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계간평 │ 소설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모욕의 바닥과 소설적 진실
김인숙(金仁淑)의 「조동옥, 파비안느」(『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에는 잠시 숨을 멈추고 소설 화자의 ‘말이 되지 못한 아픔’을 생각하고 살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이 특별하다 싶은 것은, “묘지의 글자들을 해독할 때면,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호흡을 완전히 정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화자의 진술이 그 자체 이 작품의 욕망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발굴과 해독(解讀)을 기다리는 묘지(墓誌)의 글자들에 자신의 소설 언어를 겹쳐놓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시도는 다소간 과장된 서사의 매듭을 적절히 여미면서 작품의 형식미를 끌어올리고 있다.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브라질에서 날아온 한 장의 편지다. 16년 전 열여섯살 먹은 소녀였던 화자를 이혼한 남편에게 맡기고 브라질로 떠났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죽음을 전하는 포르투갈어 편지를 해독하는 과정과 670년 전 고려 땅에서 죽은 수령옹주의 묘지를 해독하는 과정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형식으로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수령옹주는 사랑하는 외동딸을 원나라의 공녀로 빼앗긴 뒤 아픔이 골수에 스며드는 ‘통입골수(痛入骨髓)’의 지경에 빠져 병들어 시름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게 화자가 한자 한자 숨을 멈추고 풀어낸 묘지의 내용이다. 문제는 수령옹주 묘지처럼 죽은 자를 따라 땅속에 묻힌 언어에 화자가 매혹되는 이유일 터인데, 고고학적이고 금석학적인 시선을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억압된 무엇’의 존재가 여기에 가로놓여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것은 브라질에서 날아온 편지가 해독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이미 오래전에 떠나온, 당신의 나라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이 편지를 쓴 ‘나’는 누구인가. 편지를 쓴 이의 나이는 만 열여섯으로, 화자와 어머니가 헤어져 살아온 햇수와 같다. 어머니가 브라질에서 두번의 결혼을 더 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한 아이 같다. 그런데 농담 같기도 하고, 백주의 악몽 같기도 한 사연에 따르면 화자는 열다섯에 아이를 뱄고, 열여섯에 아이를 낳았다. 딸의 뱃속에서 아이를 꺼낸 것은 이혼 직후의 어머니였다. 화자는 출혈이 계속되는 몸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옮겼고 얼마 후 어머니는 브라질로 떠났다. 화자는 아이가 어머니의 손으로 ‘버려졌다’고 믿었고 더이상의 사정은 소설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물론 편지를 쓴 이의 나이라든지 편지를 읽어나가는 화자의 태도가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접 진술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어서 독자는 일정한 혼란 또는 오독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열여섯살의 출산이라는 사건은 그 전후 맥락의 의도적 삭제와 엽기성 탓에 현실감있는 서사 정보로 잘 챙겨지지가 않는다. 그랬기에 어느 순간, 편지를 쓴 아이의 존재가 16년 전의 그 사건과 겹칠 때 꾹꾹 쟁여왔던 소설의 슬픔이 증폭되고, 스스로를 ‘개잡년’이라고 부르며 세상의 모욕과 싸워왔던 어머니의 일생이 새로운 조명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 점, 말이 될 수 없는 슬픔을 행간화하여 묘지의 그것에 대응시키고자 한 작가의 서사전략이 그만큼 성공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그런데 과연,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할 수밖에 없는 법인가. 브라질에서 날아온 편지란 지난 16년간 ‘끝없이 이어지는 나쁜 꿈’속에서 화자가 피하고자 했던 ‘억압된 것들의 귀환’일 터이다. 그러기에 편지의 발신인도 최종적인 의미에서는 화자 자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 사정은 편지를 쓴 이가 실제 16년 전의 ‘그 아이’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을 넘어선다. 동시에 같은 의미에서 수령옹주 묘지의 ‘통입골수’의 사연에 대해 그 수신인이 화자가 되는 것도 우연일 수 없다. 