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반도에서의 근대와 탈근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등이 있음. lee87@skhu.ac.kr
1. 보수에 의해 전유된 진보의제
지난해 대선은 보수의 압도적 승리와 진보의 지리멸렬한 패배로 결말이 났으며, 최근까지 진보의 위기에 대해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서 유의할 사항은,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이 진보세력에 대한 실망감은 분명히 보여주었지만 진보의 미래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진보는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서 나온 판단이 결코 아니다. 한겨레신문 1월 1일자에 실린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당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선호도는 진보, 중도, 보수가 각각 28.8%, 17.2%, 27.9%를 기록했다. 2004년 같은 방식으로 조사한 결과와 비교하면 진보에 대한 지지도가 15.5% 떨어진 것이기는 하나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또한 이명박 후보를 포함한 모든 정치세력이 대선과정에서 양극화 해소 같은 진보적 가치와 연관된 의제를 중요한 이슈로 제기했다는 점도 국민들의 선택을 단순히 보수적 가치에 대한 지지로 볼 수 없는 근거이다. 앞의 여론조사에서도 사회복지가 잘 갖춰진 사회와 경제적·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 대한 선호도는 각각 67.2%와 31.6%로, 전자가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요소를 고려한다면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 승리는 단순히 보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결과가 아니라 그가 ‘실용적’이라는 수사로써 진보적 의제를 전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보수의 정치적 승리와 진보적 의제의 부각이라는 기묘한 조합 속에서 이명박정부에 내재한 위기와 진보의 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이명박정부는 양극화를 의제로 부각시켰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규제완화 등 친재벌·친기업적 정책에 관한 논의는 많지만 양극화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논의는 찾기 어렵다. 이명박정부의 해결책이란 ‘성장’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대선과정에서 핵심공약으로 제시했던 7%의 목표성장률을 6%로 낮출 수밖에 없었던 현상황은 막연한 성장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이미 보여주고 있다.1 이명박정부는 앞으로 보수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성장주의를 지지한 서민들을 배반할 것인가, 아니면 보수적 가치를 배반하고 서민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사이에서 선택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명박정부의 정책적 경향은 전자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그로 인해 진보진영이 국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은 확대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객관적 상황이 진보의 위기를 저절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 진보적 의제가 보수적 해결방안에 의해 전유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진보진영은 다시금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대선 패배는 진보세력의 실패가 아니라 노무현정부의 실패를 뒤집어쓴 탓이라는 주장이다. 진정한 진보를 구분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착시를 문제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민들이 진보세력의 각종 대안들을 접할 기회가 제한적이긴 해도 꾸준히 증가한 상황에서, 노무현정부에 대한 실망이 더 진보적인 세력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은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는 국민들이 나름대로 진보세력 전체에 대한 평가를 함께 내린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타당할 것이다. 국민들은 과거 진보적 의제로 보이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처방으로 진보세력의 대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명박 후보의 ‘성장담론’을 해결책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진보적 의제를 보수적 해결방안이 전유할 수 있었던 것이 진보의 위기를 초래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2.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2
그러면 왜 진보적 가치에 대한 지지와 진보세력에 대한 지지가 분리되었는가? 진보주의가 대안으로서 매력을 상실한 것은 특별히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며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적어도 최근 20년 이상 지속된 현상이다. 오히려 한국에서 최근까지 진보담론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온 것이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례적 상황이 오히려 진보세력의 자기성찰 능력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진보의 위기도 세계적 흐름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특히 진보의 재구성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출현한 배경 및 영향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더 나쁜 형태의 자본주의로서 투쟁의 대상이라는 점만이 부각됐을 뿐 그 영향력이 확대된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대응방침을 제시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과거의 해결책을 가지고 현재의 문제에 대응하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나타나는 다음 두가지 특징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에 대한 전통적 대응의 한계가 이미 뚜렷해졌다.
첫째, 진보적 대안이 일국적 차원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크게 축소됐다. 이는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세계체제론에서 강조한 점인데, 그는 일국혁명모델의 실패가 1968년의 ‘68운동’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즉 ‘68운동’을 ‘반국가주의’의 출발점으로 보았는데, 이는 단지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만이 아니라 소련 등 맑스-레닌주의적 혁명모델에 따라 출현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적 혁명모델은 1단계에서 국가를 장악하고 2단계에서 국가권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종류의 제도를 만들어가는 ‘2단계 혁명’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그것의 최종적 실패를 의미했다. 즉 맑스-레닌주의적 접근으로 권력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러한 성공은 곧 국가간체제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제약에 의해 변형되거나 부러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3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모델의 실패, 대안의 부재를 계기로 더욱 확장될 수 있었다.
