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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스키조와 아나키

2000년대 한국 시의 정치학을 위한 단상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아포리아의 제국」 「당신의 ×, 그것은 에티카」 등이 있음. poetica7@hanmail.net

 

 

시적 정치학의 두 층위

 

다시 읽는 김수영(金洙暎)의 시론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가 시학과 정치학과 윤리학을 별다른 배려 없이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연록 「시여, 침을 뱉어라」(1968)에서, ‘형식’과 ‘내용’에 관한 시학적 해설은 돌연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관한 정치적 논설로 비약하고, 그것은 서로 먼저 침을 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모멸시대의 윤리학으로 도약한다. 그의 저 유명한 ‘온몸’의 시학은 형식의 ‘예술성’과 내용의 ‘현실성’혹은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분열을 강요했던 외부의 억압을 돌파하여 그 간극들을 끝내 합치기 위한 모험이었고, 무의식(형식)과 의식(내용)의 일치를 추구하는 윤리적 행위에의 호소였다. 시학, 정치학, 윤리학의 영역에서 끝내 완강했던 모종의 간극을 그는 봉합하지 않았고, 세 영역이 한몸이라는 진실을 훼손 없이 전달하기 위해 그 진실의 난맥을 정리하지 않았다. 간극이 초래하는 긴장과 난맥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그대로 그의 전언이었다. 시학과 정치학과 윤리학이 형성하는 삼각형 중에서 특정한 면만을 보기로 작정한 독자에게 그의 글은 기꺼이 명료해질 테지만, 아마도 그때의 김수영은 더이상 김수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 김수영의 시적 성공이 바로 저 ‘간극’과 ‘난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후기 걸작인 「꽃잎 2」와 「풀」을 감싸고 있는 미묘한 긴장은 ‘꽃잎’과 ‘풀’이라는 기표가 끝내 저 자신의 이타카(Ithaca)인 안온한 ‘상징’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데서 발원한다. 저 기표들은 기의와 만날 듯 만나지 못하면서 떠다니는데, 이 기표와 기의의 간극 속에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간극이 음화(陰畵)로 새겨진다. 누군가가 부주의하게도 ‘꽃잎’은 ‘시(詩)’를 상징하고 ‘풀’은 민중을 상징한다고 공표하는 순간 저 긴장의 세계가 허망하게 붕괴하고 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난맥은 미학, 정치학, 윤리학이 동시에 뒤엉키면서 만들어내는 난맥이다. 그 셋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수술은 미숙아를 낳는다. 남는 것은 미학적으로 거칠고 정치적으로 모호하며 윤리적으로 나약한 시다. 말하자면 김수영의 힘은 그의 삼각형이 형성하는 어떤 절합(節合) 구도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는 예의 강연록의 부제를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라고 달아야만 했다. 그의 힘은 표면적인 ‘전언’의 힘이 아니라 특정한 구도를 형성하는 그 ‘존재(있음)’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와 같은 긴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강연록보다 1년 앞선 한 글에서 “외부와 내부는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서 합치되는 것이다”1라고 쓰면서 ‘온몸’시학을 예고했다. 외부와 내부는 똑같은 것이라는 김수영의 당위명제는 당시에 강력한 윤리적 자극을 내장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말을 사실명제로 바꿔서 반복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외부와 내부는 실제로 똑같다. 억압과 금기가 헐거워진 곳에서 “죽음에서 합치되는”경지는 실종된다.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모멸의 제스처도 진정성을 갖기 어렵다. 외부와 내부는 같고, 우리에겐 쓰지 못할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온몸’의 역동성을 무력화시키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는 결국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시대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에서 대문자 정치는 끝났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작동(work)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문자 정치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시들은 이상하게도 미학적으로 퇴행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능한가? 오늘날 가능한 것은 금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 대한 거절일 것이다. 이제 권력은 ‘하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고 ‘하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금지하는 아버지가 폐위된 이후에야 우리는 향유(jouissance)를 권하는 아버지의 심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 ‘외설적인 아버지’(지젝)의 가장 확실한 업적으로 보이는 것은 완강한 자기동일성으로 무장한 집단주의의 양생술과 전체주의적 쾌락을 조직하는 씨스템의 유혹술이다. 강정구, 황우석, 월드컵, 독도 등을 둘러싸고 터져나온 그 자기확신에 찬 목소리들의 일사불란한 의미작용은 ‘욕망의 정치학(미시정치학)’이 작동하는 양상을 매우 불쾌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오늘날 ‘시의 정치’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저 동일성과 전체성의 전장(戰場)일 것이다. 차이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 생체 정치 등이 운위되고 있고, 과연 차이, 정체성, 몸 등의 주제가 젊은 세대의 시인들에게서 과거와는 다른 감각으로 사유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정치를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정치를 살고 있다. 무슨 뜻인가?