상징적 부채의 변제 혹은 청산을 둘러싼 욕망의 경제에서는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화자가 중앙박물관 금석문 전시실에서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있던 수령옹주 묘지를 ‘버젓한 실물’로 대면하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그것은 과연 사라진 적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그것은 다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혹시 사라져 알 수 없는 곳을 떠돈 것은 그녀 자신의 시간이었던 걸까.”스스로를 ‘개잡년’의 자리에 처형하면서도 “양쪽 팔에 아이 하나씩을 안고, 도도하지도 연약하지도 천박하지도 않게 웃고 있는”여인, 조동옥이며 동시에 브라질 이름 파비안느인 어머니의 새로운 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그 ‘자리’와 ‘시간’의 승인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떠도는 세 통의 편지(브라질에서 온 편지, 수령옹주 묘지, 땅에 묻은 화자의 답장)는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찾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그것이 김인숙 소설이 그간 모욕과 상실의 시간 속에서 일관되게 지켜온 최저선의 윤리임을 확인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묻자. ‘조동옥, 파비안느’의 것이며( “모욕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삶”) 동시에 소설 화자의 것인 저 도저한 ‘모욕’의 바닥은 어디인가. 거기에 혹 삶의 구체를 자기도 모르게 전유해버리는 오만은 없는가. 최근에 나온 작가의 소설집 『그 여자의 자서전』(창비 2005)의 기조저음이기도 한 이 모욕의 정서는(「바다와 나비」에서 작가는 한 인물의 입을 통해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것이며 “살아 있다는”것 자체라고 말한다) 김인숙 소설이 꿈과 환멸의 연대를 포복하듯 지나오며 지니게 된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심연이었고, 그 심연의 윤리적 진정성과 세계 부정의 힘으로부터 적지 않은 문학적 감동을 지속적으로 산출해왔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긴 해도 그 심연은 김인숙 소설에 심리적 깊이를 부여하는 한편에서 때로는 현실에 앞선 선험이 될 위험은 없었던 것일까. 「조동옥, 파비안느」에서 열여섯 소녀의 몸을 가로지른 참담한 시간과 그것을 구원하는 모성의 숭고는 묘지의 그것처럼 숨죽인 상상 저편에서 아득하다. 이야기는 너무 멀리서 들려온다. 소설의 마지막, 전시실 유리에 비친 아이를 안은 여인의 모습은 그 아득함 때문에 감동적이되, 개잡년이었으나 개잡년이 아니었던 ‘조동옥, 파비안느’의 슬픔과 농담까지 두루 핍진하게 비치는 것 같지는 않다. 혹 「조동옥, 파비안느」의 잘 빚어진 미학적 감흥은 소설적 진실의 일정한 희생 위에 있는 것은 아닌가.
2.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김훈(金薰)은 「뼈」(『문학동네』 2006년 봄호)에서 성(聖)과 속(俗)의 존재방식에 대해 묻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김훈 소설이 예의 그렇듯 그 질문은 속되고 혼란스런 인간의 풍속과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수락하는 허무와 비관의 서사 속에 음화처럼 있을 뿐이다. 이 강박적인 김훈 소설의 거듭되는 정황에 특별히 놀랄 일은 없겠지만, 그 음화의 울림이 매번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마다 그 울림에 봉사하는 언어의 특정한 채집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김훈 소설을 읽는 특별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지 싶다.
예컨대 근작 「항로표지」(『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에서 ‘12초 1섬광, 20초 1섬광, 6초 1섬광’등으로 개별 등대들의 고유성을 긴박하게 호명할 때, 그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속수무책의 망망대해를 저마다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항해해야 하는 현대인의 운명에 그대로 달라붙는다. 그런데 이 경우 인간적 호흡을 배제하고 사물의 냉연한 질서를 부각시키는 호명의 레토릭이 일정한 문학적 효과를 얻고 있다면, 「뼈」에서 작가는 “속세 생각 나네요”라는 여승의 한마디에서 ‘시옷’발음 세 개가 스치는 소리를 포착함으로써 인간사의 내밀한 안쪽을 단숨에 열어 보인다. “속세 생각……이라고 말할 때, 여승의 ‘ㅅ’발음 세 개는 날카롭고 가벼워서 바람이 마른풀을 스치는 소리처럼 들렸다.”소설이 진행되면서 ‘석정’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빚에 쫓겨 절에 숨어들어와 있던 술집 여자로 밝혀지는데, 그 두 신분 사이의 거리를 성(聖)과 속(俗)의 그것으로 느끼고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적 근거를 김훈은 ‘ㅅ’발음의 스침을 감지하는 특유의 언어감각으로 마련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AD 4세기 무렵의 철제무기 쇠붙이들이 발견된 유적지 답사차 길을 나선 지방대학 사학과 교수인 소설 화자 ‘나’와 ‘오문수’라는 반건달 조교가 여승의 흩어지는 입김 사이로 희미해서 종잡을 수 없는 엷은 비린내를 맡고 있을 때, 김훈 소설은 그 미망과 세속성의 바닥에서 초월적 시간의 지평을 역으로 환기한다.
