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87년 헌정체제 개혁과 한국 민주주의

무엇을, 왜,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박명림 朴明林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교수, 정치학.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2,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음. mlpark@yonsei.ac.kr

 

 

1. 왜 헌법개혁이 필요한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하나의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실현이 민주정부의 능력과 사회성원들의 삶의 질 향상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 한국에서는 ① 민주주의 발전, ② 유능하고 안정적인 민주정부, ③ 일반민중의 삶의 질 향상 사이에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형성되고 있지 못한가? 1948년 근대 국민국가 수립 이래 권위주의 정부로 일관한 한국사회는 1987년 ‘사실상의 민주혁명’ 당시 민주 제도와 결과의 결합을 고뇌하지 않은 채 모든 열정과 역량을 권위주의 자체의 극복에 집중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 현실은 권위주의 극복과 민주제도 실현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직면한 세 가지 핵심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첫째 87년 이후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주정부들은 중간평가 공약, 3당합당, 내각제 개헌 약속, 재신임 추진, 탄핵파동 같은 ‘헌법적’ 사태에 예외없이 직면했다. 동시에 정당질서의 인위적 재편이나 헌법적 약속, 탄핵파동 없이 여소야대―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 상태를 정상적으로 극복한 정부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민주정부들을 관통하는 이러한 반복현상은 ‘헌법적’ 사태의 연속이 결코 민주정부들의 무능과 정치공학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제도가 정치를, 헌법이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문제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둘째 중대한 정치·사회문제들이 법원과 헌법재판소(헌재)로 넘어가 헌법적·법률적 결정을 통해 해결되고 있고, 그 결과 핵심 정치·사회의제에서 행정―입법―사법 세 기구의 이해는 종종 정면충돌하고 있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사회의 법률화’ 경향은 더욱 심화되어 국가보안법 개폐, 대통령 탄핵,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이전, 양심적 병역거부, 호주제 등 정치·사회·인권·대외관계의 핵심의제들은 거의 전부 헌법적 결정의 문제로 귀결되고 말았다. 또끄빌(Alexis de Tocqueville)의 통찰 이래 사법의 영향력 증대,“사법의 정치 대체” 현상은 오늘날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나타난 한국 사회와 정치의 뚜렷한 변화는 민주화와 ‘사법화(司法化)’의 동시적인 심화였다. 한국 민주주의는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있는 법원과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이론적·실천적으로 대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민주주의 아래에서 악화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문제의 심각성이다. 사회양극화, 실업, 빈곤, 자살, 이념대결, 의료문제, 교육문제, 부동산가격 폭등, 기록적인 저출산 등은 민주제도의 실현이 사회통합의 해체와 삶의 질 저하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실망과 문제제기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의 길은 없는가? 어떻게 하면 민주정부의 리더십과 문제해결능력을 높여 그 결과로서 집합적 삶의 질을 향상시킬 것인가?

한 사회의 집합적 삶의 양태는 제도, 리더십, 사회적 조건의 3자가 만나고 길항하는 어느 지점에서 결정된다. 이 셋은 각각 매우 중요하며, 동시에 어떤 접합양식을 갖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같은 제도가 어떤 리더십과 조건을 만나느냐에 따라, 또 같은 조건이 어떤 제도와 리더십을 만나느냐에 따라, 같은 리더십이 어떤 조건과 제도에 직면하느냐에 따라 결과로서의 민주주의 현실은 크게 달라진다.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들은 각각 제도, 리더십, 사회적 조건의 어느 부문에서 치료되어야 하는가? 헌법과 제도의 변개 없이도 우리는 과연 반복되는 헌법적 사태와 민주정부의 능력향상을 동시에 해결,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은 1987년 등장한 헌법체제·헌정체제·사회체제, 통칭하여 87년체제의 헌법적 기원과 특징을 추출하고, 고려 가능한 범위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제도적·사회적 대안과 절차, 비전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헌법을 포함한 근본적 제도변개의 시도는 시민참여, 담론형성, 정당정치, 미래비전경쟁을 포괄하는 폭넓은 정치의 과정에 해당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정치 자체의 영역을 비약적으로 확장시킨다. 2004년 이후 일련의 헌법적 결정들은 헌법문제가 성큼 핵심 정치문제이자 사회문제로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헌법문제와 민주주의, 헌법과 삶을더이상 분리해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헌법문제는 곧 정치문제이고, 한국 민주주의는 헌법문제와 정면대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헌법논의의 ‘사회화’와 ‘사회과학화’를 통해 규범과 현실을 연결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2. 87년 헌정체제의 특징

