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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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생각하는 한국문학의 보편성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공저서로 『소진의 기억』,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보편의 공간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길지 않은 장편 『하얀 성』(문학동네 2006, 원작은 1985년)에는 문학의 보편적 공감의 원천을 되새기게 하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하얀 성』은 17세기 오스만투르크제국을 무대로 서양의 과학적 광명을 갈구하는 오스만 사람 호자와 터키 함대에 포로로 잡혀 노예 신세가 된 이딸리아 청년‘나’사이의 수십년에 걸친 인생 교환의 서사를 담고 있다. 이 소설에서 동서문명의 거울게임이나 정체성의 혼종적 역전은 그것 자체로 만만찮은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러고 말기에는 서사의 표면을 넘어서는 아이러니의 진폭이 자못 크다. 소개하려는 대목이 그러하다.

줄곧 이딸리아인 노예‘나’의 시점에서 전개되던 소설은, 폴란드 원정길에서‘나’와 호자가 서로의 인생을 바꾸게 되면서, 에필로그격인 마지막 11장에 이르면‘나’가 이딸리아로 사라진 호자 대신 호자의 삶을 살며 호자의 이름으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추억과 상상 속에서 기술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하얀 성』의 이야기가 자신의 전작 『고요한 집』(1983)에 등장하는 역사가 파룩 다르븐오울르가 1982년 터키 게브제군(郡)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필사본을 현대 터키어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파룩의 이름으로 소설 모두(冒頭)에 서문을 붙여 이중의 허구화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그러니까 이 필사본의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 묻는 모호한 퍼즐게임부터가 정체성의 혼종적 교환이라는 『하얀 성』의 심각한 주제의식에 닿아 있으면서 풍성한 소설적 흥미의 토대를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마도 탈식민주의가 즐겨 문제삼는 정체성 테마에 대한 전범적 작품의 한 예라 해도 무방하지 싶다.