한편의 시는 하나의 국가다. 거기에는 권력을 대리하는 ‘통치’의 심급이 있고 권력이 운용되는 ‘체제’의 심급이 있다. 이는 각각 ‘화자’의 심급과 ‘스타일’의 심급에 상응할 것이다. 한편의 시를 읽는 일은 특정한 ‘통치자(화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특정한 ‘체제(스타일)’의 양상을 확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요컨대 모든 시는 제 나름의 통치론과 체제론을 머금고 있다. 어떤 세대의 시인들은 자명한 일인칭 통치자가 일사불란하게 의미를 생산해내는 체제에 얼마간 지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거의 체질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어떤 통치와 체제의 메커니즘을 한편의 시에 투영하면서 간접적으로 ‘미시정치’에 가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체로 그들은 통치자의 동일성을 휘발시켜버리고 선형적인 의미생산 체제를 교란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국가에 새로운 통치론과 체제론을 도입한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격렬한 질문과 전체로서의 형식에 대한 해방적 교란이 ‘다른 정치’를 향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체제를 구축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 혹은 ‘독재’없는 통치론과 ‘전체’없는 체제론, 이것이 2000년대 시의 시적 정치학의 두 층위다. 2000년대 시인들의 정치학을 말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 새로운 물결을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주목할 만한 최근의 사례를 검토하는 것으로 또 한번 숙제를 미룬다.

 

 

통치론, 혹은 스키조의 시학—강정의 경우

 

함성호가 “강정의 언어는 여성적이고, 강정의 시적 성별은 여성”이라고 쓰는 동안, 성기완은 강정을 두고 “남근들이 흐물거리는 시대에 보기 드문 빳빳한 남근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라고 썼다.2 강정의 시적 성별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여성적’이면서 ‘남근적’일 수도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 강정 시의 힘이고, 이 모순이 바로 강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불충분한 문답이다. 남녀 운운하는 질문 자체가 이젠 너무 촌스러워졌다. 우리는 이미 ‘시코쿠 학습효과’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연전에 출간된 황병승의 시집(『여장남자 시코쿠』)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자꾸 ‘의식’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화자의 성별을 교란했다면, 강정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망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성별의 울타리를 초월한다. 그래서 강정의 질문은 ‘남성인가 여성인가’가 아니다. 인간인가 짐승인가, 이것이 강정의 질문이다. 그는 이를테면 “이제 다른 인간이 태어나야 한다”(「우주괴물」)고 선언하거나 “인간이 아닌, 괴물이어야 한단다”(「불가사리」)라고 충고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의 난폭하고 아름다운 이종교배의 상상력 앞에서 세간의 안이한 동종교배의 자식들은 문득 왜소해지고 만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적 감각인 서정적 휴머니즘과 지사(志士)적 계몽주의를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한 세계가 있었던가. 이렇게 어떤 시는 ‘종(種)의 기원’을 새롭게 쓰겠다는 불가능한 야심을 장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야심과 더불어 시인이 ‘인간인가 짐승인가’를 물을 때 독자는 세 가지를 반문하게 될 것이다. 첫째, 지금 발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누가 말하는가). 둘째, 천상의 우주와 지상의 짐승 사이를 분별없이 왕래하는 이 상상력을 과연 무엇이라 명명해야 하는가(무엇을 말하는가). 셋째, 이 난폭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의 배후에는 어떤 미학적 준칙이 있는가(어떻게 말하는가). 당겨 답하면 이렇다. 첫째, 지금 발화하고 있는 ‘것’은 ‘서정적 화자’라는 안온한 심급이 아니라 어떤 비인간적 에너지의 덩어리다. 둘째, 인간이기를 그만두었으므로 인간적 상상은 더러 우주적 망상에 자리를 내주기도 할 것이다. 셋째, 인간 아닌 어떤 것의 망상적 발화가 아름다운 모국어일 수 없겠거니와, 실상 그의 문장들은 일종의 외국어에 가깝다. 다음 시를 인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프로그램이 이곳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사라지고 만다

만져지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여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이 다른 말이라 하는 것도,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부분