 

헌법문제를 중심으로 볼 때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의 핵심특성은 민주화와 헌법화(constitutionalization)의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운동의 정치와 제도의 정치, 시민사회와 의회의 현저한 단절의 문제이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는 강한 국가와 강한 시민사회의 충돌로 인해 광범한 시민저항이 발생하고 세계 민주화 역사상 희귀하게도 4·19, 부마―광주항쟁, 6월항쟁을 통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권위주의체제 ‘전부’를 운동을 통해 전복하거나 전복의 단초를 마련했다. 민주화의 주체는 명백히 시민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구체제 해체 이후 신체제 건설과정에서는 밑으로부터의 요구가 좁은 정당정치의 채널을 통과하면서 급격히 축소되어 헌법화·제도화되는 정도는 현저히 낮았다. 강력한 운동을 바탕으로 권위주의를 전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화·헌법화의 단계에서는 갑자기 시민참여의 정도와 영역이 소멸된다.

특히 헌법을 포함한 법률과 제도의 형성과 변용에 대한 시민참여는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했다. 일반적으로 민주화 국면에서는 시민사회 주도, 개방적 담론지형, 진보적―변혁적 이념공간, 포괄적 의제, 광장의 열린 정치가 나타나지만 제도화·헌법화 국면에서는 엘리뜨 주도, 폐쇄적 논의구조, 보수적 이념지형, 비포괄적 의제 한정, 탁상협상정치(Round Table Talks Politics)로 인해 정치엘리뜨간의 협소한 제도권협약으로 귀결된다. 한국에서 이런 점은 두 가지의 부정적 현상을 초래했다. 첫째는 민주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헌법화가 민주화의 내용을 충분히 담보하지 못하여 헌법체계와 민주주의가 잦은 충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둘째는 시민요구와 헌법규율, 시민사회와 정당정치,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괴리로 인해 헌법적 안정성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87년 헌법제정의 과정은 시민사회가 참여한 심의(deliberation)의 산물이었다기보다는 좁은 정치사회 내부 엘리뜨들간 탁상정치의 결과였다. 따라서 87년 헌법협약은 체결 싯점부터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탁상정치에 의한 타협은 민주화 이후 반복된 헌법정치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네 수준에 놓여 있다.

첫째로 헌법제정 참가범위의 협애성으로 인해 기존 권위주의 체제하의 정당대표들끼리 헌법협약을 체결하고 게임의 룰을 결정함으로써 ‘구헌법’체제 해체와 ‘신헌법’체제 건설의 주체가 불일치하는 문제가 있었다. 민주주의 ‘제도 쟁취의 주체’와 ‘제도 형성의 주체’가 달랐던 것이다. 즉 권위주의 체제 타도를 위한 운동은 시민사회가 주도했으나, 6·29선언 이후 개헌안이 타결될 때까지 ‘민주헌법제정’ 과정은 온전히 집권당과 반대당 엘리뜨들의 탁상협상으로 넘어갔고 시민사회는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다. 헌법쟁취 국면과 헌법제정 국면의 명백한 분리구획이었다. 이론적으로 이는 민주화와 헌법화, 운동과 제도가 갖는 상반되는 본질에 직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국면의 정치는 다양한 시민단체로 구성된 시민사회가 주도하며, 정치의 성격은 참여적이고 평등적이다. 그러나 운동의 성공 이후 제도화가 진행되는 헌법적 국면(constitutional moment)으로 넘어가면 정치는 조직화한 정당에 의해 주도되며 민주화 국면을 지배했던 연대는 해체된다. 민주적 의제는 헌법적 의제로 현저히 축소되며 따라서 민주주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