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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완전소중 시코쿠

번역의 관점에서 본 황병승의 시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저서로 『얼굴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등이 있음. septuor@hanafos.com

 

 

지난해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유형진의 『피터래빗 저격사건』,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김이듬의 『별 모양의 얼룩』, 김근의 『뱀소년의 외출』 등 색다른 형식과 기운을 지닌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꼬리를 물고 출간될 무렵, 한 일간지의 문학담당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들 ‘엽기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나를 이런 야릇한 시들의 지속적인 옹호자로 여기고 있었고, 나는 그 기대에 맞추어 짧게 대답했다. 오랫동안 우리 시를 지탱해온 힘은 자연에 대한 농경사회적 정서와 모더니즘으로 훈련된 문화적 감수성이었다, 90년대 이후 강력하고 날카로운 정치적 내용을 담은 시들이 퇴조한 자리에 맨 먼저 드러난 것이 전자의 허구성과 후자의 추상성이었다,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들은 이 두 문화의 틈새에서 자라온 서울의 하위문화와 지방도시의 반지방문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들 시가 발휘하는 강렬한 힘은 모든 종류의 하층문화가 지니고 있는 사실성과 직접성에서 기인한다. 나는 이 대답 끝에 “시라는 것이 다 그렇지요”라고 덧붙이기도 했는데, 뒤늦게 생각해보면 이 말에는 ‘엽기시’라는 명명에 항의하자는 겉뜻과 내 주장의 강도를 낮추자는 속뜻 외에도 시의 존재방식과 윤리에 대한 풀기 어려운 질문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을 말한다면 이 의견 자체를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들 여러 시집의 힘과 그 방향을 심도있으면서도 집약적으로 표현한 황병승(黃炳承)의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의 해설에서 이장욱(李章旭)은 이미 이 시집이 “비주류 하위문화의 정신으로 충만해”1 있음을 명백하게 지적했으며, 이 문화와 다른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는 시인이자 시 비평가인 송승환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암시받은 바가 크다. 그래서 내 몫으로 남게 되는 것은 시의 존재방식과 윤리에 대해 혼자 품었던 질문 정도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일반론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 비주류문화가 시의 형식을 빌려 주류문화를 압박하고 그와 소통을 꾀하는 양상을 고찰하여 이 문제를 둘러싼 구체적인 성찰의 한 실마리를 붙잡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하류문화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는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를 번역론의 관점에서 읽으려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선 시집 속의 게이 시코쿠와 그의 친구들이 속한 문화는 그 자체를 위해서도 주류문화를 위해서도 일종의 번역과정을 거쳐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김현미(金賢美)는 저서 『글로벌시대의 문화번역』(또 하나의 문화 2005)에서 문화번역의 개념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좋은 모범을 보여준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과 그 인근도시에만 해도 여러 외국의 이주민들과 탈북자들이 30개가 넘는 이산마을에 흩어져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거나 새롭게 만들어가며 살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문화체계 안에 다양하게 들어와 있는 이질적인 삶을 바르게 해석하고 성찰하기 위한 문화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대치하는 일반적인 ‘번역’과는 다른 것으로, 타자의 언어, 행동양식, 가치관 등에 내재화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여 ‘맥락’에 맞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번역행위가 항상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행위의 시공간적 맥락과 번역자의 성향에 따라 “두 문화적 행위자간의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위계적인 관계를 고착시키기도 한다.”(48면) 시코쿠들의 문화는 이산마을에 자리잡은 이주민들의 그것이 아니지만 주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타자적 성격은 동일하며, 그 내재적 의미를 파악하여 관계 맥락을 설정해야 할 필요성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것이라면 이 문화와 관련해서는 아마도 관계 맥락의 설정이 끝없이 천연(遷延)되거나, 경계 짓기와 맥락 세우기가 고의적이건 아니건 혼동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동성애자들과 가출청소년들과 자폐증을 연기하는 자들의 문화이며, 가정과 학교와 사회질서에 반항하고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을 거부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이 문화를 통틀어 지극히 당연한 듯이 언더그라운드 문화라고 부를 때, 이 명명은 거기에 일정한 자리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내재하는 문화적 가치를 제한하고 그것이 주류사회에 미칠 영향을 방어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이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명명에서 하나의 해방구를 발견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도롱뇽의 잘린 꼬리 이상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 수는 없다. 번역은 항구적인 잠정상태에 놓이고, 두 문화는 번역의 유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을 공유한다. 이때 주류사회는 방탕한 아들이 언젠가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오게 될 길을 섣부른 문화번역으로 영원히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으며, 시코쿠와 그의 친구들은 “늙은 마초들”(「핑크트라이앵글배(盃) 소년부체스경기입문(入門)」)의 오역이나, 기껏해야 “아줌마 아저씨들”(「세븐틴」)의 나쁜 번역을 일단 면할 수 있다.