 

전문을 대상으로 말하건대, 이 시의 눌변은 매혹적이다. 이 시를 되풀이 읽다보면 추상적인 진술처럼 보이는 모든 문장들이 문득 정교하게 계산된 감각적 달변으로 다시 읽히는 순간이 온다. “우리 시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 중의 하나”(함성호)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 시가 갖고 있는 은은한 격동의 호소력을 부인하긴 어렵다. ‘나’는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해 들었다. “물이 충분한 내 몸”에도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아나기도 했나본데, 이는 무슨 영문인가?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하는 우주의 생성 속으로 휘말려드는 ‘나’는 시의 후반부에 이르러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것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태를 초래한 것은 그 누군가(무언가)의 ‘말 아닌 말’인데, 그것을 다시 말로 표현하기란 지난한 일이라서 이 시의 화자는 주춤거리는 눌변으로 그 사태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물론 이 수사학은 비, 바람, 혹은 진동에 가까운 어떤 “다른 말들”에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터다. 이 독특한 상상력과 수사학을 각각 변종(變種)에의 욕망과 변성(變聲)에의 갈망이라고 정리해도 좋겠다. 이것은 그의 시집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충동이고, 앞의 시는 그 세계의 창조자가 정색하고 쓴 서곡처럼 보인다.

변종의 기획은 들뢰즈(Deleuze)가 ‘생성(becoming, 되기)’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사태에 가까이 간다. 관습적인 서정시들이 대상의 모방, 대상과의 교감, 혹은 대상과의 상상적 동일시 등에 몰두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강정은 그와 같은 서정적 메커니즘은 진정한 생성의 통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진정한 생성이란 주체가 어떤 대상과 함께 ‘구별불가능/식별불가능의 객관적 지대’로 들어서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언명은 강정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정의 생성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우주적이고 그의 상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는) 망상적이다. 그가 임신·출산의 이미지들을 이끌고 프로이트의 분열증 환자 슈레버(Schreber)처럼 전우주적 생성의 세계에 기꺼이 몸을 맡겼기 때문에, 이곳에는 미증유의 풍경이 도입될 수 있었고 낯선 기운이 생동할 수 있었다(다시, 들뢰즈라면 이를 ‘순수한 지각percept과 정동affect의 세계’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에 의해 발견되고 감지되는 풍경과 기운이라기보다는, (앞의 시의 논리가 그렇듯이) 오히려 그것들 스스로가 인간을 발견하고 포섭한다고 해야 맞을 그런 비인칭적인(impersonal) 힘들에 가깝다. 예컨대 “내 몸에서 가장 먼 풍경들을 통하지 않고서는/나는 내 심장박동을 느낄 수 없”(「한밤의 모터사이클」)다고 말하는 ‘나’는 “명료하지 않은,/더 깊은 세계의 포말”(「알을 품은 시인」)을 보고 있거니와, 그가 “육신의 이형(異形)”(「우주괴물」)으로 터져나갈 때 그의 시에서는 “아이는 사실 아무 말도 않지만/아이의 소리를 옮겨적은 백지 위엔 수시로 광풍이 분다”(「두번째 아이」)고 적었을 때의 그 ‘광풍’이 분다. 이런 세계에서 ‘나’라는 발화자는 ‘식별불가능’하거나 ‘구별불가능’하다. 이 변종의 기획은 시집 후반부에 수록된 ‘거미인간’연작을 통해 집요한 집중력을 얻는다.

그의 변성의 기획은 예의 변종의 기획과 불가분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종(種)이 인간의 말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나’를 변화시킨 그 힘을 굳이 말이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말 아닌 그 말을 전달하는 일은 말 자체의 한계와 대면하는 도전이 아닐 수 없었겠다. 실로 이 시집 전체는 바로 이 “다른 말”의 세계로 가기 위해 “인간의 말”(「폭우」)과 벌이는 교전의 기록이다. 그러니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처바르는”(「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이 작업은 불가피하게 상식적인 어휘론이나 자연스러운 구문론과의 격전을 요청했을 것이다. 이곳은 말의 조탁이 아니라 말의 발명이, 말의 미학이 아니라 말의 배치가 문제가 되는 세계다. 그는 우리말 리듬의 자연스러운 유로(流路)를 꺾고 자동화된 의미작용을 경계하는 일에 섬세하다. 그의 ‘정상적인’산문과 대질해보건대 이것은 확실히 의도적인 난폭이다. 그는 옳았다. 우리는 시와 산문을 동일한 강도(强度)의 문장으로 쓰는 시인을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문학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진다”는 프루스뜨(M. Proust)의 말은 과연 시적 언어의 어떤 중핵을 건드리는 바가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시는 외국어로 쓰는 것이다.

