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총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자
여느 총선보다 국민적 관심이 뜨거웠던 4·15 총선이 끝나고 17대 국회가 개원을 앞두고 있다. 검찰의 부패정치인 수사, 야당의 대통령 탄핵, 그리고 그것에 거세게 항거한 대중의 촛불시위에 연이어진만큼 총선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선의 결과 또한 주목할 만한 것으로 초선의원이 70%에 이를 만큼 대폭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정당체제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열린우리당의 선전, 민주노동당의 약진, 새천년민주당의 실추, 그리고 거의 퇴출이나 다름없는 자민련의 처지로 요약될 수 있는 선거결과는 이번 선거가 상당정도 ‘판갈이’에까지 이른 선거였음을 말해준다.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총선결과가 그리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지역주의적 투표행태가 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큰 힘을 발휘했고, 투표행위의 계층적 분할선도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번 총선이 일정한 변화를 이룩한 것은 1987년 이후의 민주화, 냉전의 해체, 그리고 분단체제의 동요 속에서 한층 성숙한 대중의 개혁적 열망이 어떤 문턱을 넘는 수준까지 성장했기 때문이다.
문턱이 어느 선에 위치하게 되는가를 규정하는 것은 물론 정치구조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 카리스마를 가진 양김의 퇴진과 정치게임의 일정한 규칙변화는 중요했다. 선거란 유권자에게는 결국 사지선다형 시험문제와 같은 것이기에 정치적 선택지의 변화가 없다면 투표가 차선은커녕 차악을 찾는 것에 머무를 때도 많다. 그런 점에서 매우 큰 비용을 치르긴 했지만 정치적 선택지의 변화를 야기한 것은 정당간의 격렬한 투쟁과 선거경쟁에 긍정적인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도입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또한 변화의 가속화에 큰 기여를 했다.
어쨌든 4·15 총선을 통해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은 중단되거나 후퇴함 없이 또 한걸음 나아갔다. 민주화의 역전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은 사회이기에 이번 총선과정을 통해 확인된 민주화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안도할 만한 일이기는 하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과제들을 생각하면 민주화의 진행은 답답할 정도로 더딘 것 또한 사실이다. 미·이라크 전쟁이라는 끝없는 수렁에 이미 반쯤 발을 담근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처지이며,6자회담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의 용천역 폭발사고 같은 처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한반도 상황이다. 몇가지 거대 수출산업과 중국경제의 성장에 힘입어 버티고 있던 우리 경제는 유가 앙등과 중국의 긴축정책 예고, 그리고 미국의 금리인상 소식만으로도 급격히 위축되고 있으며, 신용카드 불량자와 비정규직의 증가로 대변되는 대중의 빈곤화가 나날이 진행되는 가운데 부유층의 자산은 투기자금이 되어 부동산 시장을 떠돌고 있다.
위기와 위기의 지연 또는 폭발의 주기적 교체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세계체제의 과정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근대사를 통해서 우리가 겪은 고난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처한 어려움이 각별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을 이용해 위기담론을 퍼뜨리며 개혁을 좌절시키려는 시도들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시원스레 난관을 타개하고 면모를 일신하는 발전적 양상을 찾기 어려운 것 또한 우리의 현 상황임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은 세계체제, 동아시아, 분단체제, 그리고 남한사회라는 각 단위들의 내적 논리에 의해 생겨난 것인 동시에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민주화의 성과를 장기적인 발전전망과 연계하는 동시에 우리가 처한 복합적인 문제들에 대해 민감하고 적합하게 반응하며 동태적인 균형을 잡아나갈 수 있는 지혜이며, 그런 지혜를 모아 이룩할 새로운 사회발전양식이다. 그것을 이룰 때 한반도에서 ‘일류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욕을 내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남한사회 내부의 개혁역량이다. 그래서 여전히 중요성을 갖는 것이 사회의 집합적 의지를 수용하고 실행하는 장(場)인 정치이며, 이는 우리 모두 총선의 성과를 정당간의 개혁경쟁으로 이어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가 사회의 욕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시에 개혁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한나라당·민주노동당이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게 되는가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면모로 보아 개혁의 내적 추동력을 확신하기 어려우며, 자칫하면 한나라당과의 보수경쟁 및 민주노동당과의 개혁경쟁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위험이 적지 않다. 정치사회적 개혁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정치적 쟁점과 여론을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간의 전선으로 모아 양자의 개혁경쟁과 협력을 고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운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민주노동당이 신중하고 원숙한 정치적 능력을 펼쳐 보이는 것도 필수적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급속히 성장한 우리의 시민운동은 지금 빠른 속도의 이념적 분화를 경험하고 있다. 