시코쿠의 친구들은 번역을 거부한다. 「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sauce」의 화자가

 

이쪽으로 가면 석달 열흘 춤만 추는 광대 원숭이가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밤낮 겨울 봄 슬픔을 길어올리는 울보 토끼가 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나뭇등걸에 서서 체셔 고양이가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었다

 

고 말하면서 자신의 도정에 대한 진지한 선택을 포기할 때, 이는 번역과 문화해석에 뒤따라오게 될 재난, 곧 주류사회의 가치이념에 따른 강제적 줄 세우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븐틴」의 악동은 나쁜 번역의 비밀을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결국 모두 한 이웃이라고 아줌마 아저씨들 입을 모았지만

우리는 오를 살해하고 구체적으로 타지(他地) 사람이 되어갔어

 

원본에 해당하는 한 사안이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두루뭉술하게 번역될 때, 원본의 구체성은 상실된다. “모두 한 이웃”은 모든 말을 낯익은 말로 반죽해버리는 방식으로 원문을 왜곡한 결과일 뿐이다. 시코쿠의 연합세력은 자기들의 언어를 오해되는 모국어로 바꾸기보다 이해되지 않은 타지 사람의 언어로 남겨두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에서 뽑은 다음과 같은 한 절은 타지 사람의 언어를 끝내 지키지 못하고 자기 번역을 통해 주류문화에 항복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다.

 

다른 밴드들 역시 우리와 같은 순간의 낭패감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들은 갑자기 너무 어른스러워지거나 터무니없이 유식해지거나…… 더이상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도무지 엉터리 라라라에 열정을 허비하고 있어, 밍따오들

 

그러나 이 시집 전체에서 시코쿠들은 자기들의 시도와 열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번역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다. 같은 시에 다음과 같은 절도 들어 있다.

 

작년 겨울의 일이었네 우리는 그뒤로 두번 다시 그때의 감정으로 연주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면 너희는 오우, 약간 과장된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지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야 항상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이미 경험해버린 우스스한 감정들(그것은 우스스했다, 우스스,라고밖에는……)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고 그것은 인격의 성장이나 혹은 변태적인 행위에의 몰입과는 또다른 어떤 것이었네

 

“인격의 성장”과 “변태적인 행위에의 몰입”은 기성문화가 이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열정을 대상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번역의 거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정작 번역되어야 할 것은 “또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작년 겨울”의 연주와 “그때의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본질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하류이면서 소수자인 시코쿠들이 강조하는 자기들 문화의 독립성과 고의적 소외는 ‘시는 번역될 수 없다’는 식의 번역 불가능론과 맥을 같이한다. 이장욱이 이 시집을 가리켜 매우 날카롭게 상징과 비유를 통한 “무한 전쟁의 연대기”라고 한 것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장욱의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들은 완강한 ‘광장’의 세계를 표상하느라 바쁘다. 그것들은 언어질서의 체계 안에 갇힌 채 앙상하다. 그 언어적 질서와 위계와 완강한 주류이데올로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친 듯이 질주하는 상징적 드라마에 몸을 담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이 기이한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상징과 비유 들은, 그것들 없이는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언어의 딜레마를 그 자체로써 현시한다.”(이장욱, 같은 글, 184면) 이 언어의 딜레마는 곧장 번역의 딜레마로 통한다. 번역의 대상이 텍스트이건 문화이건 번역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또다른 어떤 것”이지만 번역이 요구되는 지점도 바로 이 ‘어떤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어떤 것’은 한 문화의 맥락과 모국어의 육질 속에서 아우라를 지니지만, 그만큼 그 맥락과 육질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사실이며, 그것을 다른 언어로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일이다. 이 해방이 없다면 ‘어떤 것’이 생산하는 것은 ‘접경지대의 히스테리’(김현미, 같은 곳)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황병승의 시집은 이 히스테리에 해당할 만한 것들을 가득 담고 있다. 이장욱이 잘 정리한 것처럼 서사적 골격과 내용을 지닌 시들 속의 잔혹극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잔혹극들의 잔혹감은 일종의 휘발성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주변문화를 주류적 장르의 시로 밀어올리는 황병승에게 이 잔혹극은 히스테리의 표현이 아니라 히스테리의 번역,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번역이기 때문이다.

