 설계할지가 정치적 과정에 맡겨졌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치적 과정이라는 테이블 위에 모든 카드가 올라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세력의 포진상태와 확립된 가치정향에 따라 어떤 카드가 올라올지는 미리 규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87년체제는 이런 선택범위를 좁히지 못했다. 타협적 민주화였기 때문에 사회세력의 재편이 취약했고, 권위주의체제를 무너뜨리는 정치혁명이었지만 구체제의 가치와 문화적 에토스로부터의 방향전환을 이룩하는 문화혁명적 성격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의 한 결과로, 예컨대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지난 20년간 독재의 그늘을 벗어나 정화되기는커녕 거의 외설적인 수준으로 더러워지고 정파화되었으며, 제어되지 않은 공격성 표출의 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행의 향방을 규율할 헤게모니적 능력을 가진 프로젝트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시적으로 주장되지는 않았지만 체제 진화과정에서 점점 더 분명한 형태로 정련된 두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것은‘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 프로젝트’와‘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 혹은‘신자유주의 프로젝트’라고 명명될 수 있다. 전자의 주도세력은 민중부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집단에 근대적 교육과 사회체제의 진화를 통해 민주적 신념을 획득한 젊은 신중간층,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청년층,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집단이 더해질 수 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정치체제의 지속적 민주화, 발전국가체제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부의 재분배, 권위주의문화의 청산과 평등주의적 사회통합, 생태적 가치의 실현, 그리고 구권위주의체제의 근본 토대로 작용했던 냉전적 반공주의와 분단체제의 점진적 해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집단은 가치체계의 수준에서 별로 정합성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사회적 과제의 선차성에 대한 평가의 차이로 인해 쉽게 정파적으로 분열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이 프로젝트는 담지자집단의 열망을 일관성있게 대변하고 실현할 정치세력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후자는 관치경제에서 탈피하여 경제를 자본 주도로 재편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전두환정권기에 경제관료들에 의해 시도된 것이었으나 발전국가체제 관행의 존속 그리고 냉전적 독재정권의 존재로 인해 충분히 실현되지 않았다. 민주화 이행은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가 작동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 프로젝트는 1970년대 말부터 형성된 영국의 새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그리고 중국의 경제개방과 사회주의권 해체로 인해 지구문화로 부상하고 있었던 신자유주의와 공명하는 것이었고, 그런만큼 신생 민주주의체제의 환경을 제약하는 세계체제의 진화방향과 유화적이었다. 세계체제로의 편입전략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불평등한 분배에도 불구하고 성장 자체가 복지였던 발전국가의 경험에 속박된 사회성원들에게, 개방과 경쟁 그리고 성장을 전면에 내건 이 프로젝트는 설득력이 있었다. 시장 개념이 가진 간명한 설득력도 강점이었다. 하비(D. Harvey)가 지적하듯이 신자유주의는 성장과 발전의 프로젝트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재분배 프로젝트의 성격이 더 강하다.[5. David Harvey,

  1. 「황석영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 있다”」, 『경향신문』 2007년 1월 23일.
  2. 졸고 「노동운동의 성숙을 위해」,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3. 손호철 「몇가지 오해와 몇가지 반론: 〔조희연교수 비판〕 반신자유주의와 반수구, 무엇이 패배주의인가」, 『레디앙』(www.redian.org) 2007년 2월 12일.
  4. 최장집 「정치적 민주화: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비평』 2007년 봄호,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