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운동성 회복으로 혁신하는 창비

올해로 계간 『창작과비평』은 창간 40주년을 맞는다. 연초부터 신문과 방송의 높은 관심과 기대 속에 보도되어 많은 독자분들이 알고 계실 터이나, 본지를 통해 직접 인사드리게 되는 지금 각별한 감회가 앞선다.

1966년 창간된 이래 『창비』는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했고, 이로 인해 7,80년대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다가 급기야 8년 동안이나 강제폐간을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민족문학의 교과서’요 ‘의식화 텍스트’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강력한 파급력을 지녔기에 수난은 자긍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당시 『창비』를 통해 ‘세계관의 혁명’을 겪었다고 회고하는 독자들을 지금도 간혹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면 숙연한 느낌마저 들곤 한다.

90년대 이후 이념적 지형이 변하고 다양한 전문저널이 등장한 상황에서도 『창비』는 문학지와 정론지의 두 역할을 아우르며 총체적으로 사회를 볼 수 있는 지적 자양을 독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애써왔다. 특히 자본주의적 근대가 추동하는 전지구화의 대세에 한민족 및 동아시아인으로서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새로운 담론 개발을 꾸준히 계속해왔다고 자부한다. 분단체제론을 비롯하여, 다시 보는 민족문학론(과 관련된 한민족공동체 문학), 리얼리즘론, 동(북)아시아론,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 등이 그 과정에서 얻어진 결실임을 독자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성과는 다른 신생매체들이 쉽사리 해내기 어려운 심층적 분석과 이론적 천착을 중시한 결과이며 우리 시대를 해석하는 담론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동시에 이것이 『창비』가 ‘너무 어렵다’는 비판을 받게 한 주범이기도 하다. 수록된 글들이 어려워진 것은, 이 시대의 모순구조가 복잡해져서 그만큼 더 복잡한 사고가 요구되는 탓이 크지만, 『창비』의 편집진을 포함한 주요 필자들이 예전과 달리 제도권에 속하게 되면서 직핍한 현실대응력이 떨어진 까닭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한 『창비』는 우리가 시대적 과제에 충실히 부응하고 있는지 자기점검하면서 40주년을 또 한차례 혁신의 계기로 삼기로 결심했다.

혁신의 기본적인 방향은 창간 30주년 당시 내세웠던 대로,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잡지’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창비』는 ‘운동성’ 회복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 운동성이란 일상생활의 타성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일상생활로 돌아가 그 현장에 뿌리내리는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운동의 특성, 곧 힘을 뜻한다. 이미 주류문화의 일부가 되기도 한 『창비』 편집진부터 타성을 떨치고 우리 시대의 요구에 헌신하는 과제 수행에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앞장서려는 것이다.

때마침 무기력증에 빠진 진보적 지식사회의 활로로서 ‘운동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니 이것은 시대의 징후임이 분명하다. 참여정부의 위기가 진보 및 민주주의의 위기로 전화되고 있다는 심각한 진단이 불거지면서, 진보의 의미를 다시 묻고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운동성의 회복이란 저 7,80년대의 민주화운동처럼 제도 밖에서 투쟁하는 방식을 재현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쇄신을 거친 진보세력이 제도 안과 밖의 활동을 연동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진행되는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을 실천하자는 점에서 대부분의 진보담론들과 날카롭게 차별된다. 현재 본격화되는 한반도 특유의 점진적 통일과정에 대해 천착하지 않는 진보담론은 우리의 현실과 괴리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로부터 진정한 대안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바로 이런 상황인식에서 『창비』의 자기쇄신은 출발한다.

이같은 쇄신은 당연히 계간지 지면에 반영되어야 한다. 일차적으로 운동성을 담은 새로운 글쓰기로 구체화될 것이다. 딱히 『창비』에 실린 글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지만, 요즘의 인문·사회과학적 글쓰기는 전문용어나 이론에 기대는 경향이 짙어 현실과 동떨어진 공론(空論)이 되기 일쑤이며, 설혹 현실에 대해 유효한 발언을 하더라도 특별한 지적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곤 한다. 이런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올해부터 『창비』는 현실문제에 밀착해 날카롭게 비평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논쟁적 글쓰기의 모범을 보이도록 힘쓸 것이다. 이 일이야말로 문학적 상상력과 현장의 실천경험 및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의 결합을 꾀하는 『창비』가 남달리 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런만큼 앞장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절감한다.