문화적이거나 언어적인 접경지대의 위기에서 성립하는 황병승의 시는 많은 경우 번역 또는 의사(擬似)번역의 형식을 드러낸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시코쿠나 다카하시 미츠나 리타나 렌 같은 이름으로만 불리는 ‘타지’사람들의 말을 우리가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번역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텐데, 실제로도 번역을 가장하여 개입하는 시구들이 시집의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이를테면, 「프랑스 이모」에서 젊은 조카를 자신의 옛 애인 쟝이라고 여기고 단추를 해바라기 씨라고 믿는 ‘이모’의 사랑노래가 있다.

 

십이월의 프랑스엔 붉은 비만 내린다네

그대를 기다리던 흰 원피스가 붉게 물들었다고

세느 강의 아홉번째 다리 아래

출렁이며 흐르는 검은 문장(文章)들이 내게 일러주었네

 

십이월의 프랑스엔 붉은 비만 내리고

먼 나라에 버려진 늙은 여자의 침실이 다 젖었다고

호주머니 속의 차가운 백동전들이 말해주었네

 

이것은 조작된 번역시 또는 번역가사이다. 여기서 가짜 번역시 하나를 구성해내는 황병승의 기술은 어조와 동사 어미의 선택에서부터 ‘문장’같은 낱말에 한자를 병치하는 재치에 이르기까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다. 그는 번역된 시가 운명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결함과 거기서 비롯하는 낯선 매혹 양쪽을 모두 감쪽같이 재현하고 있다. 선율의 측면에서, 첫 연의 3행과 4행은 길이 조정에 실패한 절름발이 시구들이며, 둘째 연 마지막 시구를 시작하는 여섯 음절의 “호주머니 속의”는 노래하기에도 읽기에도 불편하다. 그러나 가상의 원문이 지녔을 8음절이나 10음절의 애잔한 선율에 대한 아쉬움이 이 결함과 불편함 위에 겹쳐 ‘번역시’의 리듬 전체에 깨어졌다 수선된 도자기의 그것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의미의 측면에서, 프랑스의 빠리에서 붉은 비를 맞는 것은 남자인데 왜 먼 나라에서 그를 기다리는 여자의 원피스가 붉게 물들고 그 침실이 비에 젖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이 시가 원문이라면 이 질문은 비난이나 해석의 차원으로 넘어가겠지만, 조작된 역문이라도 역문에서의 질문은 영원히 질문 그 자체로 남아 이해되지는 않지만 믿어야 하는 텍스트의 권력을 얻어낸다. 통사법의 측면에서 본다면, 서양 언어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동사를 목적어 뒤에 놓아야 하는 한국어에서, 더구나 시에서, “일러주었네” “말해주었네”라는 짧은 전달사 앞에 한 행 전체, 또는 두 행 전체에 달하는 긴 전달의 내용을 배치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번역시에서는 이 어색함도 권력이 될 수 있다. 번역이 강제하는 이 통사구조와 언어적 편차가 원문에서라면 그 모국어적 직관 내지 성찰의 부재로 가볍게 넘겼을 의미 내용을 주목해서 따지게도 하고, “차가운 백동전”같은 말이 불러오는 감각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결함이나 매혹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번역을 핑계삼아서만 이런 음조, 이런 정서, 이런 통사구조를 지닌 시가 한국어로 창안될 수 있고, 한국 시어의 역사에 끼여들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시코쿠의 문화가 한국의 주류 시를 압박하고 거기에서 제자리를 모색하기 위해 번역 또는 의사번역을 가장 효과적인 통로로 삼는다는 것이다.

