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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흔들리는 민족문학
민족문학론을 둘러싼 최근 논의에 대해
신승엽 辛承燁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민족문학을 넘어서』, 주요 평론으로 「20세기 민족문학론의 패러다임에 대한 몇가지 반성」 「기억과 구조 속에 폐쇄된 전망— ‘박하사탕’론」 등이 있음. shdw324@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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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필자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민족문학론과 관련된 글을 발표한 바 있다.1 주로 20세기에 전개된 민족문학론의 역사적 경과를 더듬어보는 글이었는데, 역사를 살피다보니 자연스럽게 비판적인 언급이 많았고 또 나아가서 현재의 민족문학론에 대해서도 몇마디 관견(管見)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와 달리 이제는 민족문학론이 시대적합성이라든가 문학이념적인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 그러나 새로운 이념적 가치의 발견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민족문학적 사유가 하나의 반성적 거점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러한 거점을 토대로 이제는 세계문학에 대한 사유를 좀더 발전시켜보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 주장들이 본격적으로 제출되지 않고 매우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로 토로된 것은, 비단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가 ‘민족문학론의 역사’였던 탓만은 아니다. 필자 자신 그때나 지금이나 민족문학론을 넘어설 만한 새로운 문학이념에 대해 그다지 생각이 깊지 않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족문학 이후의 문학이념에 대한 모색은 어느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이 아니며, 하루이틀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의 문학에 있어 과연 ‘이념’이란 것이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는지조차도 쉽게 단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미 1990년대 이후 우리는 오랜 기간 ‘탈이념’의 시대를 살아오고 있다.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발전전망을 둘러싸고서도 탈이념은 이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일종의 조건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이념에 대한 모색이 불필요할 만큼 오늘날의 제반 현실이 자기완결적이라거나 만족스러운 것 역시 결코 아닐 터이다. 이처럼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느껴지지도’않아서 곧바로 ‘현안’으로 삼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문제해결의 전망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데에 오늘날 이념 논의의 난점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졸렬한 발표에 대해 몇사람이 보여준 반응이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민족문학론에 대해서는 지난 1990년 이후 수차례 ‘갱신’논의가 있었지만, 한결같이 특별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만큼 갱신 논의만이 아니라 민족문학을 둘러싼 이념적 논의 자체가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인데, 그러나 그 이유가 혹시,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어떤 직접적인 ‘결론’만을 기다린 데에 있지는 않았는지도 반성해보아야 한다. 논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 쉽사리 현안으로 삼기는 어려운 궁지에서는 섣부른 결론의 도출보다는 논의 자체의 지속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돌파의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머나먼 우회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아직은 기존의 민족문학론에 대한 더 많은 반성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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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글에 대해 먼저 반응을 보여준 것은 김명환(金明煥)이다. 