그런데 이 현란하기까지 한 이야기의 마지막에 작가가 꺼내드는 카드는 동서양을 사이에 둔 기이한 운명극에 어울릴 뜻밖의 반전이라든가 있을 법한 인간적 회한에 대한 클라이맥스적 강조가 아니다. 혹은‘나는 왜 나인가’하는 근대가 자랑하는 철학적 질문에 포스트모던풍 소설이 내놓기 쉬운 언어의 연쇄와 미끄러짐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미로의 제시도 아니다. 소설은 이딸리아인‘나’혹은 오스만인 호자‘나’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고향집의 평화를 다시 상상하며 끝난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개 쟁반에는 복숭아와 체리가 있었다. 탁자 뒤에는 골풀로 짠 긴 의자가 있었고, 그 의자 위에는 초록색 창틀과 같은 색 새털 쿠션들이 놓여 있었다. 곧 일흔살이 될 나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 뒤로 우물가에 앉은 참새와 올리브나무 그리고 체리나무들이 보이고, 이것들 뒤에 있는 호두나무의 높은 가지에는 긴 끈으로 묶은 그네 하나가 희미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246~47면) 고향집 뒤편 정원을 향해 나 있는 창문으로 보이는 이 풍경은 포로로 잡힌 이딸리아인 노예‘나’가 신임을 받던 파샤로부터 목숨을 건 개종 압력을 받던 순간 떠올린 것이기도 하다.(44면) 호메로스의 『오디쎄이아』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귀환의 서사가 주는 문학적 감동의 자리는 넓고 유구하다.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소설 『하얀 성』이 기나긴 정체성의 모험 끝에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귀환의 지점으로 유년의 고향집 풍경을 다시 상상할 때, 독자는‘나’와‘호자’라는 분열된 주체가 회복하려는 조화로운 전체성의 어떤 그림자를 깊은 문학적 울림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동서양의 우열이나 지배-피지배를 둘러싼 담론, 근대적 주체의 철학, 주인-노예의 변증법이 들려주는 세계의 복잡다단한 이해 너머에 조용히 남겨져 있는 인간 진실의 수수한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성』에서 측량기사 K에게 현실적 미궁이자 도무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접근 불가능한 세계의 심연으로 남는 성(城)처럼, 파묵이 그려낸‘하얀 성’은 서양문명의 흉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호자의 발명품을 조롱하는 난공불락의 성이면서 종국에는 돌아갈 수 없는 낙원의 시간에 대한 끝없는 향수 속에 인간 운명의 고단한 모험들을 배치하는 도달 불가능한 지점의 알레고리로 성공적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17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세계는 지금 이곳에서 얼마나 멀고 낯선가. 책 뒤에 붙인‘작가의 말’을 보면 오스만의 후예인 파묵 역시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다한 자료를 섭렵한 것으로 되어 있다.‘작가의 말’을 조금 더 읽어보면 가족사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20세기 터키인의 삶을 그려낸 작가의 첫 소설 『제브뎃씨와 아들들』(1982)이 발표되자 이 작품에‘역사’소설이라는 이름이 따라다녔고 평단의 일각에서는 “중요한 일상의 문제에서 도피하기 위해 역사에 몰입한다”(252면)는 비판이 있었던 모양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비판에 대해 작가는 “『고요한 집』을 집필한 후, 내 눈앞에 역사적 상상이 들끓기 시작하자 이러한 의견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252면)고 하면서 “어느날 궁전에서 부름을 받고 한밤중에 푸른빛이 도는 거리를 걷고 있는 한 예언자”(250면)에 대한 희미한 구상에서 출발한 『하얀 성』의‘역사’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과학과 천문학 서적에 즐거이 파묻혔다”(252면)고 밝히고 있다.‘도피’라는 비판을 수긍하고 역사적 상상의 세계로 기꺼이 향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자신의 문학에 대한 역설적 자신감을 읽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터키문학의 문외한으로서 구체적인 논평은 불가한 처지지만, 번역으로나마 『하얀 성』을 읽어본 소회를 말한다면 작가는 터키의‘중요한 일상의 문제’로부터‘도피’한 게 아니라 그것을 좀더 넓은 지평 속에서 사유하고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문학적 표현을 찾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경우 역사소설이라는 외양은 당연히‘도피’와는 무관할 것이다. 오히려 서사의 진행 도중 필사본의 회고와 기술이 시작되는 시점과 상황을 거듭 환기시키는 메타소설적 시선을 통해 진행중인 이야기가 사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구성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를 비롯, 『하얀 성』은 소설의 역사가 그간 성취해낸 창의적 기법들을 적절히 구사하며 역사소설이라는 장을 현대적인 주제와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새로운 문학의 영토로 쇄신하고 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낯설고 먼 오스만투르크의 이야기가 2000년대 한국 땅에서 보편의 공간을 열고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리라.

 

 

2. 세계문학이라는 타자

 

물론 세계문학과의 관련 속에서 한국문학의 창조적 활력을 생각해보고자 할 때 지금 이야기한 보편의 공간은 전혀 만만한 논의의 출발점이 아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한편을 예로 삼아보기도 했지만 정작‘보편의 공간’이 어떻게 열리는가 하는 문제는 난문 중의 난문이다. 당장 그 보편은 한국문학이라는 주체의 자리에서 검토되지 않으면 안될 텐데, 그때 보편은 말 그대로 자명한 것일 수 있는가. 세계문학이라는 호명이 대개는 서양 주도의 문학장(場)을 일컫는 현실에서 그것은 서양 근대의 제국주의적 비전을 어떤 차원에서든 내면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한국문학은 서양 근대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완성해놓은‘문학’이라는 심미적 제도에 뒤늦게, 그것도 자기 의지와 자기 현실의 숙성 없이 뛰어든 형국이었다. 자기표현과 세계이해의 장치로서 한국인이 오랫동안 가다듬어온 고유한‘문학’의 전통은 이 과정에서 심각한 정체와 단절을 겪어야 했다. 자생적 변화와 발전의 싹들은 뒤틀리고 억눌렸다. 제국주의의 이해가 충돌하는 가운데 식민지, 분단과 전쟁, 개발독재의 암운이 쉴새없이 몰아닥친 지난 세기 한국인의 착잡한 역사는 당연히 현대 한국문학의 발생과 전개에도 그 파행적 어둠을 강하게 남겼다.