시민운동이 더이상 개혁의 담지자로 자신을 주장하거나 개혁을 주도하기는 쉽지 않다. 좀더 대중 속에 스며드는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한 동시에 시민운동이 자신의 개혁적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기존 정당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립선을 그을 가능성이 많다. 이라크 추가파병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 등에서 민주노동당은 그것의 실현 여부를 떠나 기존 정당과 각을 세우는 것이 불가피한 동시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적 개혁의 효과가 큰 여러 법률 개정작업, 예컨대 정간법 개정, 사립학교법 개정, 호주제 폐지 등의 작업에서는 원내 반대당을 넘어서는 의정활동을 펼치며 열린우리당을 견인하고 협력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서 창비는 총선을 점검하는 좌담을 열면서 특히 민주노동당과 시민운동이 무엇을 모색해야 하는가를 핵심주제로 삼고, 김상희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박석운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 정관용 정치평론가, 하승창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 등을 모셨다. 좌담 논자들의 논의에 더해 그들의 입지와 전망까지 생각하며 읽어나간다면 독자들이 총선과 총선 이후의 정치상황을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호의 특집주제는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로 잡았다. 종합지로서 문학에 넉넉한 지면을 마련하지 못해오던 창비였기에 이번 문학특집을 위해 문학관련 편집위원과 자문위원 모두가 힘을 모았다. 임규찬·진정석이 나눈, 특집 머리의 대담에 그간 특집을 준비한 과정과 작가·작품 선정경위에 대해 소상히 밝혔거니와, 첨언하자면 1990년대에 등단한 작가들이 지난 5년간 이룬 문학적 성과를 조망하기 위해 그간 창비가 별로 다루지 않았던 작가들의 성과도 고루 짚어보고자 했다. 백낙청은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꼼꼼한 독서와 비평으로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배수아의 진면모를 밝히고 있다. 최원식은 김영하와 홍석중을 중심으로 최근 남북한에 공히 나타나는 역사소설의 새로운 경향이 가진 의미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점검한다. 김영희는 천운영의 소설이 이룩한 묘사에서의 성취와 그것의 한계를 집중 검토했고, 임규찬은 공선옥의 장편소설에 대해 애정어린 비판을 전개하며 그녀가 가지고 있는 체험과 정신적 깊이를 소설에 담길 요청한다. 한기욱은 김연수의 형식실험이 한국문학의 문맥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살폈고, 진정석은 성석제 소설의 성취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백지연은 소비사회의 자기해부를 시도하는 이만교와 정이현의 소설에 스민 내밀한 불안을 짚었다. 검토되어야 할 작가와 작품 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한편, 강영숙 소설집에 대한 임홍배의 촌평은 특집에 대한 보완이 된다.
특집에서 최근 소설을 점검했다면 이번호 시란은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 및 그 성과를 실제 작품으로써 보여준다.1999년 이후 등단해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신예시인 20인을 선정해 묶었는데, 신예들의 다채롭고 개성적인 목소리가 신선한 울림을 준다. 소설란에는 우선 부산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이규정의 작품을 소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특이한 타자성을 드러내는 아내를 남편의 시선으로 그려 현대인의 소통문제를 개성적인 방식으로 제기한 신경숙과 한강의 소설, 그리고 간결하고 독특한 어법을 구사하는 신예 윤성희의 작품 또한 읽는 재미를 더한다.
논단에도 주목을 바란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의미를 분석한 이영호의 글과, 동아시아에서 근대 초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국학이 한·중·일 3국에서 제각기 다른 운명을 겪은 연유를 분석한 임형택의 글은 학문의 지정학을 논하며 새로운 담론의 장이자 대상으로서 동아시아의 존재에 대해 논하고 있다. 세계체제의 새로운 국면과 동아시아 학문 배치의 연관을 대비하는 논의로 이어질 만한 귀중한 글들이다.
이외에도 개발독재가 덮어버린 청계천을 복원하는 데 다시 개발독재의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는 박명도의 시평과 미국의 헤게모니에 안주함으로써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있는 코이즈미의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한 머코맥의 글 또한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 「사마리아」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다루는 김윤영의 영화평, 다시 보는 국립극단 50년대 대표작에 대한 이상란의 연극평,제1회 한국대중음악상의 의의를 짚은 김지영의 음악평까지 문화평 역시 눈여겨볼 만하고 화제의 책과 의미있는 책을 다룬 촌평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편집진이 각별히 생각하는 ‘독자의 목소리’란에 참여한 여러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지난 2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정기구독자 모집 특별행사’가 진행중이다. 사회의 공론 창출을 지향하는 창비에 독자 여러분의 애정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성원과 질책을 바란다.
金鍾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