김명환은 같은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이병훈(李炳勳)과 필자의 글이 모두“과거의 민족문학 개념이 우리 시대를 이끌 문학이념으로서 더이상 적절하지 않”2다고 보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이병훈이 민족문학 나름의 유효성을 인정한 데 반해 필자는 아예 민족문학을 폐기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진단했다. 필자가 ‘폐기’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민족문학이 이념적 가치를 가졌던 것은 20세기에 국한된 현상이었다고 민족문학을 ‘역사화’한 데 이어서 오늘날에는 더이상 이념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선언한만큼, 독자들에게 ‘폐기’의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필자의 글에 두번째로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 백낙청(白樂晴) 역시 필자의 입장을“민족문학론의 용도가 이제 다했다는 입장”3이라고 요약함으로써 이를 확인해주었다.4 어쨌거나 필자가 민족문학의 생명력이 다했다고 진단한 것은 단순 직절하게 문학이념으로서의 민족문학, 곧 문학운동과 창작의 방향에 대해 일종의 지침이 되어주는 문학이념의 차원에서였다. 하지만 필자의 글에 대한 김명환과 백낙청의 반응은 민족문학 개념을 좀더 여러 차원으로 세밀하게 분해하여 사유하고 있으며, 그 결론들은 역시 민족문학의 유효성이나 용도가 아직 남아 있다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필자가 촛점으로 삼은 ‘이념으로서의 민족문학’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전과 같은 권위랄까 지위 같은 것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점은 일단 어느정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물론 필자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라기보다는, 백낙청이 이미 분단체제론을 펼치면서“민족문학 개념에 대한 일정한 해체작업을 수행”했음을 지적하는 가운데(김명환 97면), 혹은 민족문학론이 ‘민족문학의 새 단계’론을 거쳐 분단체제론으로 ‘자기조정과 발전을 계속’해오면서 ‘민족문학의 개념 자체가 얼마간 상대화’되어왔으며 그에 따라 이념태 역시 ‘민족문학’이 아니라 그것과는 구별되면서도 중첩되기도 하는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으로 변했음을 주장하는 가운데(백낙청 20면) 이루어지고 있다.(그러면서도 백낙청은“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라는 설명적인 문구 대신에 ‘민족문학’을 사용하는 것이 적당할 때가 많은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요컨대 이제 70,80년대와 같은, 문학 창조의 방향과 문학운동의 슬로건이 통일된 이념으로서의 민족문학은 역사적 시효를 다했다는 점에는 필자나 김명환, 백낙청이 모두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면서 민족문학을 둘러싼 논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방향 면에서는 조금씩 혹은 크게 상위(相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있어 민족문학론은 어떤 점에서 아직 유효한 것일까? 김명환은 명확히 구분하여 논의를 펼치지는 않으나, 정리해보자면 우선 남한의 국민문학을 포섭하면서도 분단국 한쪽에 국한되는 ‘국민문학’을 거부한다는 뜻에서 ‘민족문학’의 개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민족문학’들간의 네트워크로서의 세계문학 개념의 필요성으로 연결시킨다. 또한 글 말미에서는 이러한 민족문학 개념을 ‘남북민족과 해외동포가 한국어로 창작한 문학을 지칭하는 기술적(記述的) 용어’라고 규정한 뒤, 이런 점에서의 효용 이외에도“우리 시대의 문학다운 문학의 ‘대명사’로서 민족문학의 유효성”(96면)을 지적하고, 나아가 다양한 사회운동 및 다원적인 문학담론들과 상호 교류하고 연대하면서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민족문학 개념도 슬그머니 끌고 들어온다(97면). 뒤의 두 차원에서 민족문학 개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명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언급 자체가 필요성의 인정으로 충분히 읽힐 만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명환은 어느새 다시 기술적 개념, 문학창조의 방향타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가의 척도로 기능할 수 있는 이념적 개념, 문학운동에 복무하는 실천적 슬로건으로서의 개념 등 모든 면에서 민족문학의 유효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셈이다.