「후지산으로 간 사람들」은 번역시가 아니며 번역을 가장하지도 않지만 시인의 이름이 감춰진다면 번역시로 오인하기에 십상일 뿐만 아니라 번역시로 여길 때 여러 난점이 해소될 수도 있는 시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자,라고 불렀고

다카하시 미츠는 얼마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

 

늘 한곳으로 몰려다니며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서로에게 고함치는 사람들

햇빛 때문에 예민해지는 사람들,

 

그때도 싸웠고 어제도 싸웠다…… 그다음은 모른다

 

그날 저녁 미츠가 산에서 내려와 옥수수밭에 숨어들었을 때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다 도망온 무사들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삼류 쵸오닝들 떠돌이 악사 건달패 들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모자 얘기를 하고 있었다

(…)

 

사람들은 밤이 깊어서야 침묵했고

하나 둘 옥수수밭을 떠났다

각자 커다란 모자를 하나씩 깊게 눌러쓴 채

눈(雪)과 어둠뿐인 후지산으로 향했다

 

모자가 바람에 벗겨질 때까지

모자가 바람에 벗겨질 때까지

 

얼굴을 가린 사람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

 

사람들은 그것을 모자,라고 불렀고

다카하시 미츠는 그것을 세 개나 쓰고 있었다

 

일본의 현대시인이 『미야모또 무사시(宮本武藏)』 같은 사무라이 소설의 어떤 정황을 빌려 쓴 작품이라고 해도 속지 않을 사람이 드물겠다. ‘모자’는 한 인간의 삶을 기습하여 떨쳐버릴 수 없게 억누르는 운명적인 사건일 것이며, 거기서 벗어나려 애쓰는 자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비적이 되거나 “농민들의 봉기”의 연합세력이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감각과 정서에도 친숙하다. 그래서 어쩌면 제목을 ‘지리산으로 간 사람들’로 바꾸고 주인공의 이름을 다시 짓고, 몇몇 어구를 손질하여 ‘한국시’로 만들더라도 그 주제와 시적 감정이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황병승의 시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를 수도 있을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다 도망온 무사들”그리고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삼류 쵸오닝들 떠돌이 악사 건달패 들”은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 지리산의 ‘해방전사들’보다는 시코쿠의 친구들인 동성애자들, 인디밴드 멤버들, 전과자들, 자폐아들, 사랑에 미친 여자들에 더 가깝다. 어떤 고난을 겪는다 해도 해방전사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주류의 언어이다. 저 후지산 사람들과 시코쿠의 친구들을 한데 묶는 혈연관계는 경제적 계층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아닌 배척된 자의 운명이며 거기서 비롯하는 떠돌이 의식이다. 해방전사의 모자는 그 자체가 언어이지만 시코쿠들의 언어는 그들이 겹겹이 쓴 모자 아래 있다. 황병승의 시가 문화접경지대의 위기 속에서 의사번역의 형식을 취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종류의 번역론이 지루한 것은 그 논의가 거의 언제나 원문과 역문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거기서 파생되는 온갖 의견들도 원문이 성실하고 투명하게 옮겨져야 한다는 한쪽의 주장과 번역은 재창조여야 한다는 또다른 쪽의 주장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매번 거듭되는 이 주장들보다 더 오해되기 쉬운 것도 없다. 흔히 믿듯이 앞의 주장이 번역가를 노예적 봉사자로 여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뒤의 주장도 번역가의 자유를 방만하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쪽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른쪽 주장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슐레겔은 번역가가 지녀야 할 태도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 저자에 대한 나의 이해를 표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직 그의 정신으로 작업을 하는 순간에만 가능하다. 나는 그 순간에 그의 개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번역하고 변형할 수 있다.”2 같은 글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고대어를 현대어로 완벽하게 번역하려면, 번역자가 모든 것을 현대어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현대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훌륭하게 재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고대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164면) 앞의 글은 원문에의 충실성에, 뒤의 글은 번역의 재창조에 역점을 둔 것이지만, 두 강조점 모두 한쪽이 한쪽을 물고 들어간다. 이 번역론은 물론 독일 낭만파의 시어에 대한 관념과 관련이 있다. 낭만파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자연어와 시에서 ‘예술적으로 처리된’가공어를 구분한다. 시적 이상세계의 언어에 더 가까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공어이다. 그러나 이상세계의 언어를 실현하려는 이 목표에서 시보다 더 우월한 것이 번역된 시이다. 시는 그 언어의 가공에도 불구하고 모국어가 베푸는 친밀감의 덫에 걸려 여전히 자연어와의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시를 이 덫에서 풀어내는 것이 다른 언어로의 번역일 터인데, 이때 번역자는 또 하나의 모국어로 함정을 파는 자유번역이 아닌, 자기 언어에 내장된 낯선 잠재력을 현실화시킬 때만 가능한 투명하고 충실한 번역에 의해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번역의 창조적 재능이란 외국어의 낯설음을 자기 안의 낯설음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낭만파의 시정신이야 지금 우리의 논의 밖에 있지만, 번역가가 자기 언어의 관습보다 자신이 대면하는 작품의 정신에 더 많은 존경심을 품을 때 재창조의 목표를 실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자기 삶의 우연한 상태를 고수하기보다 ‘타지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가 야기시킬 강한 충격에 자기 언어를 맡기려는 시인들에게는 그 창조적 야심에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낭만파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시는 번역이다.