또한 올봄부터 온라인상으로 잡지의 일본어판을, 그리고 내년부터는 중국어판을 차례로 간행할 예정이다. 한류를 비롯해 대중문화의 상호교류는 활발하지만 비판적 담론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 특히 한국이 발신한 담론이 교류될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 동아시아에서 이 사업은 뜻깊은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로써 일찍이 동아시아 담론을 주도해온 『창비』가 동아시아의 공공성 확대에 관여할 거점이 확보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 논의를 보편적 시각에서 다시 보는 지적 훈련의 소중한 경험도 쌓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호부터 잡지의 디자인도 새롭게 선보인다. 창간 30주년을 맞아 표지를 바꾼 데 이어 10년 만이다. 그간 표지 상단을 차지해온 묵직한 한 줄짜리 제호가 좀더 입체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뀐다. 종합지 『창비』가 지닌 ‘창작＋비평’ 또는 ‘문학지＋정론지’라는 본래의 성격을 현대적인 이미지로 강조한 것이다. 본문도 독자들이 한층 시원하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내부 디자인을 재조정하였다. 그밖에 논쟁적이고 생동하는 읽을거리를 강화하기 위해 ‘도전인터뷰’ ‘논단과 현장’ 같은 꼭지를 신설하는 등 지면구성도 크게 바꾸었다.

‘운동성 회복’을 표방한 이번 봄호의 특집은 ‘6·15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본지가 ‘6·15시대’를 중시하는 것은, 획기적 통일방안에 합의한 6·15공동선언과 더불어 한반도식의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이 진행되는 ‘통일시대’로 진입했다는 시대인식과 이 시대적 특성에 부합한 총체적 개혁의 실천의지를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물론 독자들은 이 작업이 『창비』의 ‘한결같은’ 이론모색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잘 아실 것이다. 민족문제에 줄곧 천착해온 우리는 분단체제론을 제기해, 통일이 단순한 분단극복 즉 아무런 통일이어서는 안되고, 분단체제극복에 해당하는 통일 즉 남북민중의 생활주도력을 극대화하는 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작년에는 한국사회의 개혁과제를 분단체제극복과 결합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87년체제론’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6·15시대를 맞아 추진되는 총체적 개혁운동이 ‘동아시아 평화 구축’에 핵심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동아시아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런데 이 특집을 꾸미는 현재의 남북과 미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그리 밝지 않아 6·15시대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미국이 인권문제·위폐문제 등으로 북을 압박하고 있어 6자회담 후속협상의 전망을 어둡게 할 뿐만 아니라, 올해 1월 한미전략대화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 앞으로 대북한·대중국 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에 부정적 여파를 미치리라 우려하는 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특집의 개별 글들이 지적하듯이, 점진적 통합의 과정은 한국의 대안적 발전전략 수립은 물론이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민족 구성원의 일상세계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믿는다.

특집은 6·15시대의 의미를 다각도에서 접근한 다섯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격인 글에서 서동만은 6·15정상회담 이후 남북측 모두에서 인식상 큰 변화가 있음에 주목하여 6·15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날카롭게 읽어낸다. 그는 남한의 진보진영에는 한편으로 ‘통일지상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사회를 ‘자족적으로 완성된 사회’로 보고 통일문제를 제쳐둔 채 평화와 민주주의 실현을 주창하는 견해가 존재하는 등 인식상의 ‘후퇴’마저 보인다고 비판하면서, 남북이 협력하여 각각의 개혁과 발전을 실천하기 위해 평화—복지—개발을 연계한 남북협력발전 구상을 구체화하는 것이 이 시대 진보의 핵심과제임을 역설한다. 그의 주장을 경제영역에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전병유의 글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심각한 현안으로 느끼는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야말로 북한이라는 ‘위기와 기회의 요인’을 고려한 새로운 발전모델 없이는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한반도 단일경제권, 동아시아 분업관계 및 네트워크형 전략적 투자의 관점을 결합시킨 발전전략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두 편의 글이 정책적 논의에 해당한다면, 남북이 하나의 단위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여성문제, 그리고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각에서 다시 묻는 김엘리와 현무암의 글은 통일의 보편적 가치를 성찰하게 만든다. 전자는 남북교류사업에 참여한 남측 여성활동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이’를 인정하는 연대의 길을 모색하는 글이다. 이 글은 군사주의 같은 민족의 부정적 동질성을 극복하려는 여성주의 의식 없이는 탈분단운동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데, 이 점은 바로 본지가 제기한 분단체제극복운동의 문제의식과 통하는 것이다. 후자는 한반도 본국과 재외동포의 관계를 통해 통일과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의 바람직한 상을 제시하는 글이다. ‘자이니찌(在日코리안)’의 실천경험에 근거해 남북의 통합이 단일한 국민국가가 아닌 복합국가를 지향한다면 아이덴티티의 다수성과 유연성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이 글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들의 글은 6·15선언이 여성과 재외동포의 미시적 생활세계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향을 미친 흔적을 보여줘 흥미롭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6·15시대의 보편적 의의를 한반도·동(북)아시아·세계라는 세 차원의 상호연관 속에 추출해낸 유재건의 글에서 한층 더 심화된다. 그는 한반도의 통일이 동아시아 지역협력을 촉진하고 나아가 지정학적 분열에 기반한 세계적 차원의 억압체제에 일대 타격을 가함으로써 민중적이고 세계사적인 작업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진보진영의 담론들이 가진 문제점을 짚어나가는 논쟁적 서술로 엮인 그의 글은 독자가 쟁점을 한층 더 명확하게 파악하도록 돕는다.