그에 비해 백낙청은 민족문학 개념의 실천적 유효성에 대하여, 논쟁적 차원과 지시적(referential) 내지 기술적(descriptive) 차원, 그리고 구호나 간판으로서의 용도 등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좀더 상세한 해명을 가한다. 우선 논쟁적 차원의 민족문학 개념은 사실 필자가 ‘이념으로서의 민족문학’이라 언급한 것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지적했듯 ‘과거의’민족문학론으로부터 ‘새 단계’론을 거쳐 분단체제론으로 변화 발전해왔으나, 오늘날의 분단체제론이“민족문학 개념을 흡수할 ‘한층 차원높은 개념’”(15면)이기는 하되 민족문학론과 아예 다른 범주의 개념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민족문학론을 흡수하여 발전시킨 분단체제론이 오늘날 문학 및 문학운동의 이념적 가치로서 손색이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창작자들에 대해서는“말로는 민족문학도 좋고 다른 무슨 문학도 좋고 그냥 문학도 좋으니, 창작으로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내기만 하라”(20면)고 하여, 이념적 구속력을 대폭 이완시키고 있다. 두번째 지시적 내지 기술적 차원의 민족문학과 관련해서는, 과거의 ‘분단국가의 국민문학이기를 거부하는 민족문학’으로부터 ‘남한의 국민문학을 겸하는 민족 전체의 문학’까지는 민족문학이라는 외연이 다소 분명했으나,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개념에 와서는 민족문학으로 포괄되는 외연이 얼마간 상대화된 반면, 오늘날에는 ‘한국문학만이 아닌 한민족 전체의 문학’이라는 차원이 한층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남북의 문학을 아우르는 명칭으로서는 ‘한국문학’이나 ‘조선문학’이 아닌 ‘민족문학’이 가장 편리하며, 나아가 해외동포들의 문학까지 포괄하자면 ‘민족문학’만으로는 다소 부족하지만 어쨌든 ‘만만치 않은’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효용성을 지녔다는 입장인 것이다. 아울러 이 논의에 덧붙여 백낙청은 김명환이 지적한 ‘우리 시대의 문학다운 문학의 대명사로서 민족문학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에서 민족적 차원이 차지하는 결정적 비중이 전지구적인 문학옹호 예술옹호 기능의 강화라는 세계적 차원마저 획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구호나 간판으로서의 용도 면에서도 민족문학은 87년 이후 과거와 같은 필요성은 급감했지만 남과 북 및 해외 문학인들의 교류와 연대 작업에서 ‘민족문학’이 떠맡는 몫이 있으므로 구호로서의 용도 역시 폐기될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 역시 여러 차원에서 민족문학이, 비록 예전과 같은 이념적 힘은 지니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유용한 개념임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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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과 김명환이 민족문학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한 데 비해, 필자의 논의는 그야말로 단선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족문학이 지난 시절 그토록 많은 문학적 실천의 수렴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니라 이념적인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이념은 단순한 문학외적 실천의 구호나 간판으로서의 역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학적 실천의 튼튼한 이정표 역할까지도 충실히 해냈으며, 나아가 백낙청의 지적대로 70,80년대의 경우에는 외세에 의해 민족이 분단된 상태에서 남쪽만의 국민문학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쟁적’이자 ‘지시적’인 개념까지 포괄하는 것이기도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은 ‘하나의 이념’이었다.
그런만큼 백낙청과 김명환의 논의가 민족문학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는 데로 결론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념적 푯대로서의 민족문학, 지시적 내지 기술적 차원의 민족문학 개념, 구호나 간판으로서의 용도 등으로 민족문학을 다양한 차원으로 분해해서 살피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민족문학이 ‘해체’되거나 흔들리고 있음을 뜻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과거의 민족문학론과는 차원이 다른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라는 이념이 여전히 유효하며, 민족문학 개념 역시 그밖의 여러 측면에서 생산적인 기능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 민족문학 이념에 대해 뭉뚱그려서 그 역사적 시효 상실을 주장했던 필자로서는, 따라서 이들의 방식을 이어받아 민족문학 개념을 여러 차원으로 분해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유효성이 과연 타당한지 다시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구호나 간판으로서의 민족문학 개념이, 남북 문학인 교류와 연관하여 아직 쓸모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그다지 큰 이견이 없다. 남과 북의 문학인이 함께 참여하는 문학활동에 ‘한국문학’이나 ‘조선문학’이라는 어느 한쪽의 개념을 끌어다 쓸 수 없는 마당에서 ‘민족문학’과 같이 어느쪽이나 별 부담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통합개념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뿐 아니라, 과거에 민족문학이 하나의 이념으로서 유효했을 때에 창립한 몇몇 문학인단체들이 오늘날에도 단체 명칭으로 ‘민족문학’내지 ‘민족예술’을 습용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별 불만이 없다. 비록 이념적 푯대로서의 기능은 희미해졌을지라도 아직 새로운 이념태를 마련하지 못한 처지에서 과거의 푯대가 하나의 우산 역할을 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나 간판으로서의 민족문학 개념이 얼마나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남북 문학인 교류가 분단체제의 극복과 통일에 어느정도 기여할 수는 있겠으나, 문학인들의 진정으로 자유로운 교류가 현체제하에서는 불가망인 상태에서 그 기여의 정도가 과연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이며, 또 그것이 ‘우리 문학의 발전’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기대하기 쉽지 않다.
