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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48회

새벽마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첫날은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았더니 열세번을 울리고 끊어졌다. 다음날은 받자마자 통화가 끊어졌다. 딸을 병원에 두고 온 날, 형민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꿈을 꾸다가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꿈속이라서 그 소리가 전화벨 소리인지 자전거 벨 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자전거가 전봇대를 들이받고 나서야 꿈에서 깼고, 형민은 물을 한모금 마신 다음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부재중전화라고 찍힌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민은 박대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너 맞아?” 그러자 상대방이 대답했다. “네.” 그렇게 말을 하고 박대리는 한숨을 쉬었다. 형민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면서 박대리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술에 취하면 박대리는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래서 술이 과한 날은 아랫입술이 빨갛게 부풀곤 했다. 예전에 사귀던 여자친구가 그런 버릇이 있었거든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전 여친이 취하는 게 좋았어요. 그리고 여친과 헤어진 뒤 박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버릇을 흉내 내게 되었다. “술 마셨어?” 한참을 기다린 뒤 형민이 말을 건넸다. 박대리가 조금 마셨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대뜸 자기 아버지 장례식장에 와준 것 고마웠다는 말을 했다. 형민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건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박대리의 아버지는 약수터에 가다가 십대 아이가 몰던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운전을 하던 아이는 새벽에 부모님의 차를 몰래 몰고 나와서 박대리의 아버지를 치고 도망을 가다가 차가 전복되어서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장례식장에 왔고, 박대리의 큰형이 멱살을 잡았다. 그때 형민은 화장실에 갔다가 분향실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멱살을 잡힌 사내가 뒤로 넘어졌고 형민은 사내를 부축해서 식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로비에 사내를 앉혀 놓고 형민은 물을 한잔 가져다주었다. 종이컵을 받아드는 사내의 손이 떨렸다. 물이 출렁거릴 정도로. 전날 밤 내가 화를 냈어요. 성적이 떨어져서요. 아들에게 내가 소리쳤죠. 꼴도 보기 싫다고. 그깟 성적이 뭐라고. 사내는 형민의 얼굴을 보지 않고 허공을 향해 말을 했다. 그래서 형민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장으로 돌아왔다. “그때 사고를 냈던 그 아이요, 이제 스무살이 되었어요.” 박대리가 말했다. “얼마 전에 기사에서 봤는데요, 장애인 농구선수가 되었대요. 그런데요, 큰형하고 둘째형이 의절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제사도 따로 지내요.” 박대리는 어째서 형제들이 갈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재산 싸움, 어머니의 편애. 큰형에 대한 불만.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다가 박대리가 갑자기 토스트 가게나 차려볼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회사 앞에요. 그걸 인수할까봐요. 그러면 차장님은 공짜예요.” 형민은 회사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부장이 아직 사표 수리를 안 한 눈치라고. 돌아와서 해결하라고. “말하지 말라면서요. 혼자만 알고 있으라면서요. 차장님 때문에 늦었어요.” 박대리는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형민의 탓이라며 형민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 탓이다.” 형민이 말했다. “왜 화를 안 내세요? 차장님이 화를 내야 제 마음이 편하죠.” 박대리는 그렇게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형민은 새벽이 될 때까지 거실을 서성였다. 그리고 해가 뜨기 시작하자 집을 나섰다. 병원에 들러 딸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회사로 출근했다.

형민은 점심을 걸렀다. 동료들과 같이 먹기도 싫었고, 붐비는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기도 싫었다. 속이 좋지 않다고 말했더니 동료 중 한명이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꿀물을 사다주었다. 따뜻했다. 형민은 따뜻한 병을 명치에 대보았다. 네시가 지나 형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넘기를 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무실 근처에 있는 공원 쪽으로 걸었다. 공원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두어바퀴 걷다 회사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다 형민은 신장개업이라고 쓰여 있는 국숫집을 발견했다. 오픈 기념으로 미니 돈가스를 준다는 말에 형민은 거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잔치국수를 한그릇 주문했다. 손님은 한명도 없었다. 국수와 돈가스가 나왔다. 형민은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그때 교복을 입은 여고생 세명이 들어왔다. 여고생들은 상하이짬뽕과 새콤비빔면과 국물떡볶이를 시켰다. “새콤, 국떡, 그리고 상하이요.” 종업원이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그 순간 여학생들이 동시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그리고 동시에 여학생들이 웃었다. 깔깔깔. 그렇게 웃었다. 형민도 속으로 흥얼거려보았다.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한참 후에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그러자 여학생들이 또 노래를 불렀다.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여학생들의 노래를 듣자 형민은 목이 메었다. 그래서 면은 먹지 않고 국물만 계속 들이켰다. 평소 같으면 형민은 이 풍경을 기억했다가 딸을 만나면 말해주었을 것이다. 글쎄 지난주에 식당에 갔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못할 것이다. 평범한 장면들. 그걸 딸에게 말할 때마다 형민은 그게 상처가 될 말인지 아닌지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형민은 그게 슬펐다. 그리고 잘해낼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