창간 4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호를 단연 돋보이게 하는 것은 국내외 주요 잡지의 편집자 열한 분이 보내온 축하와 제언이다. 의례적 덕담이 아닌 진정성을 담은 감회와 고언 모두 값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창비』가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 네트워크 구축의 핵심고리가 되겠다는 약속으로 그 고마운 뜻에 부응하고자 한다.

이번호부터 새롭게 시도하는 ‘도전인터뷰’에도 주목해주시길 고대한다. 그 첫회로 평론가 황종연이 본지 편집인 백낙청에게 한국문학의 이론적·실천적 과제들에 관한 입장을 캐묻는 자리를 갖는다. 문학의 창조성을 시대의 중심과제로 내세우고 한국문학에서 보람을 찾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의 참모습은 물론이고 두 평론가간에 펼쳐진 생생한 토론의 현장이 자못 흥미롭다. 우리 시대의 쟁점을 만드는 인사를 대상으로 이 난은 이어질 것이다.

또 하나 신설된 ‘논단과 현장’은 시사성 강한 인문사회 비평문으로 꾸밀 것인데, 이번호에는 곧 방조제가 완공될 절박한 처지에 놓인 새만금과 행정중심복합도시 사업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결합시켜 한반도를 희망의 땅으로 만들자는 건축가 김석철의 간곡한 제안, 그리고 한·중·일이 함께 만든 동아시아 3국의 공동역사서 『미래를 여는 역사』를 사학사적 관점에서 독해하여 국경을 넘는 대화의 실마리를 만들려는 나리따 류우이찌의 진지한 시도가 실려 있다.

문학분야를 한층 더 강화하자는 것이 창간 40주년을 맞은 본지의 방침이다. 그래서 젊은 문학평론가 이장욱 진정석 두 분을 올초부터 상임편집위원으로 영입해 내부역량을 강화했다. 새 방향에 걸맞게 이번호 창작란이 화려하다. 시에서는 원로 김규동 시인에서부터 신예 이근화 시인에 이르기까지 노장청의 진용이 고르면서도 저마다의 개성이 빛나는 시세계가 펼쳐진다. 소설란 역시 원로 박완서 선생을 필두로 우리 문단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견 소설가들의 원숙한 작품으로 채워졌다. 본지에 연재되어 한층 더 화제를 불러일으킨 박민규의 장편은 이번호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작가의 노고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비주류 하위문화’의 정신으로 충만한 황병승의 시세계를 분석한 황현산, 미국의 대표적 현대작가 폴 오스터의 작품이 우리 사회에서도 유행하는 현상을 치밀하게 분석한 유정완의 평문과 올 한해 시·소설 계간평을 맡아서 수고해주실 엄경희 정홍수의 비평이 어울려 문학평론도 짜임새있게 구성되었다. 그밖에 고정필자로 일년간 자리를 지켜주실 김기택 박명규 홍성욱을 포함한 열 분의 글이 촌평란을 알차게 만들어주었다.

이번호에는 작품들의 기량이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은 『제4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품집』과 더불어, 지난 40년 동안 『창비』와 함께해주신 필자 및 독자 여러분께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25인 시인들의 육성을 담은 낭송시집 「언어의 촛불들이 피어날 때」를 특별부록으로 묶었다.

끝으로, 올초부터 주간직에 임한 이 글의 필자를 비롯한 편집진 전체는 40년이란 역사의 무게를 추동력으로 삼아 시대의 소명에 부응하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간단없이 노력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러한 약속이 얼마나 잘 이행되는지를 국내의 독자는 물론이고 이제부터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독자들까지 지켜보게 될 터이므로 배전의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다.

白永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