다음으로 이른바 기술적 혹은 지시적 차원의 민족문학 개념에 대해서는, 김명환과 같이 자명하게 ‘남북민족과 해외동포가 한국어로 창작한 문학’이라고 규정하기가 어려우며, 백낙청의 지적대로 이 기술적 용어의 논쟁적 차원도 만만치 않다고 여겨진다. 중국동포의 이른바 ‘조선족문학’이 비록 한국어로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중국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생활과 처지를 반영한만큼 곧바로 ‘민족문학’에 소속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며, 나아가 일본동포들의 이른바 ‘재일(在日)문학’에 와서는 사정이 더욱 복잡해진다. 잘 알다시피 재일문학에서도 한국어 창작이 적지 않게 이루어졌으나 이는 대부분 과거 냉전적 대결이 한창이던 시절 주로 친북한 계열의 작가들에 의해서였다. 재일문학에서 주류를 이룬 것은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된 창작이며,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그 내용을 살피더라도 일본어 창작이 한국어 창작에 비해 오히려 더 의미있는 성취를 보여주면 보여주었지 그 역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중국과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는 재외동포들의 모국어 창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거나 매우 미미한 형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김명환이 이야기하는 ‘남북민족과 해외동포가 한국어로 창작한 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이란 기껏 남한과 북한 문학에다 조선족문학과 일부 재일문학 정도를 더한 외연을 지니게 된다. 뿐 아니라 언어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재외동포문학의 고유한 가치를 과연 얼마나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지도 심히 의문이다.
한편 백낙청은 훨씬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한 담론에서 속어주의(屬語主義)가 절대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수용하고 있고, 나아가 중국 조선족이 우리말로 생산한 김학철(金學鐵)의 문학뿐 아니라 이회성(李恢成) 등 일본어를 사용했으되 귀화를 거부해온 재일조선인의 작품까지도 민족문학의 외연에 포함시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처럼 언어 이외의 다른 기준을 끌고 들어오면 민족문학이라는 기준에 걸맞은 한층 일관된 기술이 가능해지겠지만, 반면 어디까지가 민족문학이고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주관화될 뿐 아니라 나아가 재일동포문학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우리(남한?)의 ‘민족문학’이라는 기준으로 재단하고 편가르는 ‘폭력’을 행사하게 될 우려도 없지 않다. ‘민족문학’은 이미 이념적 색채로 물들어 있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재외동포문학은 결코 모국어 창작의 여부로 ‘민족문학’에의 귀속 여부가 결정되어서도 안될뿐더러, 국적이나 민족의식의 유무로 그 가치가 평가되어서도 안된다. 필자의 좁은 견문으로는, 재외동포문학의 초창기에는 민족으로 회귀하려는 지향에서 오는 민족적 상상력에 입각한 작품이 뚜렷한 흐름을 이루지만,5 날이 갈수록 그보다는 오히려 그곳에서의 이산(離散) 체험에 입각하여 민족으로 회귀하지도 못하고 ‘그곳’에 정착하기도 어려운 독특한 자신들의 처지를 절실하게 반영하는 작품들이 훨씬 값진 성취를 이룩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성취는 모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로 씌어진 재일문학에서 뚜렷한데, 이회성을 비롯하여 김학영(金鶴泳) 등 이른바 ‘재일 2세대’의 문학에 오면 이미 민족은 자신들의 귀의처가 아니라, 그곳에서의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그곳 ‘국민’과 함께 일종의 ‘타자(他者)’로 자리잡으며,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재일적 정체성’의 추구가 시작된다.6 이러한 흐름은 그 뒤로도 이양지(李良枝)를 거쳐 유미리(柳美里)나 현월(玄月) 등 신세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역전되지 