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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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창비 2007

텅 빈 중심에서의 고독

 

 

김형중 金亨中

문학평론가 unabomber5@hanmail.net

 

 

아름다운-나를-멸시신작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붙인 작품 해설에서 평론가 신형철(申亨澈)은 작가 은희경(殷熙耕)을 일러 하나의‘장르’라고 말한다. 찬사의 과장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만약 은희경이 하나의 장르라면 그 장르가 품고 있는 관습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있겠다. 관습 없이 장르가 성립하는 법은 없을 테니까.

내가 보기에,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은희경이란 장르의 관습은‘자아의 분리’다. 『새의 선물』의 강진희가 바로 그 관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10여년 동안,‘연미와 유미’(「연미와 유미」)‘애리와 진희’(『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진과 준’(『그것은 꿈이었을까』) 등등이 그 관습을 유지시켰고, 마지막으로 『비밀과 거짓말』의‘영준과 영우’형제가 그 관습을 완성했다. 한 인물 내부의 두 자아로 나타나건, 육체를 달리하는 두 인물로 나타나건, 형제나 자매 혹은 친구 같은 짝패(double) 인물들로 나타나건, 그들이 연기와 관람을 동시에 수행하는 분열된 자아의 양면이었단 사실에는 달라질 게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 관습의 시작과 끝에 각각‘아버지’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새의 선물』 말미에‘농담’처럼 등장했던 아버지가 『비밀과 거짓말』에서 무수한‘비밀과 거짓말’을 남겨둔 채 죽는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아버지야말로 은희경의 소설세계 10년을 추동했던 분리된 자아의 기원이 아니었던가!『새의 선물』의 마지막 장면은 그 증거가 될 만하다. 내내 부재하던 아버지가 등장하자,‘보여지는 나’는 말한다. “공손하게 인사를 해. 침착하게.” 그러나‘바라보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라고? 농담이야.” 이처럼 은희경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자아의 분리는 대타자 아버지에 대한 자아의 두가지 태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아와, 아버지와의 단절을 욕망하는 자아로의 이 분리는 10년 후 『비밀과 거짓말』에 이르러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결정적인 국면을 맞는다. 아버지가 죽고, 게다가 그의 세계가 온통 비밀과 거짓말투성이였음을(그러니까 텅 빈 결여였음을) 확인한 후,‘보여지는 나’즉 아버지의 결여를 인정하지 않던 그 자아는 일종의 환란을 경험하게 될 터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이제 은희경이 10년 동안 자신의 소설세계를 추동해왔던 부재 원인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으로 읽어 무방했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내가 다소간의 단순화를 무릅쓰고 은희경의 소설세계가 한 주기의 순환을 마쳤다고 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런 맥락에서 읽을 때,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은희경 문학 10년을 총정리하는 단편이다.‘B’와‘나’는 지난 10년 내내 그랬듯이 여전히 서로의 결여에 의해 정의되는 은희경식 짝패 인물들이거니와, 보띠첼리의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의 대립, 지방을 요구하는 본능적 자아와 다이어트를 지속하려는 이성적 자아의 분리 등은 (이 작품집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은희경 장르의 단골 메뉴를 반복한다. 그리고‘나’의 다이어트가 사실은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 자아의 분리 이면에는 여전히 기원으로서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말미는 그간의 관습과 다르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시작한 다이어트의 끝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평생을 꿈꿔왔던 그 세계가 총체적으로 오인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버지의 빈소에서 화자가 본 것은 평생 자신이 생각했던 것(“나는 늘 아버지 세계의 사람들을 상상하곤 했다. 어른들은 모두 품위있고 다정하며 아이들은 순진하고 영민할 것이다”)과는 달리 “흔히 보아오던 그런 사람들”“세월의 주름 속에 희비를 담고 있었으며 사는 데 지쳐 보이기도 했고 작은 일에 위안을 얻거나 허세를 부리는, 보통의 삶을 끌고 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처럼 뚱뚱한 조카들이었다. 빈소에서 그가 본 것을 라깡적인 용어로 옮긴다면, 그것은 당연히‘대타자의 결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그간 은희경의 주인공들이 앓아온 이중(다중)인격장애는‘결여의 결여’, 즉 대타자 또한 나처럼 결여에 시달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그런 이유로,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대타자의 결여를 본 화자가 소설 말미에 자신의 몸(스스로 분리시켰던 본능적 자아)과 화해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알고 보니 내 몸이 바로 내 거였어.” 그렇다면 이 순간은 대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스스로를 제 욕망의 주체로 선언하는 주인공이 은희경이라는 장르에 도입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고, 10년 동안 분리되었던 자아들이 온전한 하나의 주체로 통합되는 장면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러 작품들에서 반복되는‘지도’의 테마를 읽는 독법도 이와 같을 듯싶다. 가령 평생 그 완전무결함을 의심하지 않았던 대타자(그는 내 생명의 기원이기도 한데)의 결여를 목도하고 만 자의 심리적 상태와, 평생 원점 O와의 거리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곳 그리고 나아가야 할 지점 P의 좌표를 그려왔으나 정작 그 지점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장소임을 확인한 자의 심리적 상태는 등가가 아닐까? 작품집 최고의 문제작 「고독의 발견」의 다음 구절은 그런 점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W시에 대한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여행길에 들렀던 고판화 박물관에서였다. 벽에 걸린 옛 지도의 가운뎃부분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지도란 접어서 갖고 다니는 물건이지요. 안내인이 설명했다. 바로 지도의 한가운데 지점이기 때문에 가장 많이 닳아서 구멍이 난 겁니다. 그 구멍자리가 W시였다. 그럼 구멍난 곳이 중심이고, 또 원점이란 뜻이네요? S의 질문이 떠올랐다. S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떠났던 여행이었다. 원점이라는 말에 이끌려 나는 전혀 관심이 없던 고지도를 다시 한번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간직하고 다닌 탓에 닳고 해져서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져버린 중심, 그곳이 W시였다”(49~50면). 구멍 안으로 사라져버린 텅 빈 중심‘W시’, 그곳이야말로 아버지의 처소이자 대타자의 결여상태에 대한 탁월한 지정학적 은유가 될 만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화자가 발견한 고독은 일상적인 의미에서‘현대인의……’‘소외된……’같은 어사들과 함께 쓰이곤 하는 식상한 고독이 아니다. 그것은 대타자의 결여라는 몸서리쳐지는 환란과 마주친 자의 고독, 말하자면‘주체’전체를 걸고서야 발견한 절체절명의 고독이다. 「지도 중독」의 M이 P선배의‘좌표 P를 구해도 목적지는 알 수 없다’는 전언 앞에서 느꼈던 것도, 1991년에 쏘비에뜨의 코스모나츠들이(그리고 분신정국에 있던 한국의 K와 M도) 사라져버린 조국(그 집요한 원점 O) 앞에서 느꼈던 것(「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도 그와 같은 고독이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은희경 소설에서 이즈음 눈에 띄게 증가하는 의심들, 짐작과는 다른 일들(「의심을 찬양함」)에 대해서도 우리는 너그러워질 수 있어야 한다. 대타자가 그려준 자명한 좌표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과 발로 스스로의 위치와 목적지의 값을 구하기로 한‘주체’에게, 세계는 아마도 의문과 우연 들의 거대한 연속일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터이거니와, 90년대 내내 우리 소설이 추구했던, 그러나 항상 미진했던‘내면성’이 그런 방식으로 은희경에게서 완성될 수 있다면 말이다.

김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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