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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미학에서 감각론으로

 

 

진중권 陳重權

평론가.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저서로 『미학 오디세이』 『춤추는 죽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폭력과 상스러움』 등이 있음. MKYOKO@chollian.net

 

 

아이스테시스(aesthesis)의 역사. 고대 그리스에서 아이스테시스는 이데아 세계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는 지적 직관에 비해서는 인식론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에 아이스테시스는 인간을 죄로 이끄는 쾌락과 결합된 것이라 하여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격하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 미학이라는 학문의 탄생과 더불어 비로소 아이스테시스가 부활하나 이때조차도 아이스테시스는 여전히 추상적 사유, 이성적 판단, 합리적 추론의 아래에 놓인 ‘저급한 인식’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합리주의 에피스테메(episteme) 위에 선 미학은 헤겔에게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거기서 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으로서 개념적 인식의 하위에 배치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6〜95)의 『감각의 논리』(Francis Bacon: La logique de la Sensation, 1981)는 ‘아이스테시스에 대한 이성의 우위’라는 이 수천년 묵은 전통적인 도식을 뒤집는 극적인 반전이라 할 수 있다.

 

 

감각의 존재론

 

들뢰즈에게서 아이스테시스는 이성과 합리성에 선행하여, 그 바탕에서 그것을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어떤 근원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감각의 논리』라는 표현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논리’라는 낱말 때문에 (바로끄와 로꼬꼬 시대의 감각의 부활을 배경으로 탄생한) 바움가르텐(A.G. Baumgarten)의 『아에스테티카』(Aesthetica)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들뢰즈의 감각론은 바움가르텐의 감성론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바움가르텐이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감각을 이성의 아래로 포섭해 그것을 인식론적으로 구원하려 했다면, 들뢰즈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에서 감각을 존재론적으로 복권하려 한다. 들뢰즈에게 ‘감각’(sensation)이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의미의 ‘지각’(percep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각’이 감관을 통해 들어온 것을 정신으로 올릴 때에 발생하는 인식론적 현상이라면, ‘감각’은 그보다 원초적인 것 즉 감관에서 정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몸으로 내려가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들뢰즈에게 감각은 유기체의 몸과 바깥의 환경이 접하는 삼투막에서 진동처럼 발생하는 어떤 유물론적 사건을 가리킨다.

그 사건이란 영미의 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단지 생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감각’이란 곧 세계가 주어지는 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세계가 ‘세계’로서 주어지는 방식, 후썰(E. Husserl)의 표현을 빌리면 ‘사상 자체’가 주어지는 근원적인 사건을 말한다. 들뢰즈의 감각론은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의 영향 아래 그것을 포스트-프로이트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메를로뽕띠는 근대의 주객 이분법에 기초한 데까르뜨적 코기토(Cogito)를 비판하며 거기에 “신체의 코기토”를 대립시킨 바 있다. 그는 주객의 분리를 전제하는 ‘관조’라는 시각적 모델에 근거한 전통적인 지각론의 정학(Statik)을 비판하며, 거기에 ‘살’(chair)이라는 신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촉각적 지각의 동학(Kinetik)을 대립시킨다. 메를로뽕띠의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형상(form)과 질료(matter)라는 고전적인 구분을 지각에 적용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지각하는 주체를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관념의 법칙에 따라 감각적 질료를 ‘해석’하거나 ‘해독’하거나 혹은 ‘질서부여’를 하는 의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게도 되었다. 질료가 형상과 함께 ‘잉태’되는 것이라는 말은 결국 모든 지각은 어떤 지평 안에서 일어나며,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세계’ 속에서 일어난다 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각과 지각의 지평을 ‘문제로 설정’하거나 ‘인식’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행동 속에서’(in action) 경험한다. 결국 지각하는 주관과 세계와의 의사 유기적 관계는 원칙적으로 내재성(immanence)과 초월성(transcendence)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관계다.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옮김, 서광사 1989, 55〜56면)

 

지각 속에는 ‘내재성과 초월성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내가 지각을 하는 순간에는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꽃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의식이 주관적으로 구성해낸 것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그 지각의 내용을 “문제로 설정”하거나 ‘인식’으로 끌어올릴 때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지각 속에서 세계는 아직 실재론과 관념론의 해석을 받지 않은 채로 그냥 주어진다. 그리하여 지각 속에는 관념론과 실재론이라는 근대적 안티노미(antinomy)를 극복할 탈근대의 가능성이 원초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지각과 그 지평을 우리는 “행동 속에서” 체험한다. 하다 못해 시(視)지각도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받아들이는 카메라 오브스큐라(Camera Obscura)가 아니다.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의 안구(眼球)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그렇게 “행동 속에서” 지각된 세계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영상 혹은 르네쌍스의 원근법에 따라 그린 그림처럼 일목요연한 게 아니다. 한 화면에 촛점이 여러 개 있어, 부분과 부분의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는 쎄잔느(P. Cézanne)의 그림처럼 산만하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지각이며, 그렇게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바로 ‘체험된 원근법’(perspective vécu)이다. 움직이지 않는 정신의 눈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육체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쎄잔느의 ‘지각’이다.