않고 이어지며, 최근에 이를수록 기원으로서의 ‘민족’에 대한 관심은 거의 희박해지고, 그 대신 조선인 출신 자이니찌(在日)로서의 특수한 처지를 세계와 불화하는 단자화된 주체들의 실존적 조건으로 치환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우리와 ‘민족의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민족’으로부터 이산해버린 작품들이야말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적어도 필자에게는) 한층 더 공감과 연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들 문학의 성취를 민족문학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혹은 이들 중 일부를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든 지시적 개념의 ‘민족문학’으로 귀속시키는 일은 결국 배제와 차별의 논리로 그들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빚기 십상이다. 이들과 우리 문학이 진정으로 관계하고 교감을 나누기 위해서는 ‘민족문학’이라는 가치가 깃든 개념으로 포섭하기보다는 ‘한민족문학’이라는 느슨한 개념으로 포괄한 뒤, 이들과의 네트워크적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합당하겠다. 이는 백낙청이 남북한 인민만으로 구성되는 ‘통일 한반도 공동체’와 구별하여 재외동포들까지 아우르는 공동체로 구상하는 ‘한민족공동체’내의 유대관계로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네트워크’를 떠올리고 있는 것과도7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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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명환이 백낙청의 논의를 이어받아 펼치는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도 필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김명환은 일단 필자의 논리에 대해“문학의 위기를 초래하는 전지구적 상업문화의 공세에 대한 경계심이 뜻밖에도 별로 없으며, 지구화 물결에 편승함으로써 문학다운 문학을 달성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낙관주의에 함몰될 염려가 많다”(88면)고 충고한다. 사실 필자의 논리가 대단히 거칠고 소략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러한 비판을 자아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필자가 현금의 세계화 추세를 세계문학의 가능성과 연결시킨 것은, 세계화를 주도하는 자본의 논리에 대해 맹목인 채 그 열매만을 달콤하게 맛볼 수 있으리라는 ‘근거없는 낙관주의’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세계화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주도된다고 해서 그로 인한 각종 지형의 변화가 반드시 역기능만을 초래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에 입각한 것이었다. 온갖 지역적·신분적 장벽과 차이를 무너뜨리며 전개되는 자본의 활동이 궁극적으로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가능케 한다는 맑스의 논리에 대해 ‘근거없는 낙관주의’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8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세계화가 일부 미국 정치인이나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군산복합체 오너들의 제국주의적 혹은 신자유주의적 의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세계자본주의의 작동에 의거해 이루어지는만큼 불가역적인 측면이 있고, 따라서 그것이 초래할 문화적 지형의 변화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저항과 부정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불가피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민족문학’에 골몰할 경우 오히려 ‘전지구적 상업문화의 공세’에 독자들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등 속수무책으로 당할 염려가 있지 않을까.