황병승은 외부의 강한 충격에 자기 언어를 맡긴다기보다는 그가 속하는 타지 사람의 말로 그의 또다른 언어인 모국어를 교란한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또다시 이장욱의 말이다. “아마도 이 시집에 제기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비판 중 하나는 시적 무국적성에 대한 것일 터이다. 영어, 한자, 전각기호, 이탤릭체 등등을 마구 섞어 쓰는 이 혼종성에 대해 ‘모국어에 대한 시인의 책임’을 운위하며 비판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다. (…) ‘순수 한국어’라는 환상에 기초해 있는 계몽주의적 언어관은 ‘정상적인’상징질서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의 혼탁한 언어들은 정확하게 그 질서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이장욱, 같은 글, 189〜90면)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황병승은 비록 질서 바깥의 문화에 속하는 사람의 얼굴을 들고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정상적인 상징질서’의 입장에서 더욱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벌써 이 질서의 내부에 들어와 그 급소를 딛고 있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엽기시인’으로 그는 외부인이지만 의사번역자로서 그의 활동은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번역과 의사번역을 막론하고 힘이 센 번역은 그것이 바깥의 내부화라는 점에서 핵심가치를 지닌다. 오직 저쪽의 언어로 표현된 저쪽의 것이 이쪽에 번역의 욕구를 부르는 순간부터 그것은 이쪽 내부의 일이 된다. 번역의 욕구는 이쪽 언어가 누리는 문화적 친숙감의 결탁을 깨뜨려 격차와 틈새를 만들고, 그 언어의식의 하부에 잠들어 있는 역량을 그 격차와 틈새 속으로 끌어들인다. 낯선 것의 번역은 친숙한 세계의 내부를 그 깊은 곳에서부터 낯선 것으로 만든다. 김혜순이 시집의 뒤표지 글에서 황병승의 시적 주체가 “끊임없이 변용하는 과정중에 있는 고무찰흙 주체”라고 말할 때 이 고무찰흙은 우리 내부의 저 잠재적 역량과 다른 것이 아니며, 이들 시로써 새로운 “시적 자아의 인식은 저 자연이 아닌 문화적 중재에 의해 성장한다는 엄연한 사실”이 증명된다고 말할 때도, 이 문화적 중재에 의한 성장 역시 번역작업에 의한 잠재역량의 현실화와 다른 것이 아니다.