그러나 역사나 문학에서나 그 과정이 마냥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음도 우리는 익히 안다. 가령 일제강점기 한국의 시인 작가 들은 식민지체제가 근대 서구문명의 값싼 외관과 함께 들여다놓은 기만적이고 불구적인 근대적 개인의 공간에서일망정, 한편에서는‘궁핍한 시대’의 민족 현실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세목 속에서 비판적으로 천착하며 문학을 통한 현실 응전의 계기를 모색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외와 무기력에 찌든 지식청년들의 삽화를 통해 식민지 현실과 겹쳐 막 도래한 현대적 삶의 비참한 국면을 표현했다. 민족어와 토착어의 세련에 궁구한 일군의 노력도 지속되었다. 제국주의 정치선전에 몸을 실은 문학의 타락도 있었지만, 심각한 식민지적 제약 속에서도 한국인의 자기표현과 세계이해는 전체적으로 문학을 통해 확장되었고, 이 과정은‘그들의 문학’이 한국인의 인식과 성찰의 공간으로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강압적 개방의 역사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서양의 문학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자 낯선 타자였으되 근대적 자아의 신천지가 당장 열릴 듯한 강렬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 유혹 앞에 선 한국문학의 초라한 출발은 다 아는 대로, 서양문학의 이입사에서 한국보다 앞섰던 일본문학의 직접적 학습이나 일본문학을 매개로 한 서양문학의 번안적 학습이었고, 소장 일본 유학파들이 주축이 된 동인지 중심의 허약한 문단제도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사건(1942.10.1)부터 해방까지 한국어가 조선총독부의 직접적인 통제 속에 들어간‘이중어글쓰기 공간’(김윤식)의 암흑기를 한 예로 생각해보더라도, 한국문학이 압도적인 식민지의 강제와 서양문학의 박래적 유혹 속에서도 좌초하지 않고 부족한 대로 근대적인 자기 형성과 발전의 모태를 이루어낸 일은, 그만한 주체의 고투가 있었던 것이지만, 기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식민지의 직접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뒤에도 현대 한국문학의 전개는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수다한 현실적 시련과 결핍의 조건 들과 뒤엉켜야 했다. 전후 최초의 한글세대이자 4·19세대 비평가로 뚜렷한 비평적 자의식을 견지했던 김현이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짧은 산문에서 프랑스문학에 거짓 동화되었던 자신의 청년기를 반성하며 “나는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라 프랑스문학을 피부로 느낀다고 믿은 정신의 불구자였다”(「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 『상상력과 인간』, 일지사 1973)고 썼을 때 이 착잡한 자기비판은 식민지 시기는 물론 20세기 현대 한국문학 전체가 원죄처럼 감당해야 했던 어떤 불구적 상황을 더없이 아프게 건드린다.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 한국인의 이러한 뿌리뽑힌 정신성의 풍경은 가령 최인훈(崔仁勳) 소설의 지적인 풍속 비판 같은 데서 뛰어난 문학적 표현들을 얻고 있기도 하지만, 식민지 해방 이후에도 전쟁의 폐허와 함께 또다른 식민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한국인의 역사 현실을 엄혹하게 환기한다. 이른바 냉전 이데올로기와 함께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씨스템이 전쟁과 분단으로 폐허 위에 선 한국인의 삶 전(全)부면을 급속도로 뒤흔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통의 죽음과 새것의 압도적 위세 사이에서 정신의 불구성을 가장 아프게 앓았던 세대로부터 한국문학의 주체성이 단절을 딛고 다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방금 비평가 김현의 경우를 언급했거니와, 독립된 국가에서 한글로 교육받고 자라난 최초의 한글세대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들이 성장기에 일본이라는 매개와 구속 없이 마주친 서양문학의 인력(引力)은 어느 면 자신의 정체를 잃을 만큼 강렬했으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식민지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로운 정신의 공기 아래에서였다. 유년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던 전후세대의 어색한 한글문장에 각인된 혼돈의 조건으로부터 이들은 일단 자유로웠다. 