메를로뽕띠가 감각을 정신에 앞서 육체와 연관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거기에 ‘지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 메를로뽕띠에게 남아 있는 근대철학의 요소다. 어쨌든 메를로뽕띠가 자신의 지각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쎄잔느를 원용한다면, 들뢰즈는 자신의 감각론을 개진하기 위해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씨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품세계에 의뢰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베이컨의 작품 속에는 종종 바로끄 정물화의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고깃덩어리가 무정형의 형상을 띠고 등장한다. 이 고깃덩어리는 메를로뽕띠가 말하는 ‘신체의 코기토’의 주체로서의 ‘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의 주체는 이 ‘살’을 포스트-프로이트적인 리비도(libido)적 욕망의 ‘힘’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현의 붕괴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5, 이하 인용면수는 이 책을 따름)에는 ‘거울’이라는 사유의 이미지로 구축된 근대의 재현적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깔려 있다. 현대회화에서 구상(=대상성)의 파괴는 오늘날 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현적 인식모델 파괴의 예술적 선취였다. 들뢰즈는 프랜씨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이 재현적 인식모델의 파괴를 본다. 대상성을 파괴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향하는 것, 다른 하나는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6면)이다. 들뢰즈는 이 중 전자와 거리를 둔다. 추상은 “두뇌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정형과 무정형이 섞인 기괴한 순수형상을 통해 구상성(=재현)을 파괴하는 프랜씨스 베이컨에 의뢰한다. 그의 형상은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신경 씨스템에 직접 작용”한다는 것이다.

회화에서도 재현은 필연적으로 서사(=이야기)를 포함한다. 그러나 오늘날 “회화란 재현할 모델도, 재현해주어야 할 스토리도 없다”(6면). 그리하여 회화의 재현성, 즉 회화의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성격을 피하기 위해” 베이컨은 동그라미, 입방체 혹은 트랙을 이용해 그림 속의 형상을 격리시킨다. “재현이란 기실 한 이미지가 보여준다고 여기는 대상과 그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내포”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맺고 있는 관계”도 함축한다. 때문에 그는 이미지를 격리시키려 한다. ‘격리’라는 수법은 “재현과 단절하고 서술을 깨뜨리기 위해, 삽화성을 방해하고 형상을 해방하기 위해, 충분치는 않더라도 필요한 가장 단순한 방법”(7면)이라는 것이다. 물론 베이컨의 작품 속에도 가끔은 한 작품 안에 두 개의 형상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때에도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서사적 연관도 찾을 수 없어, 둘은 너무나 고독해 보인다.

프랜씨스 베이컨은 주관이 바라본 대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시적 사물을 재현하기를 포기한다. 재현을 포기한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감각’ 그 자체이다. 재현을 파괴하는 프랜씨스 베이컨의 작품세계를, 들뢰즈는 동시에 근대의 재현적 인식모델의 파괴로 해석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은 근대미학에서 말하는 ‘지각’과는 그 함의가 전혀 다르다. 즉 ‘지각’이 주객 이원론에 근거한 관념론적 인식론을 전제한다면, ‘감각’이라는 말은 이와는 전혀 다른 유물론적 존재론을 함축한다. 가령 지각의 대상이 추상적 인식을 위해 사상되어야 할 어떤 현상학적 질(qualia)을 말한다면, 감각은 주객의 이분법에 기초한 어떤 인식론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론적 사건이다. 들뢰즈는 말한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어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하여, 하나가 다른 것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 (63면)

 

한마디로 ‘감각’은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가 되는 현상, 메를로뽕띠의 표현을 빌리면 “내재성과 초월성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현상이다. 들뢰즈의 감각은 주객의 이분법에 선행하고, 그 바탕에서 그것을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어떤 원초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감각은 “세상에 있음” 즉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신체

 