그러나 그 환기는 김훈 소설에서 언제나 불가능성의 확인일 뿐이다. 김훈 소설에서 이 거리는 좁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적지에서 발굴된 AD 6세기 무렵의 여자 골반뼈로부터 ‘기원화(祈園花)’로 이름 붙인 여자의 생애를 복원하는 일 역시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푸르스름한 석회질의 결일 뿐”이다. 김훈 소설은 이 불가능을 수락하는 대신 거기에서 반복되는 인간 운명의 형식을 본다. 이 시선에서는 1,400년 전의 골반뼈는 오문수의 ‘헛소리’처럼 기원사에서 풀을 뽑던 가짜 여승 석정의 골반뼈와 같아야 한다. 고고학도 이 경우 소설 화자가 짐짓 외면하는 것처럼 마냥 무력하지만은 않다. “섭양이 부족한 생애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했던 하위계급 여자”라는 고고학의 분석이 그것인데, 여기서 ‘부족한 섭양(攝養)’과 ‘강도 높은 노동’의 흔적이야말로 김훈 소설이 그 진심에서 고고학의 방법을 빌려서라도 거듭 확인하고픈 인간 삶의 원형일 터이니 말이다. 작가가 첫 장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문학동네 1995)에서 신석기시대 여인을 현대 서울 한복판 장님 안마사 여자의 팍팍한 삶 위로 불러내 겹칠 때, “노동의 땀과 먼지와 오줌의 찌꺼기”가 악취를 풍기며 서식하는 시원의 ‘고랑’과 안마사 여자의 무방비한 사타구니 앞에서 번갈아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던 사정과 이것은 대응된다. 그러고 보면 화자는 대웅전 계단 아래 쪼그리고 앉은 여승과의 첫 대면에서 젖가슴의 육질과 허리춤의 맨살에다 발뒤꿈치 각질까지 바라보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세속의 욕망과 시간에 갇혀 있는 인간의 육체는 김훈 소설에서 그 유한성에 대한 절대적 연민의 시선 아래서만 매혹의 대상이 된다. 몸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고 직접적일수록 시원이나 초월적 지평을 환기하는 관념의 밀도가 역으로 상승하는 것이야말로 김훈 소설의 낯익은 풍경이 아니던가. 그런만큼 저녁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든 여승의 흰 목과 가슴에서 목으로 올라가는 힘살과 핏줄의 도드라짐이 절마당 5층 석탑 기단에 새겨진AD 4세기 피리 부는 여성의 환각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굳이 그렇게까지 누설할 필요가 없는 김훈 소설의 투명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해, 온갖 허접하고 속된 행동으로 ‘기원화’의 시간을 야유하고 조롱하는 조교 오문수의 기행이 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의 역설임은 자명하다.
이렇게 「뼈」는 다시 한번 양보 없는 김훈 소설의 원점을 이룬다. 벗어날 수 없는 세속의 시간과 인간의 유한한 육체 너머에 있는 아득한 시원의 시간이 좁혀질 수 없는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 그 완강한 원점의 풍경이겠거니와 소설적 탐험의 여지를 스스로 제한하면서 언어의 밀도만으로 소설의 영토를 밀어붙이는 이 예외적인 글쓰기가 “내가 모르는 시간의 입자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번창”하는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김훈 「강산무진도」, 『내일을 여는 작가』 2006년 봄호)에 가닿을 수 있을까. 아마도 김훈 소설은 그 불가능을 자신의 소설 언어로 입증하는 역설의 시간 동안만 소설의 운명을 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3. 작은 서사들의 자유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서사는 현실적인 의미 연관 속에 있고 인간과 세계의 진실은 그 서사의 통합적 추구 속에 담겨 있다. 인물의 내면은 진실을 비추는 원천으로 존중되고 인물의 행동은 서사의 의미망에 연결된다. 그리고 작은 서사 단위들은 최종적으로 소설의 진실에 봉사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서사를 통해 세계를 의미화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습화된 서사의 틀은 소설의 역사에서 늘 회의와 도전의 대상이었다. 이른바 반(反)서사의 욕망은 소설의 갱신을 추동해온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던가. 최근 윤성희(尹成姬) 소설이 보여주는 유다른 활력과 신선함은 이 점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바가 있다. 