여기에 자유의 열망이 극적으로 구현된 4·19의 역사적 체험이 그 좌절을 포함해서 이들 세대의 집단적 기억이 된 사건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4·19의 역사 체험은 『광장』(1960)을 비롯한 여러 뛰어난 문학작품의 산출에도 직접적으로 기여했지만 순수-참여논쟁이 문학적으로 심화되는 구체적인 계기가 되면서 민족 현실과의 깊은 관련이든 꿈과 자율성의 측면이든 한국문학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창조적으로 모색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서양문학 혹은 세계문학에 대한 좀더 자각적이고 주체적인 대응이 싹트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길지 않은 현대 한국문학의 역사에서 세계문학이 주체의 자각적 시련 속에 본격적으로 대타적 인식의 지평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4·19세대 혹은 한글세대의 문학적 출현과 함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전후세대를 비롯한 앞시기 한국문학의 빈곤에 쉽게 절망한 이들 세대가 서양문학의 인력에 급격히 흡수되었다가 그 속에서 자기모순에 부딪치고 다시 한국인의 현실과 한국문학의 주체성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두루 명료했을 리는 없겠다. 다만 이 복잡하게 뒤엉킨 전회의 시간에 한국문학 주체들의 아픈 각성 말고도 서양문학의 만만찮은 두께와 세련된 보편성이 긍정적으로 기여했을 가능성은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순히 서양문학에 대한 주체적 시각의 확보 차원을 넘어 괴테나 맑스적 의미의 세계문학 개념을 한국문학과의 열린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그것을 실천적 문학담론으로 만들어낸 것은 70년대의 민족문학론이었다. 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여 시민문학론, 리얼리즘론, 농민문학론, 민중문학론, 제3세계문학론 등으로 여러차례 분화와 종합을 거듭하며 위기에 처한 민족 현실에 대한 정당한 문학적 대응을 강조해온 민족문학론의 강점은 도덕적 정열에 바탕한 문학과 현실의 통합적 인식이었다. 그런만큼 거기에는 당연히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파악을 위한 노력이 전제되어 있었다. 알다시피 괴테의 세계문학 구상은 19세기 초반 유럽중심의 세계교역이 확대되는 자본주의의 일정한 발달단계에 유념한 것이고, 맑스의 경우는 좀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무한팽창을 이야기하면서 “일국적 편향성과 편협성”을 넘어서는 세계문학의 요구를 긴박한 것으로 제시한 바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의 세계문학은 개별 민족국가의 뛰어난 문학작품들이 비교 소통되고, 그 과정에서 선별된 작품들이 인류적 유산으로 집성되고 정전화하는 장(場)을 일컫는 통상적 의미의 세계문학과는 다른 개념이다.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확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에서라면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얻기 위해서라도 개별 민족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인류의 삶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표현하는 세계문학의 공간을 새로이 상상하고 구축하자는 문학적 연대의 촉구가 거기에는 담겨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민족문학론이 대다수 민족 구성원들의 삶이 심각한 위협 속에 놓여 있던 70년대 한국사회 제(諸)모순의 뿌리를 분단에서 찾았을 때, 그것이 한반도 내부의 정치경제적 역학에 국한되는 사안이 아닌 이상 세계적 시야의 확보는 불가결한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순서를 짚는다면, 그런 시야의 확보가 분단 현실의 극복을 이야기하고 민족문학론을 제기한 동력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그러한 민족문학론의 전개가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뒤처지고 억압된 현실에서 오히려 서양 근대가 몰각하고 배제해온 인류사적 과업의 수행 가능성을 본 제3세계문학론에 이르면서, 세계문학은 이제 한국문학이 자신의 성취를 나누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인류사적 비전을 탐구하고 실현하는 주체적인 공간으로 열리게 되었다. 동시에 제3세계문학론은 그동안 외면받아온 비서구문학, 구체적으로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문학을 서양중심 세계문학의 질서와 가치를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하고 관건적인 역량으로 부상시켰던 것이다.