변종과 변성을 향한 이 모든 모험들은 『처형극장』(문학과지성사 1996) 이래로 강정의 통치론이다. 시가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특이한 통로 하나를 개척했던 그의 초기 시들은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의 세계로 성공적으로 진화해온 듯 보인다. 저 통치론에 의거하여 강정의 나라를 섭정하는 주체는 우주적인 망상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마이너적인 방식으로 발화하는 분열자(schizo)인데, 경박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출현한 이 낯설고 집요한 기운생동은 ‘서정적 자아’의 미학적 곤경을 돌파한 독창적인 시도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단, 그의 목소리가 그가 두 번의 아름다운 헌사(「새와 물고기를 닮은 남자」 「폭우」)를 바친 톰 웨이츠(Tom Waits)의 그것을 닮는 것은 기꺼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가 가끔 초월의 제스처에 다가갈 때 우리는 서먹해진다. 앞에서 인용한 시는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곳을/허공이라 한들 어떠리”로 끝나거니와, 여기서 ‘허공’이라는 시어와 ‘어떠리’운운은 어쩐지 저 시의 머리와 몸통을 감당하기에는 허약해 보이지 않는가. 이런 아슬아슬한 구절들이 결국 초월의 지평으로 탈선하는 일만 없다면, 우리는 그의 통치론을 기꺼이 지지할 것이다.

 

 

체제론, 혹은 아나키의 시학—장석원의 경우

 

장석원(張錫原)의 시어들은 대개 ‘혁명’과 ‘사랑’사이에서 진동한다. 혁명을 사랑에 빗대는 의식의 버릇과 사랑을 혁명과 함께 사유하는 의식의 버릇은 원래 동전의 양면이다. 그 의식은 혁명을 사랑의 문법으로 찬미 혹은 애도하거나, 사랑을 혁명의 구조에 빗대어 승인 혹은 거부하는 의식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혁명이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고 사랑이 사유가 아니라 실천인 계급의 의식이 아니다. 장석원의 시는, 이제는 오히려 신선해져버린, 개종한 지식인계급의 비가(悲歌)다. 물론 이 사랑과 혁명의 ‘이중구속’은 김수영과 황지우의 것이기도 했다. 장석원의 시에서 매혹적인 구절들은 그래서 불가피하게 선배들의 그것을 닮는다. 거기서 그의 시는 혁명의 배반과 사랑의 종말 앞에서 애도를 끝내지 못한 채 허둥대는 변심한 지식인의 멜랑꼴리한 목소리를 실어나른다. 그 목소리의 변사가 바로 장석원의 ‘낙타’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낙타는 어디로 갔을까”(「낙타에게」)3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시는 그의 멜랑꼴리를 아주 편안하게 실어나를 준비를 이미 마친 셈이다. 이제 “사막 하면 낙타가 걸어가고, 사막 하면 삭막한 도시가 떠오르고, 사막 하면 시가 생산”될 것이었다.

그러나 장석원의 “술 취한 낙타”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그가 부리는 또 하나의 짐승인 ‘늑대’다. “혁명이 아름답던 은유의 날들”(「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을 되돌아보는 것이 낙타의 몫이라면, 이제는 다른 혁명과 다른 언어를 찾아 어슬렁거리며 불협화음(wolf’snote)을 만들어내는 것은 늑대의 몫이다. 물론 이 늑대는 “나는 우울한 남자, 나는 사냥꾼/원초적인 생명 본능 때문에/이성주의자의 혓바닥을 먹고 싶었지만 나는 무성의 바위/백년 동안의 비정한 고독 후에 울부짖을 늑대”(「내 마음의 아나키」)에서 그렇듯 대체로 우울증에 걸린 낙타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 정념과는 무관하게 이 시집은 늑대의 생리를 닮아 있다. 그의 시는 고행과 순례라는 전세대적 의미 장(場)을 벗어나기 어려운 낙타를 따라가는 ‘멜랑콜리 맨’의 기질과 교전과 횡단을 생리로 하는 늑대의 정동(情動)으로 충만한 ‘아나키스트’의 기질로 분열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전언의 층위에서 낙타고 스타일의 층위에서 늑대다. 그리고 그의 정치학은 늑대와 더불어 작동한다.