뿐 아니라 김명환은 역시 백낙청의 논의를 발전시켜, 민족(국민)문학들간의 네트워크로서의 세계문학 구상을 펼치는데, 이 역시 필자는 낡은 논리이자 사실은 ‘국민문학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세계문학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곧 그것은 ‘국민문학’을 주체화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는 세계문학 구상이 아닌가. 그러나 ‘국민문학’이란 중세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문학을 해방하여 ‘국민들’에게로 귀속시키는 단계에서는 일종의 긍정적인 이념으로 작동할 수 있었지만, 이미 전세계적 차원으로 문화 교섭과 교류가 진행된 오늘날의 단계에서는 일종의 지시적 내지 기술적 개념으로 역할을 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에 전지구적 상업문화에 맞설 수 있는 주체 혹은 세계문학 구상을 위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한다면, 필자가 경계했듯이 민족주의적으로 오염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격언을 되풀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명환이 이러한 국민문학간의 네트워크적 실천의 사례로 들고 있는 베트남과 민족문학작가회의 간의 교류나 남북한 작가간의 교류 등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이러한 작가들간의 직접적 교류가 얼마나 내실있게 전개될지도 의문이며, 또 이러한 개개의 교류를 통해 세계문학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는—얼마나 많은 나라의 작가들과 교류해야 하는가?—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필자는 한편으로 세계문학이란 우리가 민족문학이라는 낡은 이념을 넘어서기 위해 사유해야 할, 아직 충실하게 이룩되지는 못한 가능성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낮은 수준으로나마 이미 우리 ‘속에’현존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굳이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식의 세계체제론에 따른 세계문학론9에 의거하지 않더라도, 반주변부뿐 아니라 중심부에서조차도 근대문학은 기본적으로 개별언어를 사용하는 국지적인 지역문학으로 성립하는 한편 강하게든 약하게든 세계문학과의 호흡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나아온 우리의 경우에도 문학인들은 우리 문학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학들을 충분히 참조하면서 자신의 문학활동을 펼쳐왔고, 우리 문학이 그려내는 현실은 한편으로는 우리만의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 자본주의가 진전된 어느 지역의 인민들에게도 충분히 공감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도 함유해왔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져서 세계 전체의 인민들에게 깊은 문화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인데, 필자가 이전의 발표에서 민족문학의 틀을 넘어 세계시민적 사유와 실천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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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민족문학이라고 해서 세계시민적 사유와 실천을 담보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민족문학 역시 항상 세계문학과의 연관에 대해 사유해왔고 또 무엇보다 민족문학이 강조한 ‘민족적 현실’은 우리 민족만의 현실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었으므로 자동적으로 민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유와 실천을 필요로 해왔다. 그러나 민족문학의 세계문학 구상은 주체적이라기보다 특수성을 강조한 데 따른 반대급부로서의 보편성 외삽이기 쉬웠고,10 민족문학이 강조하는 민족적 현실은 민족과 국가의 장벽을 넘어서는 진정한 인민간의 연대보다는, 국가간 대립이라는 협소한 틀에 머무르기 쉬웠다.(쉬운 예로, 우리의 ‘민족문학’에서 필자는 우리 ‘민족적 현실’과 불가분할뿐더러 너무나도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이 다루어지는 경우는 종종 보았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미국인’이 깊이있게 형상화된 경우를 좀처럼 보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미국인’은 ‘미국’이라는 국가 혹은 그들의 문화를 대표하는 대변인일 뿐이다.)
그런만큼 필자는, 김명환과 백낙청이 여전히“우리 시대의 문학다운 문학의 ‘대명사’로서 민족문학”을 상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이미 많은 작가들이 민족문학과 관계없이 좋은 작품, 문학다운 문학들을 생산하고 있는 마당에 왜 굳이 그 대명사로 ‘민족문학’을 상정해야 하는지를 되묻고 싶다. 물론 작품이 우리 현실을 얼마나 깊이있게 다루었는지를 비평할 때, 우리 민족이 처한 특수하면서도 ‘세계사적’인 현실을 잘 반영하여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중요한 깨달음을 주고 있는지를 그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처럼 깊이있게 우리 현실을 다루어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선사하는 ‘문학다운 문학’에, 굳이 20세기적인 이념인 ‘민족문학’이라는 레떼르를 붙여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민족문학’이 과거와 같은 협소한 시각을 강제함으로써 더 나은 창작을 방해하는 면도 없지 않은 듯싶다. 