그것은 딱히 반서사는 아니되, 단일한 서사의 지배를 거스르는 다수의 작은 서사들로 넘쳐나는 가운데, 이로부터 특별한 소설적 에너지를 길어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재채기」(『문학사상』 2006년 4월호)는 ‘고백의 날’이라는 동화 같은 상상력을 가운데 두고 그 ‘고백의 날’의 기원을 찾아가는 젊은이들의 기이한 여행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요약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 소설은 처음부터 문장과 문장 사이에 커다란 이야기의 공간을 남기면서 정신없이 서사의 표면을 미끄러져간다. 가령, 소설 화자 ‘나’가 고백의 날에 연인으로부터 결별을 통지받은 H와 나누는 소설 전반부의 대화를 보자. 여기서 고등학생이던 H가 여동생이 처음 생리를 시작한 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대목은 아버지의 폐암 선고와 그에 얽힌 딸들의 결혼 실랑이를 비롯, 재연 프로그램의 사기꾼 역을 자주 맡다 진짜 사기꾼이 되어 감옥에 가 있는 여동생의 이야기, H의 이혼,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까페와 식당과 술집의 에피쏘드 등등, 이야기의 선조적(線條的)인 진행을 방해하는 많은 이야기 다발과 함께 있다. 행의 구분도 없이 이야기들은 건너뛰고 뒤섞이며 질주한다. “그날 내가 죽었다면 웨하스는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이 되었을 거예요”라고 H가 웨하스를 싫어하는 이유를 고백하게 되기까지 독자는 많은 이야기의 곁가지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백의 종착점에 특별한 비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 역시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의 곁가지일 뿐이다. 이렇게 윤성희 소설은 관습화된 단일한 서사의 고정점을 거부하면서 하나의 텍스트 속에 많은 서사들을 열어둔다. 그 서사들은 상당한 정도 자립적이고 중심서사로의 종속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백화제방(百花齊放)의 개방성이 인간 진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위계화하지 않고 그것들의 리좀(rhizome)적 생명력을 고양하는 윤성희 소설의 미덕을 이룬다. 의도적으로 심리적 깊이를 제거한 투명한 문장들은 종종 하나의 서사공간처럼 기능하기도 해서 이 개방성을 돕는다. 윤성희 소설은 단일하고 집중된 서사의 지배로부터 작고 다양한 서사들의 자유를 이끌어냄으로써 반서사의 서사 해체와는 다른 지점에서 한국소설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는 듯하다.
「재채기」가 긴 우회 끝에 ‘고백의 날’의 기원에서 발굴해 보여주는 이야기가 또다른 많은 이야기의 기원과 생성의 풍경을 이룬다는 점도 이와 관련해서 시사적이다. 1972년 ‘대통령배 세계청소년 도미노 경연대회’에 한국대표로 나온 여자아이가 경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대회를 구경하던 박모라는 인물은 심한 감기에 걸린 탓에 큰소리로 재채기를 하게 되고 그 소녀의 도미노 경연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수치심을 못 견딘 소녀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가족을 버리고 혼자 떠돌이 생활을 한다. 훗날 그는 ‘고백의 날’이 들어 있는 달력을 만들어 관공서 앞에서 무료로 배포한다. 라디오방송을 타고 사연이 알려지면서 숱한 고백의 편지들이 방송국과 긴 방황 끝에 돌아온 그의 집으로 날아든다. 문제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의 표면적 현실성도, “고백을 해본 사람들은 고백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박씨 노인의 뒤늦은 깨달음도 아닐 것이다. 윤성희 소설이 답답한 현실의 인과와 압력 너머에서 고독한 단자들 사이에 찾아드는 기적 같은 연대의 순간을 찾아 헤매고 있음은 구문(舊聞)에 속한다. 윤성희 소설 속의 동화는 그 기적의 어려움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밑그림일 뿐이다. 그것의 현실성은 동화적 위장 속에 슬프게 숨겨져 있다. 그 동화의 끝, 편지지로 도배된 박씨 노인의 방에서 수많은 고백의 사연들 속에 둘러싸여 “눈을 뜬 채”단잠을 자는 소설 화자의 모습은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누설해버린 윤성희 소설의 기원의 풍경은 아닌가. 정작 화자 자신은 편지지에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는데, 윤성희 소설의 서사주체가 누구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빈 편지지를 벽에 붙이자, 벽에 적혀 있는 수많은 사연들이 언젠가 앞으로 내가 겪어야 될 이야기들인 것처럼 느껴졌다.”독아론적 ‘나’를 지우고 그 빈 공간에 복수의 ‘나들’을 끊임없이 드나들게 하는 윤성희 소설의 수다스런 고독이 애잔한 울림을 남긴다.