 

마르크스와 레닌과 체의 전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들은 모두 수염을 길렀다. 부정의 멋진 상징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춤출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기회를 지녔으나 춤출 수 없었다. 안전한 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But burn

번데기는 우화의 껍질이며 찬란한 전신의 표본이지만 말이 많이 타락했다. 번데기만한 놈이 되면 인생이 치졸해지고 만다. 혁명과 반혁명은 종이 한장 차이가 분명하다. 배반은 장미 한송이 때문에 쉽지 않고, 사랑도 티슈 한장이면 끝난다. 혁명? 나는 불꽃이 되고 싶었으나, 분신자살하는 베트남의 승려가 무서웠고, 죽어 불꽃이 되는 노승이 부러웠다.

—「동방의 서점에는」 부분

 

‘But’ ‘burn’ ‘번데기’등을 나란히 이어놓는 이 말장난이 지나치게 가벼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말장난이 장석원만의 것은 아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기꺼이 가벼운 말장난에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장난에는 이전 세대의 그것이 거느렸던 ‘정치권력과의 긴장관계’같은 알리바이도 없다. 그런데 왜 하는가? 순결한 언어와 타락한 언어가 선명히 분별되던 때가 있었다. 한때 거대담론과 결합되어 그 자체만으로 숭고한 아우라를 뿜어냈던 그 기표들은 그러나 혁명의 담론이 붕괴하면서 그 숭고한 기의들을 박탈당했다. 시에서 대문자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한가지 요건은 언어의 순결한 힘에 대한 믿음일 것인데, 모욕받은 기표들의 세월은 언어의 순결한 힘을 믿었던 많은 이들을 개종하게 했다. 우화(羽化)의 껍질이며 찬란한 전신(轉身)의 표본인 ‘번데기’가 ‘번데기만한 놈’의 번데기로 타락하고 만 것은 차라리 사소한 일이겠지만, 한시절의 숭고한 이름들인 맑스, 레닌, 체 등의 이름이 전기(傳記) 속으로 들어가고 고작 “부정의 멋진 상징”인 ‘수염’으로 묶이는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이름은 허명(虛名)이 되었고 ‘부정(否定)’이라는 말은 공중에 떠버렸다. ‘혁명’이라는 말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장석원의 시에서 언어의 의미보다 언어의 용법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시가 어떤 정치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만을 남겨두는 기의들의 전언 때문이 아니라 모욕당한 기표들을 ‘사용’하는 그의 방식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보다는 용법을 더 중요한 것으로 보고 언어의 ‘배치’를 통해 ‘시적인 것’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그는 그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최근의 뉴웨이브들과 가깝다. 그는 한편의 시를 구성하는 줄기들을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줄기들에 각각 소제목을 부여하고 기꺼이 방임한다. 이 점에 주목하여 그의 시에 ‘이미지 연방제’4라는 표현을 얹어준 평자가 있거니와, 표현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리는 이 정치적 비유 자체가 흥미롭다. 다시, 한편의 시는 하나의 국가다. 장석원의 국가를 움직이는 통치론과 체제론은 각각 “나는 라이팅 머쉰이에요”와 “모든 잡종의 계보가 여기 있다”(「끈—이론 게임」)로 요약된다. 그런데 강정의 경우와는 달리, 그에게서 더 흥미로운 것은 아직 낙타의 기질을 갖고 있는 그의 통치론이라기보다는 늑대의 무리처럼 서식하는 시들에 깔려 있는 그의 체제론이다.

