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87년체제의 정치지형과 과제

 

윤상철 尹相喆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사회학. 저서로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행과정』, 주요 논문으로「1990년대 한국 사회운동」 「이념의 정치와 권력경쟁의 정치」등이 있음. yoon2137@hs.ac.kr

 

 

1. 왜 ‘87년체제’인가

 

한국의 현체제를 이른바 ‘87년체제’로 대상화하여 논의하는 이유는 단지 이 체제가 1987년 민주화 이행을 계기로 성립하여 헌법의 변경 없이 존속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현체제가 위기에 직면하여 변화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87년체제를 주도한 세력들의 ‘막내’ 격인 현정권과 이른바 ‘386정치세력’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하락하고, 이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퇴출된 구체제의 상징들이 ‘박정희씬드롬’ 혹은 ‘전사모’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 대한 경계일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이래 발진한 비서구 신생민주주의들은 여전히 취약하고 민주주의의 지구화 경향도 역전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구권위주의체제에 대한 경험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라면,이러한 정치상황을 용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현체제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다시 동원함으로써 체제 출범시의 비전과 쇠락하지 않은 진화 가능성을 회생시키고 나아가서 체제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려 할 것이다.

간략하게 정의하면, ‘87년체제’는 초기 민주화 이행 이후 질적으로 지체된 민주주의체제로서, 제도적 수준의 정치적 민주화는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었으나 제도의 실질적 운영이 왜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질적 수준의 민주적 심화 역시 장애에 직면한 체제이다.1 주지하다시피 87년체제는 국가의 붕괴, 경제적 파국, 그리고 유혈적 참변을 동반하지 않은 정치적 성취였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허약한 아시아지역에서 밖으로부터의 지원이 협소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며, 극단적인 반동이나 역전 없이 타협을 통한 점진적인 정치발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2 또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서구의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이상화하거나 최근 10여년간 유약한 민주주의를 침식해온 신자유주의에 압도되어 나타나는 정치적 냉소주의도 서구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거나 비서구 민주주의체제의 역사적 경험을 성찰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3 87년체제에 관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들은 비단 국외자들의 시선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내부인들에게도 이행에 대한 조급성과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의 정치적 효과를 체감하는 내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성취와 현재의 상황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타협에 의한 민주적 이행’의 결과 구체제의 제도적·인적 유제가 강력하게 존속하는 반면, 신체제의 대안적 상과 전망이 불투명하고 그 와중에 잠정적으로 퇴각한 구체제의 변형적 복원이 예견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87년체제의 사회적 합의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었고, 현재의 정치 역시 각자의 정치적 입장과 전망에 따라 그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87년체제의 사회적 합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6월항쟁 직후의 7~8월 노동자대투쟁이나 1990년의 3당합당에 의해 좌절된 바 있으며, 과소한 평가는 수평적 정권교체와 탄핵반대운동 등에 의해 부정되기도 했다. 이렇듯 유동적인 상황에서 대안적 신체제가 거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고, 설사 만들어지더라도 이를 실현할 사회세력들이 동원되지 않을 경우, 지금의 87년체제가 정체나 동요 심지어 역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악의 상황은 유약한 신민주주의(new democracy)체제로의 이행을 가능케 했던 다소 느슨한 사회적 합의나 정치적 연합이 해체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발전과 이에 따른 사회적 분화의 정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민주적 이행이 어느정도 성취된 사회일수록 더 진전된 이행을 위한 동원 조건들이 이루어지기는 훨씬 더 어렵다.

87년체제는 관료권위주의적 유신체제 혹은 군부권위주의체제의 극복과정에서 안티테제로서 출현했고, 그 극복과정에서 한반도 분단체제의 압력, 한국사회 특유의 계급형성과정, 그리고 정치사회의 선행적 형성으로 인하여 구체제와 구지배세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용인했다. 또한 비서구 권위주의체제들과 국제적으로 비교해보면, 한국의 구체제는 경제성장을 실현하고 권력행사에서도 상대적으로 비유혈적이었으며 특히 체제전환기에는 전략적 유연성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의 생존조건을 마련했다. 이 모든 요인들은 초기 이행을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였으나 후기 이행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로 인해 87년체제는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87년의 사회적 합의를 지탱하고 이전 체제로의 역전을 막기 위해 제도적 안정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민주주의의 확장심화를 위해서도 시민사회의 집단적 동원력을 유지해야 했다. 또한 87년체제가 직면한 도전적인 상황은 체제 이행 이후에 진행된 국내외적 변화가 체제 유지 및 민주적 심화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체제 출범 당시에는 3저호황과 노동정치상황 등의 경제적 여건이 정치적 변화를 가로막지 않았지만, 그후에는 점차 경제가 민주적 심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가령 한국경제는 개방화의 진전에 따라 무역이나 금융 등에서 비우호적인 국제환경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핵문제 등 한반도 주변의 갈등상황이 남북경협이나 해외투자 유입을 불안정하게 하고 있고, 고령화사회에 진입하면서 생산이 둔화되고 복지비 부담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사회적·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요컨대 대내외적인 경제상황이 체제변화를 둘러싼 정치적 선택을 어렵게 함으로써 현정권은 집권세력의 정치적 성향과 갈등하는 정책적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렇듯 87년체제의 특징과 87년체제가 직면한 환경은 체제의 발전적 대안모색이나 그 위기극복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구군부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87년체제가 표방하는 이념이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물론 신민주주의체제는 권력구조를 먼저 변경하는 이행기적 특징으로서 정치중심성을 우선적으로 지니지만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사회경제적 확장성을 가져야 한다. 과도

  1. 이른바 ‘최소요건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정치체제가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와 더불어 정부의 통치력까지 잘 갖추고 있는지 혹은 통치력의 저하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S. Mainwaring, “Transition to Democracy and Democratic Consolidation: Theoretical and Comparative Issues,” S. Mainwaring, G. O’Donnell, and S. J. Valenzuela eds., Issues in Democratic Consolidation, Univ. of Notre Dame Press 1992 및 David Collier and Steven Levitsky, “Democracy with Adjectives-Conceptual Innovation in Comparative Research,” World Politics 49, 1997).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민주화가 지체됨으로써 발생하는 정치적 제도화의 간헐적인 동요 역시 정치적 제도화의 미흡으로 볼 수도 있다.
  2. 졸고 「지구촌 ‘제3의 물결’민주화와 한국의 민주화」, 『경제와사회』 제51호, 2001 참조.
  3. Kang, Jung In,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Revisited in Light of Western Experiences,” 국제학술대회 ‘민주주의·민주화 그리고 이데올로기: 한국과 유럽의 대화’, 서강대학교 2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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