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

 

조효래 趙孝來

창원대 사회학과 교수. 주요논문으로 「민주화와 노동정치-한국·브라질·스페인 비교」 등이 있음. hrcho@sarim.changwon.ac.kr

 

 

 

1. 머리말

 

1987년 ‘뜨거운 여름’의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15년이 지났다.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성장은 압축적 산업화의 결과이자 동시에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모델에 타격을 가한 중요한 계기였다. 노동운동은 축적체제의 전환을 압박한 핵심적인 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영역에까지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사회세력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노동운동은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으로 전개되었고, 한국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합적 정체성을 획득함으로써 본격적인 계급형성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후 15년간 한국의 노동운동은 끊임없이 성장과 위기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하나의 독자적인 계급’으로 형성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놀라울 정도의 전투적 동원과 투쟁력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기업별 노조체제로 인한 계급적 연대의 제약, 정치세력화의 실패와 독자적인 계급정당의 결여라는 이념적·조직적 취약성에 의해 고통받았다. 특히 1998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고용불안과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조합의 취약한 규제력,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른 노동계급 내부의 분화로 인해 새로운 도전과 위기에 직면했다. 발전국가 모델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의 전환과정에서,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는 노동운동의 의제(agenda)를 급속히 변화시켰고, 민주노조운동은 진행되는 노동시장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진보성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이는 1987년 이후 ‘임금인상을 목표로 기업별 노조에 의한 전투적 동원’을 특징으로 했던 노동조합운동에 새로운 전략과 정체성의 재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 노동운동의 성장과 위기, 새로운 전략과 정체성의 재구성은 1987년 이후 노동계급의 형성과 분화, 재형성 과정이라는 넓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계급형성은 개별노동자들이 그들의 내적 차이와 이익 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계급으로 통일성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동질적인 계급집단으로 조직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형성이란 정치적 프로젝트이며, 개별노동자들의 집합적 조직인 노동조합의 전략과 정체성에 의해 직접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성장과 위기 역시 산업과 부문, 기업, 고용형태별로 다양한 개별노동자들이 어떻게 노동계급의 일원이라는 집합적 인식과 계급적 조직을 발전시키고 통일적 행동을 경험해왔는가 하는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위기를 노동조합의 정체성 형성과 재구성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즉 노동조합의 집합적 정체성이 어떠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왔으며, 변화하는 정치적·경제적 맥락 속에서 어떠한 변화의 궤적을 밟아왔는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계급에 대한 개별노동자들의 의식과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측면보다는 1987년 이후의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 형성과 변화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한다.1

 

 

2. 노동조합의 정체성

 

노동조합은 항상 개별노동자나 노동자집단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 혹은 집단적 정체성의 기획을 필요로 한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으로의 형성과정은 항상 의식적인 정치적 프로젝트의 결과였고, 노동조합의 주요한 역할은 개별노동자들의 다양하고 특수한 이익들을 조정함으로써 계급 내부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집합적 조직 혹은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은 항상 자신들이 대표하는 이익들, 성취해야 할 의제의 설정, 가능한 자원동원의 방식, 바람직한 조직형태와 운영방식에 대한 개념과 상(image)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노동조합이 누구의 이익을 어떠한 방식으로 대표하며, 우선적으로 달성해야 할 의제와 전략을 어떻게 설정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자원을 주로 동원하고자 하는가의 문제이다.

하이만(R. Hyman)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정체성은 이익과 민주주의, 의제, 권력자원들 간의 상호연관된 과정들의 복합체이며, 특정한 방향의 선택을 결정하고 다시 그 선택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전통”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의 주요한 정체성은 전적으로 노동시장 기능을 수행하는 이익조직, 노동자의 전반적인 지위향상과 사회정의를 위한 조직, 노자간 계급투쟁에서의 ‘전쟁의 학교’와 같은 것들이었다. 하이만에게 현재 서구 노동조합의 정체성은 제조업 남성노동자들의 이익에 기반한 것으로, 주로 사용자들과의 단체교섭,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정치적 결정 및 입법적 규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경제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2

물론 이러한 정체성은 운동노선이라는 형태로 공식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공식적인 결정과정이나 전략적 계획이 없는 경우에도 ‘조직의 목표와 수단에 관한 규정된 선택의 틀’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매시기 노동조합의 선택과 행위의 결과들은 그것이 누적되면서 일정한 행동패턴을 만들어내고, 스스로에 대한 상과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 특정한 행동패턴과 스스로에 대한 상은 그것이 급격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노동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충성을 유인하는 이데올로기적 자원이자, 노동조합과 일반조합원들을 연결하는 조직적 자원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만약 노동조합이 새로운 전략을 추구하려 한다면, 현재의 정체성은 조직 내부의 논쟁을 위한 준거점이 된다.

변화하는 환경과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는 노동조합은 적절한 행동을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의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개념과 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조합의 전략과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과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공유하는 전통과 기대, 행위양식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노조운동’ 역시 조합원과 노동조합들이 공유하는 정체성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활동가와 조합원들에게 조합활동의 상과 지향에 대한 공유된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공유된 이미지와 상들은 이후의 변화되는 환경 속에서도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에 일관성과 지속성을 부여하면서 조합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3. 87년 이후 노동조합의 정체성: 전투적 경제주의

 

한국의 노동계급은 1987년 이후 대중적인 형태의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계급형성의 과정을 본격화하지만, 정치적·경제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전략과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또한 수정해야 했다. 1987년 직후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일차적 과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의 실현과 작업장 내 비민주적 권력관계의 변화였다. 민주노조운동은 국가와 자본의 적대적인 태도에 맞서 급진적 이념과 전투적 동원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갔다. 노동자들은 작업장 단위의 집단적이고 전투적인 동원을 통해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작업장 민주주의를 확장할 수 있었으며, 많은 대기업의 경우 노동조합이 현장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노동조합들은 ‘전투적 경제주의’라는 정체성을 형성해갔다. 이러한 정체성은 근로조건 개선과 작업장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일반의 이해

  1. 전자의 시각에서 대표적인 연구는 구해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2002)이다.
  2. 노동조합의 정체성에 관한 이론적 논의로는 Richard Hyman, “Changing Trade Union Identities and Strategies,” Hyman & Ferner ed., New Frontiers in European Industrial Relations (Basil Blackwell 1994) 120〜3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