프랜씨스 베이컨은 무정형에서 정형으로, 정형에서 무정형으로 이행하는 중에 있는 기괴한 형상, 푸줏간의 살덩어리와 같은 형상을 즐겨 그렸다. 베이컨의 이 기괴한 형상을 들뢰즈는 감각의 주체로서의 신체로 읽는다. “신체는 형상이다. 아니 형상의 물적 재료다.” 근대의 인식론에서 지각을 인식작용과, 그리하여 두뇌와 연결시켰다면, 이렇게 들뢰즈의 감각은 신체와 연결된다. 프랜씨스 베이컨은 종종 몸에서 얼굴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얼굴 없는 머리가 솟아나게 한다. “신체는 형상이기에 얼굴이 아니며 얼굴도 없다.” 그 대신 “형상은 머리를 갖”는다. 들뢰즈에게서 ‘얼굴’을 지우고 그 자리에 (얼굴 없는) 머리가 솟아나게 만드는 것은 곧 ‘데까르뜨적 코기토’를 지우고 그 자리에 신체의 코기토를 솟아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형상에서 인간의 얼굴을 지울 때 그 아래로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분되지 않는 순수감각의 주체, 즉 고기(=살)가 등장한다.

프랜씨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종종 동물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그의 작품 속의 형상은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할 수 없는 영역’”(39면)이다. 여기서 인간은 동물이 된다. 이때의 동물은 “형태로서의 동물이 아니라 특색으로서의 동물”(39면)이며, 그 특색은 “동물적 형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기(氣)로부터 온 것이다.” 프랜씨스 베이컨이 표현하는 인간의 동물되기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태 결합이 아니라 차라리 둘 사이의 공통의 사실이다”(40면). “베이컨은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라고 말한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영역이고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46면). 인간과 동물의 형태의 결합은 샤걀에게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베이컨이 표현한 인간의 동물되기는 “짐승에 대한 연민”도, “인간과 동물의 화해”도, 둘 사이의 ‘닮음’도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동일화며, 모든 감정적인 동화보다도 훨씬 깊은 비구분의 영역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다”(47면).

얼굴이 지워진 머리, 즉 신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은 ‘물리적 기’를 통하여 근원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인식론적 관점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구분’하여 ‘명확히’하는 이성적 사유에 선행하는 어떤 원초적인 존재론적 사건으로서의 감각의 부활을 의미한다. 둘째,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이성’을 근거로 인간을 다른 동물의 위에 올려놓는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을 의미한다. 도살장과 정육점, 그리고 바로끄 시대의 살이 찢어지는 잔인한 고문과 처형 장면에서 묘한 동일성을 보는 들뢰즈는, 데까르뜨를 대신하여 말에게 사죄했던 니체(F.W. Nietzsche)를 연상시킨다. 어떤 인간주의보다 더 인간적인 니체의 반인간주의처럼, 들뢰즈의 반인간중심주의 역시 그 어떤 휴머니즘보다 더 인간적인 미적 에토스(ethos)를 내포하고 있다.

 

 

진에스테지아

 

들뢰즈는 ‘기관이 없는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막 부화하고 있는 달걀의 내부상태에 비유한다. 각 신체부위로 분화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관들의 겹침과 횡단이 존재한다. 감각의 주체로서의 신체는 바로 이 부화중인 달걀과 같다. 물론 우리의 몸은 이미 기관을 갖추고 있으나, 감각을 하는 순간의 우리의 몸은 아직 기관으로 미분화된 상태의 신체이다. 베이컨이 형상에서 ‘얼굴’을 지울 때 이는 이미 각 기관으로 분화를 마친 유기체의 몸에서 그 분화의 흔적을 지우고, 그것을 원초적인 감각의 주체, 즉 ‘기관 없는 신체’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화는 선과 색을 재현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그 눈을 그 유기체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고정되고 규정된 기관의 성격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회화는 우리의 눈을 어디에나 놓는다. 귓속에, 뱃속에, 허파 속에 아무 데나 놓는다(그림은 숨쉰다). (84면)

 

들뢰즈에 따르면 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데에 있다. 이 힘을 그는 “시각이나 청각 등보다 더 깊은 것으로서 리듬”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리듬은 청각적 층리에 투여하면 음악처럼, 시각적 층위에 투여하면 회화처럼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이 “합리적이거나 두뇌적인 것이 아닌, 쎄잔느가 말한 ‘감각의 논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러가지 기관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어떤 원초적 감각(=리듬)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청각과 시각 등 다양한 감각이 나타나는 바탕이 되고, 이 미분화된 리듬 속에서는 “하나의 색, 맛, 촉각, 냄새, 소리, 무게 사이에 (…) 존재론적인 소통”(72면)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프랜씨스 베이컨은 이 “감각들의 일종의 원초적 통일성을 보게 하여주고 복수감각을 가진 형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나게”(73면) 해준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공감각, 즉 진에스테지아(synesthesia)라는 현상이다.