그것은 중앙집권이 아니라 지방분권을 골자로 한다.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을 따라 이를 각각 수목(樹木)형과 근경(根莖)형이라 불러도 좋다. 수목형 체제는 재현(再現)과 대의(代議)의 논리에 기초한다. 시학의 차원에서 전자를 극복하는 한가지 방식이 소위 ‘환상’이라면 후자를 극복하는 한가지 방식은 ‘접속’일 것이다. 환상이 내 안의 다양체(multiplicity)를 찾아가는 방식이라면 접속은 외부와 더불어 다양체를 형성하는 방법이다. 수목형의 일사불란을 극복하기 위해 이 시인은 접속의 원리를 도입한다. 장석원의 시에서 여러 종류의 텍스트들은 ‘다성적으로’5 동원되어 서로 접속하면서 다양체를 형성한다. “다양체에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천개의 고원』 2장). 그래서 탈(脫)의미작용으로 나아간다. 최소수준에서는 기표를 고립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최대수준에서는 연과 연, 절과 절, 시와 시 사이의 인력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그것은 가능해진다. 들뢰즈의 말대로 스타일이란 곧 ‘발화행위의 배치(agencement)’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장석원의 스타일은 그 다채로운 발화들을 공들여 배치하는 기술에 힘입어 형성된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장석원의 지방분권적 스타일은 다종다양한 발화들이 이합집산하는 와중에 그것들을 어떤 시적인 절합의 순간으로 이끌어가는 데 성공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뿌리를 제거하고 줄기를 늘어놓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발화자의 통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줄기들이 서로 연대하여 모종의 ‘시적인 것’에 도달하는 일, 혹은 이질성들이 공존(con-sist)하면서 ‘무질서의 질서’라고나 해야 할 어떤 일관성(consistence)에 도달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그때에만 한편의 시가 성취한 스타일은 하나의 체제론으로 등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성공사례는 새로운 정치적 씨스템에 대한 상상력을 간접적으로 자극한다. 이 체제론을 과연 아나키즘이라 불러도 좋겠지만 명칭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는 ‘혼란’을 ‘사랑’이라고 부른 김수영의 전례를 따라 이를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물론 그의 아나키즘은 사랑의 내용이 아니라 사랑의 형식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아나키스트인 것은 발화자도 아니고 시인 자신도 아니다. 아나키스트인 것은 그의 시집 자체다.

 

 

영구혁명, 혹은 전위의 온몸

 

대부분의 전위적인 시들이 그러하듯, 강정과 장석원의 시는 어떤 주의(主義)를 설득하려 들기보다는 그것을 살아버린다. 시의 정치성은 정치를 ‘말’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존재’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자명한 일인칭의 세계를 배격하고 유기적인 전체성의 세계를 거부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도는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정체성과 체제를 찾아 헤매는 지난한 모색의 산물로 읽힌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색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기원하고만 싶다. 모든 전위의 운명이 그렇듯 그들이 마침내 특정한 정체성과 체제에 도달할 때 그들의 정치성은 소멸될 테니까 말이다. 새로운 정체성과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의 그 격렬함이 앞으로도 그들의 알리바이가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쥐고 있는 것은, 강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릴수록 지워지는,/미래의 지도”(「밤의 저편으로부터 그가」) 같은 것일 터다. 말하자면 영구혁명의 상태일 때에만 그것은 혁명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 전위의 ‘온몸’일 것이다.

한 시인은 시인이 시만 생각하고 시와 정치의 ‘사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다만 ‘휴지’가 남을 뿐이라고 썼다.6 옳은 말이다. 그리고 시와 정치의 그 ‘사이’는 아마도 ‘정치의 시’가 아니라 ‘시의 정치’의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시의 전언을 재구성하여 정치성을 운위할 때 시와 소설과 에쎄이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시는 오직 시만이 갈 수 있는 길로 정치에 도달할 때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 한 평론가는 “시가 정말 현실과 치열하게 싸우기 위해서는 시가 정치적 현실과 밀착할 게 아니라 정치적 현실과 비교해 끊임없이 넘치거나 모자라야 한다”7고 썼다. 옳은 말이다. 가령 시가 정치적 현실에 밀착하여 대문자 정치에 가담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일은 물론 자유다. 그러나 모든 정치는 그 시대의 정치다. 시학적 둔감을 감추기 위해 완강한 정치학 개론을 반복한다면, 우리는 ‘현실보다 넘치거나 모자라는’오늘날의 소문자 정치들의 힘을 적잖이 놓치게 될 것이다. 영문법에서 정치(politics)는 단수명사이지만 시학에서 그것은 복수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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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수영 「참여시의 정리」,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03, 390면.
  2. 강정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문학동네 2006. 함성호의 해설과 성기완의 표지 글 참조.
  3. 이하의 인용은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에 준한다.
  4. 조강석 「인식의 자동성과 이미지 연방제」, 『현대시학』 2006년 3월호.
  5. 이에 대해서는 권혁웅의 「시와 다성성」(장석원, 앞의 책, 해설)과 이장욱의 「태양의 언어—장석원의 시들」(『나의 우울한 모던보이』, 창비 2005)에서 상세히 해명된 바 있다.
  6. 김광규 「생각의 사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민음사 1995.
  7. 정과리 「해방 50년, 한국시에 대한 단상」,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 역락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