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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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아하 달

 

 

나는 제왕이다. 알래스카 대설원을 치달리며 얼어붙은 대기를 뒤흔들어 바람을 일구던 바람의 제왕이다. 먼 선조 중 누군가 인간의 올가미에 걸린 뒤 바람만이 살아 숨쉬는 대설원을 떠나왔으나 아직도 내 핏속에는 바람이 피톨로 휘돌고 있다. 바람이 온다. 동쪽 강변의 버들강아지를 흔들어 깨우고, 막 돋아난 새움의 어린 살냄새와 여울 바닥에 납작 엎드린 늙은 쏘가리의 외로움을 담아 골짜기를 타고 오른 바람이 마당 끝 홀로 선 동백 이파리에 닿는다. 매서운 추위에 두툼하게 살이 오른 이파리는 미동도 없다. 헛되이 동백나무 곁을 맴돌던 바람이 홀로 무참하여 은근슬쩍 방향을 튼다. 바람에 실린 늙은 쏘가리의 외로움에서 나는 오갈 데 없는 서글픈 욕정의 냄새를 맡는다. 지난가을 나도 그러했다. 살아 있는 것들은 하나의 시계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때가 되면 발정이 난다. 오갈 데 없는 늙은 쏘가리의 욕정만 서글픈 게 아니다. 때가 되어 아무 데로나 향한 욕정은 더욱 서글프다.

배가 고프다. 태양이 중천에 솟은 지 오래다. 배가 고프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에 감각했다. 감각은 점차 날을 세우다 바람처럼 불시에 잦아든다. 줄에 묶인 나는 다만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에는 여러 자세가 있다. 제발 밥을 달라고 애원하며 기다릴 수도 있고, 기다리지 않는 듯 기다릴 수도 있다. 혹은 기다림을 포기할 수도 있다. 늑대의 핏속에는 기다림의 유전자가 숨어 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설원에서 먹잇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먹을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온몸의 감각에 날을 세워 먹잇감을 향해 돌진해야만 겨우 삶이 유지된다. 차가운 눈밭에 엎드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조상처럼, 나는 어떠한 포즈도 없이, 기다리지 않는 듯, 기다린다.

기다리던 그 대신 낡은 오토바이의 석유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먼저 찾아온다. 잠시 후면 우편배달부가 당도할 것이다. 옆집 똥개가 뒤늦게 냄새를 맡고 악착스레 짖기 시작한다. 집이라야 대문도 울타리도 없이 오종종하게 마주본 오두막 세채.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는 이는 우편배달부나 택배기사뿐이다. 낯을 익힐 법도 하건만 놈은 일단 짖고 본다. 놈 때문에 번번이 한낮의 적요가 흐트러진다. 앙칼지게 짖어대는 놈을 두어차례 죽지 않을 정도로 손봐준 적도 있다. 그래봤자 상처가 낫고 나면 놈의 기억은 떨어진 피딱지처럼 사라지고 만다. 피딱지보다도 못한 놈이다. 나는 짖지 않는다. 이 마을을 찾는 누구든 나로서는 반길 이유도 거부할 이유도 없다. 짖어야 할 다른 어떤 이유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하여 아직 짖지 않았다.

태양이 하늘의 중심을 벗어날 무렵, 문이 열린다. 그다. 아직 취기에 젖어 있다. 짐작했던 바다. 새벽까지 거실의 불만 켜져 있었다. 그런 날 그는 홀로 술을 마신다. 홀로 사는 그는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다. 불면의 밤, 술이 그의 약이다.

고기가 담긴 그릇을 든 채 주인은 정오의 햇살 아래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건 유혹이다. 그 유혹에 여러차례 무릎을 꿇었다. 그때마다 주인은 차디찬 경멸을 보냈다. 스스로 자존심을 꺾은 자에게 경멸은 최악의 벌이다. 술에 취해 하루를 바람처럼 흘려보낸 주인이 죄의식 탓인지 막 구운 삼겹살로 나를 유혹했을 때, 나는 쏜살같이 바람을 가르며 바위 위를 날았다. 앞발을 들고 덤벼드는 나에게 주인은 고기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삼겹살의 기름이 차게 식어 허옇게 굳을 때까지 나는 차마 먹지 못했다. 삼겹살 따위, 먼지로 사라질 때까지 외면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다만 자존심일 뿐, 자존심은 먹고 싶다는 본능을 넘지 못했다. 기름이 엉겨붙은 삼겹살을 꾸역꾸역 삼키며 나는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먼 선조의 슬픔을 이해했다. 올가미에 걸린 그는 몇날 며칠을 굶주렸으리라. 배가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그는 원수가 내민 고기를 나처럼 꾸역꾸역 삼켰을 것이다. 굶주림 앞에서는 슬픔도 무색하다. 슬픔을 이해하면서 나는 먼 선조를 증오했다.

바람에 털이 흩날릴 뿐,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이 무심하게 고기 냄새를 실어나른다. 의지와 상관없이 감각이 고기 냄새를 감지하고, 혀가 구멍을 열어 침을 흘려보낸다. 소리 없이 침을 삼킨다. 그는 나를 시험하고 있다. 내가 욕망 앞에서 의연하기를. 그는 내가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침을 삼키며 견디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착각이다. 그는 자신이 나를 선택했다고 확신한다. 그 역시 착각이다. 내가 그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우리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두달이 채 되지 않은 강아지였으나 내 덩치는 이미 어지간한 애완견보다 컸다. 사람 손만 한, 눈처럼 흰 내 발을 보며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우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나를 어루만지려 했다. 나는 가장 안쪽으로 물러나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 손들을 탐색했다. 강아지일 뿐이었으나 설원을 치달리던 선조의 피가 뜨겁게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느 애완견과 달리 꼬리치지 않는 나를 쉽게 포기했다. 오직 그만이 한시간 넘게 나를 탐색했다. 나는 꿈쩍하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나의 응시를 피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의 응시를 피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케이지 좀 열어주세요.

열린 문 사이로 나는 튀어나왔다. 그 문을 열게 해준 그보다 처음 만나는 세상이 더 흥미로웠으므로 나는 단숨에 그를 지나쳐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내가 뛸 때 방 안의 공기가 뒤섞이며 바람이 일었고 그 바람이 풍성한 내 털을 흩날렸다. 털 사이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온몸의 땀구멍으로 스며들어 땀을 식혔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쾌감이었다. 나는 바람을 만들어 바람을 가르며 발바닥에 땀이 돋을 때까지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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