이후 80년대를 지나며 세계질서의 급변과 함께 제3세계문학론은 민족문학론 내부에서도 자기조정을 거치게 되지만, 지금이라면 다소 거창하게도 느껴지는 문제의식이 당시로선 절박한 호흡 속에서 제기되었던 점을 잊을 이유는 없겠다. 오히려 국가간 무한경쟁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단일시장이 돌이키기 힘든 하나의 세계체제로 굳어가고 있는 이즈음, 문학이 참다운 인간적 가치를 옹호하고 조화로운 삶을 모색하는 몇 남지 않은 거점임을 되새길수록 서양 근대에 대한 근본적 방향 전환의 대안으로 제기되었던 제3세계문학론의 문제의식은 새롭게 음미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가령 한동안 널리 읽혔던 중남미문학의 성취도 그러하지만, 최근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중국, 베트남, 팔레스타인 등의 작품들을 후일담적 향수의 시선에서 탈피하여 한국문학의 현재와 소통시키고 세계문학의 새로운 가치로 활성화하는 일만 해도 제3세계문학론의 기본적 문제의식으로부터 도움받을 게 많지 싶다.

그런데 다 아는 대로 80년대말 이후 한국문학의 현장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 변화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도 되리라. 그리고 그 변화 자체에 대해서도, 8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두고 많은 비판이 있었고, 현실과 대결하는 개인의 내면 공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나 세계인식의 구도에서 두 시기 문학이 본질적으로 쌍생아라는 지적도 여러차례 제기되었다. 그런만큼 별다른 첨언이 불필요한 대목이긴 해도, 80년대 한국문학의 중요한 흐름이었던 현실변혁의 상상력이 일정한 좌절을 겪고 문학의 정치성과 거대담론에 대한 반발이 새로운 문학적 상상력을 추동하는 가운데 정작 현실의 정치성은 더 교묘한 형태로 한국인의 생활세계를 빠른 속도로 포위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새삼 확인해두는 게 좋겠다.

돌아보면 90년대 문학이 한국인의 생활세계를 개개인의 복잡한 욕망을 통해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문학적 리얼리티에 대한 다양한 진입로를 여는 동안, 한때 대결과 극복의 지평 위에 있던 현실은 어느 순간 불가항력의 거부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적 가치의 옹호나 조화로운 삶을 위한 개별적인 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거대한 전체였다. 가령 비평가 도정일(都正一)은 그 현실을‘시장 전체주의’라고 부른다. “90년대 이후 세계시장체제는 그것 아닌 다른 대안체제의 성립 불가능성을 세계의 전면적 현실로 규정하고 다른 체제의 미래적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조차 봉쇄한다는 점에서 미증유의 일차원적‘단일’체제이다. 이 체제의 일차원성을 정확히 포착하는 데는‘시장 전체주의’라는 기술이 더 적절하다. 시장 전체주의는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탈중심, 자유와 평등, 자율과 자발성, 관용 등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자기제시의 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세계시장체제의 이 자기재현은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그 체제하에서 삶의 모든 방식들, 사회적 활동과 단위 들을 조직하는 것은 시장논리라는 단일 논리이며, 그 체제하에서 시간과 공간을 조직하고 경험과 가치 들을 지배하는 것은 시장가치라는 단일 가치이기 때문이다.”(「서사적 상상력을 재가동하기」, 『경계를 넘어 글쓰기』, 민음사 2001) 2001년에 제출된 이 비통한 현실진단에서 수사적 과장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물론 이 진단은 근본적인 만큼 추상성이 높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한국인의 현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간을 보더라도 단지 악화일로였다고만 할 수는 없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사회 전반의 민주주의는 확대되어왔으며 분단체제의 흔들림을 이야기할 정도로 남북관계의 진전도 뚜렷하다.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작은 시도들도 활발하다. 그러나 굳이 물신적 가치의 일방통행과 사회적 양극화의 절망적 심화를 말할 것도 없이, 생활세계의 실감에서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앞에 선 개개인의 무력감과 불안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의 이면이다. 우리는 다시 앞의 현실진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라면 괴테와 맑스적 의미의 세계문학 기획은 오늘의 현실에서 오히려 더 절실성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이긴 하나 서구, 비서구를 망라한 전지구적인 보편적 삶의 조건이 자본의 힘으로 완수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나타나는 그 부정적 보편의 조건과 싸우면서 세계문학의 기획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경우 제3세계문학론을 넘어, 세계체제와의 연관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체제 극복을 이야기하는 민족문학론의 진전된 인식은 좀더 체계적인 시각에서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소통과 연대를 실질적으로 구상하는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문학의 보편성

 

