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90년대문학 성찰의 좌표를 찾아서

황종연·백지연·하정일의 평론을 중심으로

 

 

김명환 金明煥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영문학. 주요 평론으로 「90년대 문학운동의 새로운 전망」 「새로운 연대를 위한 비평의 열정」 등이 있음. mhkim@mail.skhu.ac.kr

 

 

최근 첫 평론집을 펴낸 황종연·백지연과 두번째 평론집을 엮은 하정일은 모두 90년대 문학의 지형에서 개성적인 목소리를 낸 비평가들이다. 이들은 비평마저 상업주의에 물들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지난 연대의 착잡한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는 일에 적잖이 기여했다. 종종 서로 차이가 나거나 충돌하기까지 하는 비평적 입지들을 점검하는 작업은 오늘의 비평적 쟁점의 소재를 이해함으로써 우리 비평의 좌표를 정확히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1. 진정성의 비평과 리얼리즘 비판

 

황종연(黃鍾淵)은 90년대 우리 문학의 새롭고 다양한 현상들을 면밀하게 주시하면서 그 배면에 깔린 근본적인 흐름을 거시적인 차원의 비평적 안목으로 해명하려는 차분한 자세를 견지해왔다. 첫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에서 그런 특장(特長)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근대세계의 보편성이라는 각도에서 90년대 우리 문학의 실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진지한 성찰이 대목마다 스며들어 있다.

평론집의 제목이기도 한 「비루한 것의 카니발」에서 황종연은 “지난 십년 사이에 성행한 패덕과 불륜의 소설은 한국소설의 어떤 선구적 작품을 상기시키기보다는 언어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문학의 현대적 관행을 연상시킨다”(14면)면서 이를 바흐찐적인 카니발레스크의 전통과 연결시켜 논한다. “모든 서열적 위계, 특권, 규범, 금기를 유예”(같은 곳)시켜 기성질서로부터 해방을 구가한 민중 카니발에서 풍부하게 생성된 ‘위반과 전복의 언어’가 장정일·최인석을 비롯한 90년대의 소설적 성과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황종연은 “광기의 카니발은 부르주아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효과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재건을 돕는 효과가 있다”거나 민중 카니발이 일부 낭만적 민중주의자들의 미화와는 달리 “애초부터 기성 권력 자체가 허용한 헤게모니의 일시적 균열”이라는 정당한 지적을 잊지 않는다(31면).

9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나는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 ‘대안 없는 장난’으로 폄하될 수 없는 이유는 이들 작품에 들어 있는 진정성 때문이다. “진정성은 진정성이 부재한다는 인식 속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행동 속에 존재”(같은 곳)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들 비루한 것의 형상화에는 강렬한 도덕적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황종연 비평을 꿰뚫고 흐르는 핵심을 두 가지만 든다면, 바로 이 문학적 진정성이라는 잣대와 리얼리즘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이 둘은 황종연 비평의 특색인 동시에 그의 비평적 발전을 위해서 좀더 냉철하게 성찰되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진정성’이라는 용어는 90년대 들어와 여러 평론가들이 제가끔 다양한 의미로 사용해왔지만, 황종연 비평에서 이 개념이 으뜸가는 비평적 잣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가령 김영하의 작품 「비상구」를 두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전통 속에서 획득한 장르적 진지성에 대한 계산된 반란”(236면)이라고 파악하면서, 주인공인 양아치 우현이 ‘사랑과 신뢰에 대한 욕구’를 보여주지만 작가는 주인공이 사랑과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가능성을 의심한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 철저한 자세가 진정성의 징표인 것이다. 또 방현석의 단편 「겨울 미포만」을 이념적 당위에 치우쳤다고 비판하면서 “진정성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소설”(274면)이라고 결론짓는 대목도 참고할 만하다.

진정성은 내용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백민석의 「목화밭」을 두고 작품의 목표가 “실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수정하는 것”(256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의 변화, 작품형식이나 기법의 진정성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진정한 삶이란 언제나 부정의 방식으로 추구되는 것이라면, 그 소설적 표현은 당연히 표현의 관습에 대한 도전을 필요로 한다. 진정성의 이상이 소설에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 성찰적 담론이 아니라 자아 갱신과 초월의 충동을 육화한 새로운 형식의 모색인 것이다. 따라서 고정된 주제와 담론을 답습한 소설은 아무리 열심히 진정성을 얘기해도 진정하지 않다. (271면)

 

이런 시각에서 신경숙의 『외딴방』 같은 장편의 성취는 “개인의 진실을 정직하게 추궁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진실에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려는 노력과 불가분의 관계”(같은 곳)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의 개념에는 묵과하기 힘든 모호성이 내장되어 있다. 투철한 객관적 사유가 비평의 기본요건이라고 할진대, 진정성은 그러한 사유의 길라잡이가 될 분석의 도구가 아니라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최종적인 비평적 판단에 관련된 기술(記述)의 용어라고 보아야 옳다. 내 생각에는 진정성의 말뜻 자체가 애당초 그것을 비평의 핵심 잣대로 삼기 어렵게 한다. 우리는 이론과 입장의 차이를 막론하고 문학비평의 텍스트에서 ‘참다운’ ‘진정한’ ‘진지한’ 등의 형용어구를 자주 발견한다. 가령, 황종연이 비판하는 리얼리즘론의 대표자에 속하는 루카치(G. Lukács)의 비평에서도 진정성은 그 비평의 골간을 구성하는 주요개념은 결코 아니지만, 비평적 분석의 결과를 진술하는 과정에서 곧잘 언급된다. 그러나 이때의 진정성은 어디까지나 전형성·총체성 등 그의 비평적 개념들을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구사한 끝에 나오는 것임을 지적해야겠다.          

황종연은 소위 90년대의 ‘신세대 작가’들의 소설적 경향을 무의미하다고 타기(唾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떠받들지도 않는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90년대에 등단했지만 신세대 작가군과 구별되는 독특한 소설세계를 지닌 한창훈을 놓고 “90년대 소설에 서민적 삶의 훈기와 활력을 소생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성과는 뚜렷하다”면서 “소설이 첨단의 풍속을 반영하기에 급급한 혐의가 적지 않은 시대”에 한창훈의 출현을 든든해하는 입장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329면). 그러나 이 과정에서 황종연의 문학적 진정성은 (그가 이해하는 바의) 80년대 리얼리즘문학에 대한 과도한 대타의식으로 인해 협소해지는 것은 아닌가 염려된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작가나 작품들을 보면, 기존의 진부한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돌파하려는 노력이 기법적으로는 다양하고 참신한 성과를 일부 거두었지만, 그것이 아직 낡은 내용을 새롭게 갱신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경우가 많다. 한꺼번에 묶어버리기에는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지만, 장정일·김영하·백민석의 기발하고 대담한 문학적 실험들의 배후에는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내용적 빈약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