감각을 오감(五感)으로 엄격히 구별하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이 감각들이 서로 섞이는 것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19세기에 들어와 하나의 자극을 동시에 둘 이상의 감각으로 지각하는 공감각이라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이 공감각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령 알파벳에서 색깔을 보는 랭보(J. Rimbaud), 회화에서 음악을 들었던 깐딘스끼(V. Kandinskii), 음악에서 색채를 느꼈던 스끄랴빈(A.N. Skryabin)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통적인 감각론이 감각을 오감으로 엄격히 구별하고 이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내려 했다면, 들뢰즈는 미분화된 ‘기관 없는 신체’에 의해 감지되는 감각의 원초적 통일성으로서의 ‘리듬’ 속에서 감각들의 교차와 횡단을 본다. 들뢰즈에게 “궁극적인 것은 리듬과 감각 사이의 관계”이고,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감각의 논리’다. (하지만 미셸 아르섕보Michel Archimbaud와의 대화에서 베이컨 자신은 이런 들뢰즈의 해석을 거부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회화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데에 있다. 베이컨은 자신의 회화에서 세 가지 근본요소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는 그림의 빈곳을 채우는 물질적인 구조(=아플라), 형상을 고립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동그라미-윤곽, 그리고 세워진 이미지로서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 각각의 요소는 자기 고유의 힘을 갖고 있기에,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을 이 힘들이 만들어내는 벡터(=다이어그램)로 읽는다.

 

보이지 않는 첫번째 힘은 격리의 힘이다. 이 힘은 아플라 속에 들어 있으며 윤곽 주위에서 둥글게 감싸질 때, 그리고 아플라를 형상 주위에 감돌게 할 때 보여진다. 두번째 힘은 변형의 힘으로 형상의 신체와 머리에 침범하여 머리가 얼굴을 뒤흔들거나 신체가 그 유기적 조직을 뒤흔들 때마다 보인다. 세번째는 형상이 지워져 아플라에 합쳐질 때 나타나는 흩뜨리는 힘이다. (98면)

 

베이컨의 회화는 세 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첫번째는 정밀한 형상과 생생하고 판판한 아플라를 대비시킨 시기, 두번째는 회화적 형태를 커튼을 가진 구조적인 배경 위에서 처리하는 시기, 세번째는 생생하고 판판한 배경으로 되돌아오나 부분적으로 줄을 긋거나 솔질을 하여 흐릿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시기이다. 여기에 들뢰즈는 형상 자체가 사라지는 네번째 시기를 덧붙인다. 이 네 시기의 운동을 통시적으로 관찰하면, 거기서 힘의 움직임이 드러난다. 먼저 구조에서 형상으로(아플라가 윤곽을 감싼다), 형상에서 구조로(형상은 수축되거나 팽창된다). 이 운동의 결과, 형상은 윤곽을 거쳐 아플라와 결합하면서 구조 속으로 사라진다. 그림 속의 이 모든 움직임들의 공존, 그것이 바로 리듬이다. (말레비치 역시 회화란 장식이 아니라 ‘리듬 감각의 묘사’라고 한 바 있다.) 이 리듬을 그리는 가운데 회화는 동시에 시간을 묘사하게 된다.

 

 

히스테리

 

프랜씨스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종종 근육위축, 마비, 과민반응, 감각상실 등 전형적인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주는 형상들을 볼 수 있다. 들뢰즈에게 감각이란 삼투압을 하는 식물세포처럼 신경계와 외부 자극 사이에 벌어지는 운동, 양자의 충돌로 발생하는 진동이다. 들뢰즈는 이를 히스테리로 규정한다. “신체는 전적으로 살아 있지만 유기적이지 않다. 따라서 감각이 유기체를 통해 신체를 접하면, 감각은 과도하고 발작적인 모습을 띤다”(75면). 회화는 이 감각을 그리는 것이기에 “회화와 함께 히스테리는 예술이 된다.” 그리고 이는 “화가의 히스테리가 아니라 회화의 히스테리”라고 한다. 그 유명한 베이컨의 「교황 레오 10세」는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모습으로 ‘회화와 히스테리의 관계’를 드러내주고 있다.