그렇긴 해도 세계문학과 관련된 이런 시각은 아무래도 큰 틀의 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화의 부정적 양상이 미증유의 것이고 거기에 대한 일상의 불안과 위기의식이 특별히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현실의 큰 테두리를 규정하는 이야기다. 구체적 양상은 시대마다 다를지언정 문학이 큰 테두리에서 그러한 현실의 부정적 규정력을 의식하지 않은 적은 없다. 우리는 다만 동시대의 문제의식과 실감 속에서, 거기에 좀더 전체적이고 진전된 역사 이해가 수반되고 있기는 한 것이겠지만, 인간의 조화로운 삶과 문학의 존재기반을 위협하는 사태와 언제나 그렇듯 직면하고 있을 뿐이다. 21세기 한국문학의 현장에 세계문학의 문제의식을 생산적으로 개입시키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문학적 주제나 소재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가령 어떤 작품에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닥친 궁핍한 현실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을 들어 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확산을 반영하는 시대적 보편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로부터 더 진전된 의미있는 논의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혹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부정적 양상을 좀더 날카롭게 의식하면서 한계를 드러낸 서구적 상상력을 넘어 새로운 문학적 상상력을 촉구하는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비슷한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최량의 한국문학에 기대하는 지점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문학 논의의 일정한 추상성을 곱씹게 되는 대목이다.

