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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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李永光

1967년 경북 의성 출생. 1998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leeglor@hanmail.net

 

 

 

2001—세렝게티, 카불, 淸凉里

 

 

결국, 이번 세기도 전쟁으로 시작한다

어딘가에 惡이 있는 것이다

역 광장의 시계탑과 외양이 사뭇 改新된

오팔팔 입구가

멀건 햇빛에 둥둥 떠 뵈는

역광 속의 이층 까페에서 두 시간을 죽인다

시간이 남아돈다

박사 받고 놀고 있는 조선배에게

나는 오사마 빈 라덴이 의외로

선하게 생겼다고 말했다

한 십년쯤 전에 좆이 부시,라고 쓰던

어느 지방 시인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는 그의 아들이다

욕을 하면 쓰나, 조선배는 웃지만

그의 윤리학이 그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청탁받은 자는 두 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부활하는 뱀파이어처럼 여기

저기에 惡이 있다

惡은 제 스스로의 힘으로 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지진아다, 오우

어떤 ‘무한 공포’(infinite fear)가 우릴 쌔리고 간다는 느낌

 

동물의 왕국을 서서히 지우는 세렝게티의 流砂처럼

雨期를 알리는 사바나의 먹구름처럼

17시 55분, 꿈틀거리는 인파를 내려다보면

껴안았던 알몸이 모두

사랑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만 관심있는 건 아니다

外雪岳의 단풍은 지금쯤 어떨까

태백에서 안동 가는 그 길 십년 전 그대로일까

무자헤딘들이 까라씨니꼬프를 들고

학살의 땅으로 실려간다, 웃는다

삶보다 죽음이 더 熱烈하다

혼자 있는 게 더 행복한 거,

이게 퇴폐지요, 조兄?

제 결함마저도 과장하고 싶어하는 거,

그게 당신의 약점이야

당신 안에는 당신만 있는 게 아냐

그렇다, 나는 늘 내가 나 아닌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내가 고통받는 인간임을 선전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나는 識者이기보다는 거지에 가까웠다

 

한국의 K선수가 월드씨리즈에서 역전 홈런을 맞는 동안

‘神의 제국’ 전폭기들이 카불 전역을 불바다로 만든다

자기 소거의 狂氣라는 점에서는

전쟁과 평화는 한통속이다 불과 한 채널 옆이다

두려움과 동경과 신경증으로서의 淸凉里

내가 군복 입고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게 이곳을 지나가던 그해

그는 호송차에 실려 남으로 갔다고 했다

이번 冬眠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우리가 강자가 되어도 한편일 수 있을까

이제 굶으면 진짜로 배가 고프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공중화장실 문을 두들기는 새벽의 홈리스처럼

生이 절박하다 아니, 이 절박이 진짜일까 이렇게

징징거려도 되는 걸까 이번 생이 진짜 마지막 생일까

깨진 트렁크 같은 소련제 트럭은 고개를 넘어갔다

세렝게티는 죽음 같은 모래의 침묵에 덮였다고 했다

조兄, 죽음 직전은 어떨까요? 나는

약간 떨면서 우물거렸다

도저히 웃을 수 없는 표정으로

더플백 둘러멘 신병들이 역 광장에서 앉아번호 하고 있고

末世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이비 종교 신자들이 지난 세기의 동작으로 춤추고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구한 惡이 있다

엄살하고 發狂하고 댄스하는

이 獵奇,

를 나는 여기서 본다

다른 세상을 비추러 가는 저녁해의 황홀한 광선,

나는 아직 命! 받지 못했으므로

제 자신조차 理解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와

오래 떠나지 않고 있으므로

 

 

 

색깔論

 

 

精靈들이

개나리에서 진달래로, 잠깐 졸다 보면

목련으로 벚꽃으로 배꽃으로

날아갑니다

살리고 피워내는 일은 다채롭습니다

몸과 바퀴에 매여 사람들이

기어다니고 굴러다니는 동안

꽃들은 눈부시게 날아다닙니다

다색이었다가 혼색이었다가 일색이 되어가고

큰 칼을 찬 花王이 여기에 없습니다

서로 물든 各樣各色,

이곳에 없는 색깔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는 동안

또 한수 배우는 동안

서울의 당신이 이사를 망설이던 내각리 산천,

색깔論으로 흥건히 젖었습니다

 

 

 

 

 

매일 門 잘 걸어 잠그고

주머니에 열쇠를 넣어다니는 일 웃기는 일

매일 잘도 門 열면서

캄캄하게 찾아헤매는 생 웃기는 생

문제도 잘 내고 답도 잘 찾는 나날들

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를 쓰고 돌아가 갇히려고

밤늦게 현관문에 다다랐을 때

웃음 싹 가시는 날

어딘가에 열쇠를 잃어버렸기를

간절히 바라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