“유기체가 아니라 신체에 의거할 때, 감각은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 된다”(76면). 말하자면 감각, 즉 히스테리의 현실은 지각과 달리 재현적 인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말한다. “도처에서 현재함이 신경 씨스템 위에서 직접 작용하고, 재현이 자리를 잡거나 재현을 하도록 할 만한 거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83면). 히스테리 속에서 나는 ‘자기 모습을 보는 착란’을 일으킨다. 가령 “나는 나를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신체 속에서 나를 느끼고, 나는 내가 옷을 입고 있는데도 이 벗은 신체 속에서 나를 본다”(79면). 프랜씨스 베이컨 속에서 신체는 자기의 몸을 이루는 유기체를 빠져나가고, 옷을 입은 형상이 거울이나 화폭 속에서 벌거벗은 자신을 본다.

이렇게 히스테리로서의 감각은 내재성과 초월성의 구별(=주객 이원론)과 거울에 비친 영상(=재현적 인식모델)을 파괴한다. 히스테리로서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현재의 집요함, 즉 “유기체 이후까지 남아 있는 신체의 악착성. 성격이 규정된 기관들의 후에까지도 남아 있는 전이적 기관들의 악착성”(83면)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합리적 사유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회화는 두뇌의 회의주의를 신경의 낙관주의로 전환한다”(84면). 회화는 히스테리다. 그것은 우리 앞에 신체의 현실을 세우고,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선과 색을 세운다. 신체의 순수한 현재함이 보이게 될 때 눈은 이러한 현재함에 걸맞은 기관이 될 것이다. 이때 눈은 더이상 유기적인 기관이기를 그만두고 복수기능적이고 전환적인 기관이 된다. 회화는 바로 이런 눈의 변화, 신체의 변화를 일으킨다.

 

 

눈과 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시각’에서 ‘촉각’으로의 지각모델의 변화, 그리고 두뇌의 관조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중의 ‘신체’에 기입되는 영화의 힘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이와는 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들뢰즈 역시 눈과 손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랜씨스 베이컨은 종종 형상을 솔, 비, 스펀지, 헝겊 등으로 문질러서 생기는 ‘돌발흔적’을 사용한다. 이 흔적들은 “비합리적이고, 비의지적이며, 사고적이고, 자유롭고, 우연에 의한 것”, 즉 회화 속에 도입된 알레아토릭(Aleatorik)의 요소다. 이 혼돈 앞에서 현대회화는 세 가지 길로 나아갔다. 하나는 비의지적인 돌발흔적을 정신적인 시각적 코드로 대체하는 추상회화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액션 페인팅처럼 눈을 손에 종속시키고, 손을 눈에 강요하는 길이다. 베이컨은 추상회화처럼 시각적인 길도 아니고, 액션 페인팅처럼 손적인 길이 아닌 제3의 길, 즉 ‘만지는 눈, 눈의 만지는 시각’이라는 ‘제3의 눈’을 따른다.

들뢰즈에 따르면 회화는 감각을 그린다. 이는 회화가 감각을 ‘재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에게 예술작품의 감상이 작품 속에 발생하는 진리에 ‘참여’하는 데에 있었듯이, 관객으로서의 나는 베이컨의 그림 안에서 감각의 재현을 보는 게 아니라 그 그림 안에 들어가서 그 감각을 느낀다.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된 신체이다.” 회화, 특히 베이컨의 회화는 “감각의 폭력”(67면)을 행사한다. 이 폭력은 재현된 폭력이 아니라 신경씨스템 위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회화는 한갓 ‘형태의 변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폭력을 통해 ‘신체의 변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즉 ‘만지는 눈, 눈의 만지는 시각’, 즉 ‘제3의 눈’을 획득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변형시키기 위한 활동이다.

들뢰즈에게 미학은 더이상 ‘예술의 예술’을 다루는 Aesthetik(미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를 변화시키는 삶의 예술로서의 Aisthetik(감각론)이다. 벤야민이 대중의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영화예술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보았다면, 이렇게 들뢰즈는 대중의 신체를 변화시키는 회화에서 그보다 더 깊은 혁명적 의미를 본다. 근대의 리얼리즘 미학이 의식철학의 에피스테메 위에서 의식과 대상의 이분법을 설정하고, 예술과 세계 사이에 반영의 관계를 상정했다면,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는 근대의 리얼리즘 미학의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사소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는 새로운 유물론적 리얼리즘 미학의 단초가 담겨 있다. 리얼리즘은 새로 정식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리얼리티’에 대한 재(再)정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신의 눈을 통해 의식에 주어진 리얼리티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몸에 주어진 리얼리티가 있을 수 있다. 이 두 리얼리티의 차이를 표상하려면 보통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 속의 세계와 열(熱)감지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하나는 데까르뜨가 말한 연장의 세계, 즉 공간적으로 조화롭게 배열된 씰루엣의 세계이지만, 다른 하나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역동적인 에네르기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