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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朴正大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등이 있음. sugarlessciga@hanmail.net
그럼 이만 총총
우리의 사랑은 투쟁 영역의 확장이었으니 이제는 싸움에도 지쳤어라
낡은 태양 아래서 꿈꾸는 것들의 눈동자는 서서히 흐려지고 눈이 되지 못하는 빗방울들 진눈깨비로 흩날리는 어슴푸레한 겨울 오후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허밍으로나 중얼거리며 나 이제 쿠바의 환한 거리로 떠난다
그러니 이젠 이곳의 혁명이 나를 불러도 돌아볼 눈이 나는 없어라 애초에 혁명이 없었으니 나를 불러줄 혁명 또한 없어라
이곳에서는 더이상 복제할 유전자가 없어라
나는 반지 속에서만 반짝이는 나의 별을 보며 이 어두운 거리를 다 지나가련다
그럼 이만 총총
하늘 아래에서의 모든 투쟁이 슬픈 사랑의 확장이었으니 지금 이 세계의 지붕을 다 부수며 내리는 저, 저녁의 환한 눈발을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라
그대가 없는 곳으로부터 오는 저녁을 나는 견딜 수가 없어라
마음의 한켠, 램프의 심지를 돋우면 불꽃의 바깥으로 밀려오는 어둠
때로 생은 깊고 생이 깊은 날 저녁은 눈발을 몰고 잃어버린 사랑을 적시며 너무 일찍 와서 내 딱딱한 어깨를 두드리나니
너무 일찍 오는 어떤 저녁을 이제 나는 견딜 수가 없어라
그러니 이만 총총
체 게바라 만세
그대는 갸륵한 내 노동의
솔리튀드 광장이었나니
미래는 내가 당도할 그대, 추억은 그대가 떠난 나
그러나 지금은 노동의 밤이에요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그대가 남겨두고 떠난 밤은 별들의 거대한 광장이어서 나는 별빛 가득한 폐허의 땅에 남아 담배를 한 대 꼬나물고 안녕, 그대를 향해 대포동 미사일 같은 한 방의 안부를 날려요
상념의 물탱크 가득한 밤, 나는 물탱크 곁을 서성이며 밤의 광장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별똥별들의 추억을 기록해요
솔리튀드한 노동의 밤,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이런 밤이면 나는 그대 추억의 환한 거리를 생각해요
낡은 LP를 듣는 노동의 밤이에요
턴테이블 위의 LP가 자전할 때마다 밤이 오고 대낮이 오고 또 밤이 와서 나는 오래된 세고비아 기타줄 위에 추억의 빨래를 널어요
누군가는 미래를 노동하고 누군가는 현재를 노동하지만 나는 추억만을 노동해요
그대만을 노동해요
솔리튀드한 노동의 밤,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이런 밤이면 나는 그대 추억의 환한 거리를 생각해요
그대로부터 밤이 오고 밤으로부터 生이 와서 실내화를 신은 유령이 고요히 석유 등잔을 밝히는 저녁이에요
석유 등잔의 불꽃이 밝히는 검은 밤, 이럴 때 눈이라도 내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도 함박눈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날씨는 창밖에 있어요
지금 창문을 열면 펑, 펑, 펑, 함박눈 내리겠지만 나는 아직 창문을 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어둠뿐인 칠레의 모든 기록을 읽어요
양은냄비 속의 라면은 혁명처럼 끓어오르는데 잘 익은 혁명을 후루룩후루룩 목구멍으로 삼키면 내 심장의 겨울은 조금이라도 뜨거워지나요
솔리튀드한 노동의 밤,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이런 밤이면 나는 그대 추억의 환한 거리를 생각해요
바람에 펄럭이는 낡은 문서보관소 같은 밤, 국경을 넘어온 바람들이 내 창문으로 불어오면 나는 내 마음의 안쪽에서 그대 쪽으로의 환한 망명을 꿈꾸어요
내 마음의 밤에 새겨진 별을 얼마나 오래 문질러야 그대에게 당도할 수 있나요
밤새 나의 타자기는 그대에게로 가는 계단을 만들지 못하고 나의 기타 소리는 그대의 영혼에 가닿지 못하는데 얼마를 더 걸어가야 나의 불면은 불멸에 당도할 수 있나요
그런데 도대체가 솔리튀드한 밤이에요,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불멸을 향해 고드름처럼 차가운 수염들이 돋아나요
그래서 창문을 조금 열고 담배를 피워요
담배를 피우다 손가락으로 수염을 만지면 그 숲에서 놀라 깨어난 호랑이들이 꿈의 언덕을 넘어 달아나요
내가 듣던 낡은 LP의 음악을 물고 호랑이들은 날씨 속으로 달아나요
하지만 날씨는 창밖에 있어요
그래서 나는 날씨 속으로 흩어진 음악을 따라가지 않아요
나의 방에는 세고비아 기타가 있고 기타줄 위에서는 추억의 빨래들이 말라가요
여섯 개의 줄 위로는 여섯 개의 계절이 지나가요
여섯 개의 팽팽한 生이 지나가요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아마 일곱번째 줄 위에서 또다시 生을 시작할 테지만 기타줄 위에서는 여전히 추억의 빨래들이 말라가요
솔리튀드한 노동의 밤,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이런 밤이면 나는 그대 추억의 환한 거리를 생각해요
낡은 LP가 여전히 자전하는 노동의 깊은 밤이에요
그대는 나의 스웨터, 나는 그대를 입고 이 추운 밤을 다 건너가요
스웨터의 올이 다 풀릴 때까지 이 추운 밤이 꽃피는 봄에 당도할 때까지 나는 추억의 뿌리만을 노동해요
그대만을 노동해요
하지만 날씨는 창밖에 있어요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과 세계의 날씨는 창밖에 있어요
내 노동 속의 그대, 듣고 있나요
검고 딱딱한 빵을 씹으며 내가 부르는 노래, 이 겨울밤의 어둠을 가로질러 그대에게로 달려가는 나의 발자국 소리
내 노동 속의 그대, 여전히 듣고 있나요
그대가 남겨두고 떠난 밤의 광장에서 내 고독의 별똥별들 밤새 솔리튀드, 솔리튀드, 소리치며 눈부시게 生의 광장으로 몰려가는 소리
내 노동 속의 그대, 여전히 환하게 듣고 있나요
낡은 LP가 자전하는 밤은 깊고 깊어서 이제사 창문을 열면 환하게 들려오는 함박눈의 기침소리, 내 창문의 국경으로 밀려오는 저 눈꽃들의 함성소리
나는 生을 노동해요
그대만을 노동해요
솔리튀드한 노동의 밤,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이런 밤이면 나는 그대 추억의 환한 거리를 생각해요
내 낡은 LP가 돌고 돌아 당도한 세상의 끝 아주 깊은 노동의 밤이에요
꽃피는 우리들의 날씨가 방 안으로 마구마구 밀려오는 환한 밤이에요
그런데도 도대체가 솔리튀드한 밤이에요, 아주 궁극적으로 솔리튀드해지는 밤이에요
누군가는 미래를 노동하고 누군가는 현재를 노동하지만 나는 추억만을 노동해요
生의 뿌리만을 노동해요
그대만을 노동해요
그래서 지금 여기는 바야흐로 내가 당도한 그대, 그러나 저기는 아직도 내가 걸어가야 할 그대
어쩌면 그대는 갸륵한 내 노동의 솔리튀드 광장이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