4. 한국 소설의 낯선 외부를 기다리며
조선희(趙善姬)의 첫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 2006)의 수수함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왜일까. 오랜 저널리스트로서의 이력이 반영된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선희 소설의 문장은 간결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다. 단편들마다 고단하고 착잡한 인생살이의 국면이 다양하게 펼쳐지지만 그것들이 어떤 특이한 발견과 통찰의 조명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싶은 삶의 감각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묘하게 소품적 진실의 힘이 조용하게 배어나오고, 햇빛 찬란한 나날들을 뒤로 남긴 성숙한 시선이 읽는이를 위로한다. 새롭고 강렬한 문제의식이나 소설 미학의 갱신에 대한 강박적 요구에서 벗어나 동시대 한국인의 시간 속으로 몸을 낮춘 채 그 세태와 풍속을 탐사하고 기록하는 작가의 수수한 손길이 그 자체로 미덥다.
예컨대 「경리 7년」에서 작가는 자신의 업무에 곧이곧대로 성실한 출판사 경리 7년 경력의 여성이 버스를 타건 식당에 가건 자동적으로 그곳의 손익계산서를 머릿속으로 뽑아보는 강박증적 집착에 빠져버린 상황을 금전출납부를 기록하는 고참 경리의 솜씨로 정확하고 꼼꼼하게 묘파해낸다. 사촌동생의 죽음을 위로하는 굿판에서까지 작동하는 그 강박증의 대차대조표에서 정작 그 집착의 병리적 기원이라 할 세계의 기만과 위선적 체계는 기입항목 없이 철저히 누락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바, 그 상황의 아이러니를 좁디좁은 7년차 경리의 내면에 촛점을 맞춘 정직한 세태의 탐사를 통해 풍자적으로 드러내는 솜씨가 어지간하다. 그러나 이 경우 소설적 작위의 냄새가 얼마간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인데, 샴쌍둥이 이야기를 다룬 「메리와 헬렌」이나 직장상사와의 갈등을 저주인형 이야기로 풀어낸 「부두키트 세러피」 같은 작품에서 그 작위는 「경리 7년」이 지켜낸 절제 바깥으로 나가버린 인상이다. 보다는 조선희 소설의 담백하고 성숙한 맛은 표제작 「햇빛 찬란한 나날」이나 「한때 우리 신촌거리에서 만났지」 같은 작품에서 보듯 소설적 의장을 거의 벗어버린 에쎄이풍의 자유로움 속에 있는 것 같다.
표제작은 니체, 헤쎄, 전혜린이 환기하는 자유의 환영을 좇아 독일로 갔고 그곳에서 쎅스까지 공유하는 ‘본게마인샤프트’라는 주거공동체 생활을 하다 17년 만에 귀국한 한 중년여성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소설 화자 ‘나’가 “쉽게 상처받지만 쉽게 지치지도 않는”청춘의 빛나는 한시절, 사라진 이상의 거처를 돌아보는 이야기다. 그런데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없는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이 저녁 먹을 곳을 찾아 아파트단지 주변을 찾아 헤매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식탁 하나뿐인 식당에서 나누는 만찬의 풍경은 참으로 따뜻하고 환하다. 그 환함이 예컨대 다시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독일로 돌아가는 그 여성의 입에서 “딸 이웃에 집 하나를 얻었어요. 사생활이 서로 안 들여다보이는 게 편해요. 나 참. 본게마인샤프트에서 17년이나 살았던 내가 이런 말 하다니”같은 말을 받아내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식당 주인으로부터 버섯수프 레씨피를 받아든 그 여성의 얼굴에서 “인생이 하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발견해내는 장면 또한 조선희 소설이 선사하는 범속한 트임의 순간으로 조용히 빛난다. 이상으로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 있다면, 그 빛이 퇴락하는 시간도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퇴락의 시간이 보존해내는 생의 어떤 진실도 반드시 있지 않을까. 조선희의 「햇빛 찬란한 나날」은 그 진실의 존재를 ‘노르웨이의 숲’의 만찬에서 잠시 가리켜 보일 뿐 그 진실의 풍경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내게는 그 유보와 머뭇거림이 조선희 소설의 미덕이자 가능성으로 보인다. 그것은 담담한 지혜와 연륜의 언어로 쌓아가는 한국소설의 낯선 외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