김명환은 예의 베트남과의 작가교류 활동이 낳은 우수한 작품성과의 하나로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랍스터를 먹는 시간』, 창비 2003)을 들고 있으나(89면), 이 작품은 ‘민족문학적 시각’으로 인해 소설적 성취를 보여준다기보다 오히려 뜬금없이 남의 나라 ‘건국 서사시’11를 읊조린 데에 가깝다. 필자도 이 작품이 종전의 베트남 소재 작품들과는 달리 베트남을 베트남인의 시각으로 그려내고자 한 점은 인정하지만, 그 베트남인의 시각이란 것도 결국은 베트남의 역사와 현실을 ‘총체적으로’포착하는 시각이 아니라 대(對)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하나의 촛점에서 단일화해버리는 파편화된 시각에 불과한 것이다. 불굴의 투지와 적개심으로 대제국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의 기억으로부터 도출되는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서 비루한 현실을 압도해버리려는 태도는, 비루한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로부터 삶의 창조성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어떠한 깨달음도 주지 못한다. 필자는 그에 비해, 민족문학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웠으리라 짐작되는 작가 유재현(劉在炫)이 그 인근의 캄보디아 인민들의 생활을 그려낸 연작소설 『시하눅빌 스토리』(창비 2004)가 훨씬 더 재미도 있고 의미있는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본다. 기나긴 반제투쟁과 혁명과 학살과 내전 등을 겪고 난 지금도 여전히 극심한 무질서 상태에 있는 캄보디아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인민들의 군상(왕궁경비를 위해 파견된 북한군 장교를 포함하여)을 파노라마처럼—혹은 자연주의적으로—펼쳐 보일 뿐이어서, 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궤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까지 분명한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시하눅빌이라는 소도시에서 마주치는 인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교차되거나 대비되는 가운데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혹은 그러다 죽음을 맞기도 하는) 민중적인 삶의 활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이다.
그런만큼 그동안 민족문학이라는 이념적 표어가 우리 문학에 요구해온 시각이나 관점이 오히려 억압적 기능을 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그로부터 우리 문학을 해방시켜줄 필요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물론 김명환도 분명 민족문학이 작가들에게 어떤 창작상의 지침으로 강제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사후적으로 ‘좋은 문학은 민족문학’이라고 평가하는 것만으로도 작가들을 민족문학적 시각에 묶어두는 효과를 발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이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을 주장하되 작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제한을 가하지 않고 ‘무심히 대할 것’을 주문한 것은 필자 역시 흔쾌히 수용할 수 있다.
물론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의가 없지 않다. 백낙청은 필자가 분단체제극복과 분단극복을 혼동했을 뿐 아니라 분단현실 일반에 대해서도 어지간히 데면데면하다고 꼬집었지만(17면), 필자는 아직도 ‘분단체제(론)’야말로 한편으로는 우리 현실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그것 아래로 수렴함으로써 역시 데면데면하고 포괄적인 개념이 되고 있고,12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문제들 중 어쨌거나 ‘분단현실’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분단체제극복〓분단극복’이라는 ‘오해’를 낳기 십상이라고 보고 있다. 백낙청 스스로 분단체제라는 하위체제 개념이 필요한 데 대해,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분단현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밝혀놓지 않았는가?13
나아가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론은 무엇보다 우리 문학에만 적용될 특수이론이라는 한계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이는 민족문학론만 하더라도 제3세계 문학과의 연대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점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심지어 이 이론은 앞서 살핀 재외동포들의 디아스포라 문학에조차도 적용력을 갖기 어렵지 않은가. 물론 더 넓게 보자면, ‘세계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의 하위범주로 자신을 위치지을 수도 있겠으나 세계체제극복은 지나치게 요원한 혹은 현안으로 상정하기 쉽지 않은 과제이니만큼, 설득력있는 관계 설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터이다.