이런 어려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세계문학 관련 논의는‘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이야기하는 실질적인 차원에 많이 집중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경우 자연스런 수순으로 제기되는 한국문학의 경쟁력 문제는 조금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령 지난번 『창작과비평』(2007년 여름호)의 장편소설 특집에서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적극적인 사례로 인용되기도 했지만(진정석 「한국의 장편, 단절의 감각을 넘어서」), 김영하(金英夏)는 세계무대에서 한국문학의 경쟁력을 고민하면서‘보편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번역에 견딜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맥락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보편적인 문제’는 동시대 서구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설적 테마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번역을 견디는 작품이란 말도 문장이나 상상력에서 서구적 합리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이런 의미라면 미국이나 유럽의 출판시장에서 대중의 호응과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되, 세계화의 부정적 양상에 저항하며 기존의 서양문학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상상력과 가치를 세계문학의 성취로 등재하고 소통시키는 일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작품외적인 발언과 분리하여 작가의 작품들을 같은 맥락에서 검토해보는 일은 별개의 과제이겠고, 세계무대로 한국문학의 활동영역을 넓히려는 재능있는 작가의 의욕이 폄훼될 이유도 전혀 없다. 하지만‘경쟁력’이라는 잣대가 등장하는 순간, 한국문학이 서양 주도의 세계질서와 함께 형성되어온 세계문학의 낡은 보편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근거는 상당부분 사라질 수밖에 없다.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한국문학의 해외번역에 종사해온 현장의 목소리로도 전해진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안선재Brother Anthony 「외국독자들은 한국문학을 어떻게 읽을까」, 『창비주간논평』) 한국문학, 특히 한국소설의 세계무대 진출이 부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시한 대목인데, 착잡한 발언이다. 무엇보다 최근 한국소설의 구체적 성과들을 대조해가며 이 글의 비판을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비판이 서양 근대의 특정한 소설미학을 움직일 수 없는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한국소설의 결여로 지적되고 경쟁력 촉구의 도구가 되는 한, 한국문학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진화론의 구도에 갇힐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서양 근대문학의 두께와 역량은 위대한 창작자들의 몫인 동시에 세계사의 흐름에서 서양 근대가 가진 총체적인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만큼 그 성취의 수용은 비판적 역사 이해를 불가피하게 한다. 동시에 서양 근대문학의 압도적인 영향력 속에서 시작된 현대 한국문학이 한국인의 자기표현과 세계이해의 도구로 전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근원적으로 문학이 인간과 세계 전체에 열려 있는 보편적인 성찰의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그 성찰의 공간에서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의 역사를 열어왔다. 한국문학의 주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그 비판과 부정의 역사 속에서 유동하는 무엇일 것이다. 당연히 한국문학의 창조적인 보편성은 그 유동하는 지평에서 사유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을 때 한국문학은 다시 한번 서양문학의 고정된 중심을 향한 욕망의 우울한 경주와 마주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창조적으로 확대하는 일은 딱히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생각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쉽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 예로 최근 한국문학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한국문학 자체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통찰에서 출발하되 경계를 뛰어넘는 가치와 자질을 발굴하고 그것을 일반화하는 보편성, 비유컨대‘우리 안의 보편성’일 것이다”(진정석, 앞의 글)라는 분명한 요구가 제출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그 보편성은 구체적인 작품의 성과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로 이어지는 최근 황석영(黃晳暎)의 소설적 행보는 이런 점에서 여러모로 뜻깊다. 작가가 여러차례 밝혔듯이 이 3부작은 무엇보다 기존의 리얼리즘 형식에 대한 뚜렷한 반성에서 출발한 기획이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해야 한다. (…)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작가의 말」, 『손님』) 그리고 이 고민은‘진지노귀굿’‘심청전’‘바리데기 무가’라는 우리 고유의 전통적 서사형식을 거기 담긴 재래의 정신적 흔적과 함께 현대소설의 새 틀로 뒤바꾸는 3부작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 3부작이 서사형식의 재창조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북녘땅에 틈입한 외래 모더니티의 참상(『손님』), 근대 이행기 동아시아 민중의 수난(『심청, 연꽃의 길』), 이산과 대립이 격화되는 세계화의 파괴적 그늘(『바리데기』) 등 긴박한 현실의 문제를 한반도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큼직한 시야로 그 형식 속에 녹여냈다. 그 문학적 성취의 세목에 대한 이론이야 있을 수 있으되, 크게 보아 세계문학의 지평이든 그렇지 않든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창조적으로 고민하는 차원에서 이만한 야심찬 기획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런데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더 궁구하기 위해서라도 황석영의 창조적 실험에는 좀더 면밀한 읽기가 두루 뒤따라야 할 것 같다. 그것은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새롭게 고민할 때 정작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보편성의 척도를 그 기원에서 탐문하고 회의하는 과정을 수고스러운 댓가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도 더 그렇다. 가령 최근작 『바리데기』의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소설적 성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리데기』를 읽으며 우리는 통상의 소설문법이 요구하는, 인물의 꼼꼼한 성격화 과정에 작가가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물들은 복잡한 현실을 반영하는 유기적 구성 속에서 등장하거나 배치되기보다 주인공 바리의 수난의 항적(航跡)을 중심으로, 그 구심력의 요구에 편하게 이끌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시야와 상상력을 활달하게 개방하는 데 기여하며, 그 자체 이 소설의 중요한 형식이기도 한 주인공 바리의 영매적 능력이 서사의 긴장과 충돌하는 지점에 대해서도 작가는 관대하다. 적어도 『바리데기』는 서구 근대소설의 중요한 규범이랄 수 있는 전체적 합리성과 유기적 짜임을 어느 수준에서는 무시하거나 건너뛰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시적인 이미지와 서사의 결합을 뜻하는‘시적 서사’의 뚜렷한 미학적 의도를 피력한 바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미학적 의도는‘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을 과감하고 풍부하게 해체·재구성하고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하려는’작가의 오랜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시적 서사’가 소설 전체를 통어하는 일관된 조직원리로 충분히 스며 있는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일정한 유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제 근대적 소설규범과 불화하는 몇가지 문제를 무시하고 보면 『바리데기』는 한 탈북소녀의 수난과 그녀의 영매적 시선을 통해 오늘의 세계가 처한 파괴적 참상을 그 구원의 질문과 함께 감동적으로 압축해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할머니나 강아지 칠성이와 나누는 바리의 마음의 대화는 소설적 진실의 차원에서도 자연스럽고 훼손된 단순성의 세계를 기꺼이 상상하게 만든다. 서구적 판타지의 냄새가 없는 환상의 시원한 개방도 통쾌하다.‘시적 서사’의 일정한 몫이겠지만 군더더기없는 담백한 문장에 실린 서사의 리듬은 바리의 수난과 곡절에 적절히 호응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바리데기』를 읽는 즐거움에 다른 한편의 낯섦과 불편함이 뒤섞이는 것은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창조적으로 열어가는 일이 상당기간 유동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시금석적 지표는 아닌가. 한국문학이 서양문학의 보편성을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그것에 길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보편성은 동시에 한국문학 안에서 완강한 내면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인의 삶이 근대의 경험 속으로 급속도로 편입되고, 전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포섭되어온 역사적 시간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 근대의 시간 안에서 창조적 배반의 상상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미학적 형식을 통해 가능한가.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이런 원론적 질문들 앞으로 돌아온다.

정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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