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최근 시의 주체에 덧붙여
김나영 金娜詠
문학평론가.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신(新)-자궁에 흐르는 세 혈맥(血脈)」 등이 있음.
1. 시대와 시
2000년대 시에서 아이-화자가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그들이 선조적인 시간관념에 따라 부모나 형제의 뒤에 놓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이-화자는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현실의 논리에 맞서 나름의 위치를 스스로 선정했다. 나아가 이 화자는 가족 구성원처럼 태생적으로 밀접한 거리를 갖는 이들에게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이들로 구성되는 시적 정황에서 사회나 가족은 서사화가 불가능한 집단, 역사가 되지 못하는 역사의 잔여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에듀케이션』(문학과지성사 2012)에 실린 김승일(金昇一)의 시에서 아이-화자에게 가족은 사회적으로 간주된 관계에 불과하다. 실질적으로 보호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어른은 이 아이-화자에게 생략되어 있으며,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만이 막중하게 이 아이-화자의 삶을 구성한다. 사회나 공적인 집단의 방관과 방기를 강조하거나 구체적으로 문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런 역할의 공백을 시의 표면에서 역시 공백으로 비워둠으로써 김승일 시의 아이-화자는 드러나는 발칙함에 더하여 그 자신의 개성을 이루는 ‘다른 사정’이 있음을 암시하는 복잡한 존재다. 김행숙(金杏淑)의 첫 시집(『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에 나타났던 화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시집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화자는 자신의 비-성년으로서의 면모를 의도적으로 과시하면서 거꾸로 성숙함의 기준은 생물학적인 연령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역할이라고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세계의 논리에 저항한다.
문학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분야의 역사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밀란 쿤데라(M. Kundera)의 주장은 시의 주체를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살펴볼 만하다.1 그는 기술과 문학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만약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렌스 스턴이 ‘스토리’가 없는 소설을 쓰리라는 미친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스턴 대신 그것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소설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2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의 역사는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바로 ‘그 생각을 표현하기’를 감행한 개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2000년대 시에서 주목할 만한 주체의 형상이 보여주듯이, 문학의 역사는 사회나 정치적 현실에서의 역사의 의미와 정확하게 맞물려 기록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대의 사건들을 긴급히 수집하고 해석하는 역사적 기록의 방식에 반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의 형식과 내용이 곧장 문학작품 속으로 옮겨오지 않을뿐더러, 문학은 그런 기록과 전달의 방식으로는 사건을 온전하게 재구성하기는커녕 왜곡하고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의 예민하고 예리한 기억에 의존한다. 여기서의 기억은 국가나 사회집단이 주체가 되는, 집단기억과 구별되어야 한다. 개인의 기억은 많은 경우에 집단기억과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해 있다. 때문에 분리된 개인의 기억은 그 자체로 자신이 속한 세계, 국가와 사회의 집단 내에 속하면서도 그곳의 집단적인 인습과 문법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주체화에 대한 의지의 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나눠지지 않는 주체들
최근에 발표된 박상수(朴相守)의 글3이 우선 흥미롭고 의미있게 읽히는 지점 역시 시와 시대를 함께 사유하는 문제틀에 있다. 10년 단위로 시대를 구분하고 그 각각의 시대에 쓰인 작품들의 특징을 몇가지로 통합해보는 시도는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시와 비평을 구별하는 그의 관점이 새로운 해석을 도출할 수 있는 이유는 당대의 중대한 사건들을 기점으로 삼아 시기 구분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세월호참사와 같은 국가적 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일어난 문단 내부의 사건들을 당대의 사건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당대의 시나 비평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대신 그와 같은 여러 현실적인 문제의 정황을 최근 시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에 겹쳐봄으로써 정치·사회 문제로 대변되는 시대적 특수성을 문학작품 속에 드러나는 주체의 변모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참조로 삼는다.
하지만 이 글의 후반부에 이르면 초반부에서 2000년대 시의 주체가 사회와의 길항관계 속에서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를 설명하는 관점이 다소 흐려진다. 이 글의 주된 주장은 “한국시의 흐름이 2000년대의 ‘윤리적 모험’에서 2010년대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변화했”다는(287면)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텐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는 2000년대 시의 경우 김행숙 김승일을, 2010년대 시의 경우 송승언 황인찬 백은선을 예로 든다. 그리고 그들의 시 작품을 시대와의 상관성이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그들 주체의 형상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분석하고 그 변화의 근거를 제시한다. 하지만 동일하게 “2017년의 한국적 현실”(284면)을 언급하며 송승언 황인찬 백은선의 시를 분석할 때와는 달리 안희연(安姬燕)의 시를 언급하는 글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거꾸로 비평적 담론들을 통해서 시의 주체가 갖는 특징을 역설한다. 특히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나’와 ‘세계’를 매개하던 것의 상실을 실감했을 것이라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시인들”에 대한 추측에 더해, “기본적인 삶을 다시 살기 위한 조건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차례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중요한 의무와 책임”이 그 시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비평적 판단을 기준으로 삼아서 “‘시적 주체의 윤리적 모험’이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기울어진 최근 한국시단의 변화”(289면)라는 이 글의 핵심적인 주장에 이르는 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 2010년대 초반(송승언 황인찬 백은선)의 시와 2010년대 중후반(안희연)의 시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과정에서 우선 2010년대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거니와, 전자의 경우에는 개별 작품 분석에서 드러나는 시적 주체의 특징을,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분석에 더해 그 작품에 가해지는 비평적 담론의 양상을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안희연 시에 대한 비평적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에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 스스로 최근 시와 비평이 공유하는 문제점으로 “‘진정성’의 언어를 지나치게 추구한다”고 지적하며 그 과대평가의 근거로 양경언(梁景彦)의 글에서 “이미 가진 기대로 작품을 너무 빨리 구원해내려는 조급함이 느껴진다”(292면)는 점을 들었는데, 안희연 시에 대한 그의 비교적 간단한 분석 역시 “2010년 중반 이후”라는 지평을 당겨옴으로써 어떤 기대와 조급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2010년대 시의 주체는 자신과 세계의 매개가 사라짐을 경험한 세대의 반응을 통해 2000년대 시의 주체와 단절된다는 박상수의 주장으로 돌아가보자. 최근의 시들에서 마주치게 되는 주체는 손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 속에 무력하게 빠져 있는 몸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 주체는 생각이나 마음의 차원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이미 있는 세계와 그것을 살아냄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나의 역학 관계를 흥미롭게 그려 보인다. 2000년대의 발칙한 주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