「혼다의 오·세계(五·世界) 살인사건」을 예로 들 만하다. 단편소설이라 불러도 좋을 이 열 면짜리 담시(譚詩)를 잘 읽기 위해서는 러시아 장편소설을 대할 때처럼 등장인물들의 이름으로 도표를 그려야 한다. 이름이 길어서가 아니라 그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화자를 제외한 다섯 사람과 세 사람, 도합 여덟 사람의 등장인물은 동성애와 이성애의 관계로, 동거자와 전남편과 전처의 관계로, 휘파람을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희생자의 관계로, 형제자매 관계로, 딸과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로, 짝사랑하는 남자와 옷을 벗어주는 여자의 관계로, 강간하는 의붓아비와 강간당하는 의붓딸의 관계로 얽혀 있다. 이 관계가 살인과 방화를 부르고, 그 범죄는 위장된다. 이 사건의 전말은 서로의 일기를 써주는 사이인 두 사람의 일기로, 다시 말해 객관적 시선으로, 그러나 ‘제한된’객관적 시선으로 보고된다. 독자는 그 보고를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두 사람이 번갈아 일기를 쓰다 말고 따귀를 때리거나 주먹질을 하는 순간은 그 보고에 바치는 열정과 그 실패를 동시에 말하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남는 것은 그 보고의 밖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등장인물들의 관계이고, 살인과 방화도 이 관계의 연장일 뿐이다. 동성애자와 병자와 편집증 환자와 반쯤 미쳐 있는 자들의 이 지리멸렬한 세계, 이 ‘혼다의 오·세계(五·世界)’는 3+5 따위의 산수로 분석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좌절을 안겨줄 뿐이다. 이 세계 속의 착종된 관계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나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는, 우리의 마음과 풍속과 윤리감정의 밑바닥에 반죽음의 상태로 고여 있는, 그러나 어떤 강력한 번역을 만나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마비된 힘들의 관계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둘에 하나는 제발이라고 말하지」의 전문을 여기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 황병승이 시를 쓰는 비밀을 그 자신의 입으로 듣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마침내 번역되는가를 알기 위해서.

 

천장에 붙은 파리는 떨어지지도 않아 게다가 걷기까지 하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바닷가에 갔지 맨 처음 우리가 흔들렸던 곳

 

너는 없고 안녕 인사도 건네기 싫은 한 남자가 해변에 누워 딱딱 껌을 씹고 있네 너를 보러 갔다가 결국 울렁거리는 네 턱뼈만 보고 왔지

 

수족관 벽에 머리를 박아대는 갑오징어들 아프지도 않나봐 유리에 비치는 물결무늬가 자꾸만 갑오징어를 흔들어놓아서

 

흑색에 탄력이 붙으면 백색을 압도하지만 이제 우리가 꾸며대는 흑색은 반대편이고 왼손잡이의 오른손처럼 둔해

 

파리처럼 아무데나 들러붙는 재주도 갑오징어의 탄력도 없으니 백색이 흑색을 잔뜩 먹고 백색이 모자라 밤새우는 날들

 

매일매일의 악몽이 포도알을 까듯 우리의 머리를 발라놓을 때쯤 이마 위의 하늘은 활활 타고 우리는 더이상 견딜 수 없는 검은 해변으로 달려가

 

반짝, 달빛에 부러지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서로에게 핫, 댄스를 청하지 누가 먼절까

 

둘에 하나는 제발이라고 말하지

 