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론이 끊임없이 과거의 민족문학 및 그것이 구상했던 세계문학론으로 회귀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곧 그것은 ‘흔들리는 민족문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딴죽을 걸면서도 사실 필자는 현실정합성 여부를 떠나서 분단체제론이 우리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력한 틀이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현실과 정확히 정합하는 이론만이(사회과학에서 그런 이론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현실에 대한 타당한 설명력을 갖는 것은 아니므로 분단체제론 역시 이론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그에 입각한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론도, 문학인들의 창작까지 규율하는 이념적 힘으로 작동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우리 문학을 판단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다만 백낙청이 주장하는 대로 분단체제 역시 흔들리고 있다면,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론’역시 그 생명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을 터, ‘흔들리는 민족문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학이념의 모색에 다시 나설 때가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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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민족문학론의 패러다임에 대한 몇가지 반성」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무크지 『크리티카』 창간호(이가서 2005)에 수록되었다.↩
- 「87년 이후의 민족문학론」,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83면. 이하 이 글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 백낙청 「서장: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창비 2006), 16면. 이하 이 글의 인용 역시 면수만 밝힘.↩
- 그러나 필자 역시 ‘민족문학론의 용도’는 나름대로 남겨두었다는 점은 분명히해두고자 한다. 다소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민족문학을 넘어서는 이념의 모색을 위해서 민족문학을 화두로 한 논의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생각이다.(졸고, 앞의 글 88~89면)↩
- 민족지향적 상상력에 입각한 작품들도, 김학철이라는 탁월한 예외를 제외하면, 사실 조국의 분단에서 유래하는 과도한 정치적 상상력으로 인해 작품적 성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이연숙 「디아스포라와 국문학」(『민족문학사연구』 19호, 2001); 박광현 「재일문학의 2세대론을 넘어서」(『일어일문학연구』 53집, 2005) 등 참조.↩
- 황종연 「도전인터뷰—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문학평론가 백낙청과의 대화」,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297면.↩
- 물론 사후적으로 따져보면, 맑스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단결론’은, 그후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다시 부활한 국가별·인종별·계층별 장벽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일종의 ‘근거없는 낙관주의’에 흘렀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맑스시대의 역사적 한계일 터이고, 또 갖가지 장벽을 무너뜨리는 자본의 활동으로 인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할 가능성이 주어진다고 진단한 것 자체는, 죽은 객관성이 아니라 실천적 가능성의 견지에서 시대를 해석한 정당한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프랑꼬 모레띠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프랑꼬 모레띠 「진화론, 세계체제, 세계문학」(『안과밖』 18호, 영미문학연구회 2005), 그리고 모레띠의 「세계문학에 대한 추측들」 및 「더 많은 추측들」에 대한 비판적 논평인 유희석의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프랑꼬 모레띠의 발상을 중심으로」(같은 책) 등을 참조했다. 그러나 모레띠의 세계문학론은 세계문학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기획의 산물로서, 이 글에서 다루는 이념적 세계문학 구상과는 다소 차원이 다르다.↩
- 이에 대해서는 졸고, 앞의 글 83면에서 거칠게나마 다루었다.↩
- 2004년 2월 크리티카 동인들의 쎄미나에서 차원현(車元鉉)이 이 작품에 대해 비유적으로 내린 규정.↩
- 필자는 「민족문학론의 방향조정을 위해」 「세기전환기, 민족문학론에 대한 단상」 등의 글에서 이미 우리 현실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수렴’해버리는 분단체제론에 대하여 문제제기한 바 있다. 졸저 『민족문학을 넘어서』(소명출판 2000), 36~41, 62~69면 참조. 특히“세계체제의 하위체제인 분단체제가 환경보전에 유달리 불리한 체제”(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44면)라거나,“IMF사태로 상징되는 경제위기가 분단체제의 특정시기에 맞게 형성된 ‘한국 모델’의 파탄을 뜻한다”(같은 책 77면) 등의 구절에서 그러한 혐의를 읽어냈다.↩
- 백낙청, 같은 책 21면. 그렇다면 분단이 극복되면 분단체제 역시 자동적으로, 극복은 아닐지라도 해소는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