파리는 갇힌 세계에서 요령껏 살아나간다. 파리가 예술가라면 그는 이 요령을 재능이라고 믿을 것이다. 갑오징어는 갇힌 세계의 벽에 줄곧 머리를 박으며 탈출을 시도한다. 시인 화자에게 파리의 삶은 마뜩치 않고 갑오징어의 삶은 힘겹고 고통스럽다. 그는 자기 동료와 함께 새로운 종류의 말 만들기를 최초로 결의하고 감동하였던 해변으로 그 동료를 만나러 간다. 그러나 동료는 껌을 씹고 있다, 다시 말해서 권태에 빠져 같잖은 이론이나 뇌까리고 있다. 그가 원하는 새로운 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권태감과 절망까지 포함된 어둠의 자리와 미지의 세계에 천착하는 편이 명백하게 밝혀진 백색 세계를 누리는 편보다 더 유리하겠지만, 그가 흑색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현실이라기보다 날조되고 가장된 것이어서 기대하는 만큼의 탄력을 가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백색의 알려진 세계에 의지하여 거기에 탄력 없는 흑색을 흠뻑 처바르며 밤을 새우는 처지라 더 많은 백색을 탐하는 결과에 이른다. 이 백색의 발호(跋扈)가 극에 닿았을 때, 절망은 깊어지고 흑색은 진정한 것이 되어 유혹의 검은 바다를 이룬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그 최초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고 실천할 순간에 이르렀는데, 벌써 그들 가운데 거반은 지난날의 고통으로 소진하여 이제 제발 그만두자고 말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오히려 단순한 내용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이 시를 읽는 일이 쉽지는 않다. 읽기에 어려운 것은 이 시의 비유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내밀하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파리와 갑오징어의 대비는 그것들의 크기와 그것들이 들어 있는 장소의 성격에서 격에 맞지 않다. 그러나 오랫동안 같은 일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라면 애써 비유의 효과를 계산하기보다는, 눈에 띄는 사물을 아무것이나 골라 표현의 등가를 마구잡이로 둘러씌우는 방식이 더 편리하다. 이 비유는 내밀한 관계에서만 비난받지 않고 사용이 가능한 비유다. “해변에 누워 딱딱 껌을 씹고 있네”는 자주 쓰는 속어에 해당하지만, 의성어 ‘딱딱’으로 그 내밀성이 더욱 과장되고, 거기에 영탄조의 어미가 겹쳐 의미 파악에 혼란을 일으킨다. 흑색과 백색의 대비는 너무 고지식하지만, 이 또한 오랫동안 같은 문제로 고민해온 사람들의 처지에서 알 만큼은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적절한 비유가 달리 필요하겠느냐는 태도가 거기 묻어 있다. “더이상 견딜 수 없는”같은 어절에서는 ‘버려두고는’같은 말이 중간에 들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나, 이 역시 그 정도에서 알아들어야 한다는 식의 말이다. 이 시를 애써 읽는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과 그 친구들을 따라 내밀한 지하실로 내려가 있고, 환대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벌써 그들의 동료가 되어 있다. 그래서 마침내 이 시의 제목이면서 마지막 시구인 “둘에 하나는 제발이라고 말하지”를 그 현장에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포기한 열정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자신을 그들의 친구로 만들 수 있는지, 유착된 자기 삶의 출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필경 묻게 될 것이다. 완강한 자리에 서 있던 우리가 이렇게 번역된다. 시를 초월이라고 한다면 그 말에는 시가 곧 자기번역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시의 윤리에 관해 말한다면 타인의 말로 자기 말을 번역할 수 있는 이 능력을 맨 먼저 꼽아야 할 것이다.

‘완전소중’은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자성어를 흉내낸 표현 중 하나다. 어느 멍청하거나 재치있는 중학생이 아마도 영어 dearest를 처음 이렇게 번역하였을 법한데, 비평가인 내가 시코쿠를 이해한다고 말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이 말과 바른생활의 언어가 불화하며 야기하는 편차를 타고 시코쿠의 야릇한 삶이 두 언어를 가로지를 수도 있을 것이고, 하나의 비평이 두 문화에 개입할 수 있는 방안 또한 오직 그 틈새에서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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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장욱 「체셔 캣의 붉은 웃음과 함께하는 무한 전쟁(無限戰爭) 연대기」,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중앙 2005, 190면.
  2. A. W. Schlegel, “Leçons sur l’art et la littérature,” trad. Lacoue-Labarthe et J.-L. Nancy, in LAbsolu littéraire, Le Seuil 1978, 1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