둘째, 보수주의가 혁신적 이념으로 진화했다. 보수주의의 혁신은 1980년대 초부터 영국의 새처와 미국의 레이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의심하면서 과거의 것을 선호하거나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정태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혁신과 성장의 동력으로서의 보수주의, 미래지향적 보수주의를 기치로 내걸며 보수혁명을 추진했다.4 이러한 보수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케인즈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진보주의는 복지국가의 틀에서 형성된 기득권 구조에 안주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1989년부터 소련 및 동구사회주의의 붕괴를 거치면서 이러한 새로운 보수주의의 영향력은 전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미국과 유럽에서는 각각 ‘뉴민주당’(New Democrat)과 ‘제3의 길’ 같은 진보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는 진보진영 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왔으나, 적어도 새로운 환경에서 진보담론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진영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부족했는데 이에 따른 문제점이 뚜렷하게 드러난 대표적 사례가 한미FTA반대투쟁이다.
한미FTA추진으로 노무현정부 내에 존재하던 경제사회정책의 균형추가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한미FTA반대투쟁’에는 다른 어떤 쟁점에서보다도 폭넓은 세력이 참가했다. 그런데 노무현정부가 이 문제를 ‘폐쇄냐 개방이냐’라는 대립구도로 몰아가며 한미FTA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자 문제가 복잡해졌다. 이는 답이 미리 정해진 대립구도로서, 논쟁의 구도가 결코 한미FTA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와 같은 질문이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반대진영의 논리를 궁색하게 만드는 데 커다란 효과가 있었다. 한미FTA반대세력은 이에 개방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의 속도와 방식에 반대한다는 방법론적 차원의 논리를 동원했다.5
그러나 문제는 진보세력이 지구화가 빠른 속도로 진전하는 가운데 개별적 사안에 대한 반대투쟁을 넘어서 어떤 속도와 내용의 개방을 추구하는가를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데 있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진보세력의 한미FTA에 대한 비판을 대안 및 비전과는 거리가 있는 정세적 대응으로 간주했으며, 결국 한미FTA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여론이 움직였다. 진보세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단순한 반대투쟁을 넘어 비전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미래지향적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3.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적응’전략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한 대응은 추수·탈출·적응이라는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추수’는 적극적인 동기에서건 소극적인 동기에서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간주하고 이를 충족시키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추수전략’으로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은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성공적 경험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경제와 세계경제의 깊은 연관성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적 개혁세력 중 일부가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이미 초래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외면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일자리 부족과 양극화가 이러한 틀 내에서 해결될 수 없음은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미국 등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나라에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문제점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안모색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과도 상반되는 대응이다.6
둘째, ‘탈출’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밖으로 나가는 것을 추구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의 탈출이라는 대안의 경우, 사회주의진영의 붕괴와 현실사회주의체제의 변화로 그 타당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전지구적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국가로부터의 탈출 혹은 국가를 우회하여 탈자본·탈국가적 해방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탈근대적 지향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시도는 근대기획이 지닌 획일성과 억압이라는 문제를 드러내주고, 자본주의 너머를 향한 상상과 실천을 풍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전략은 지난 2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기획에 따라 자본이 국가, 공공성을 계속 침식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전략은 오히려 “우리가 겪는 나날의 삶에서는 몇몇 사람들은 단추를 누르는 위치에 있는 반면에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단추가 눌림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여,7 통제와 억압의 총체성 앞에 개인들을 파편화하고 무장해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재건(柳在建)도 탈근대적 공화주의, 자율주의 운동 등 국가를 우회하는 방식의 실천전략에 대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대안적 발전모델의 구상이나 모색이 있을 수 없고, 삶의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이나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적 체제구상을 내놓기가 어렵다”라고 지적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8
셋째, 추수와 탈출이라는 방안을 기각한 후에 남는 것은 ‘적응’이다. 적응은 수동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중단기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체제나 제도의 건설이 어렵다는 한계를 받아들이거나 이러한 목표설정 자체가 문제라고 판단하면 오히려 가장 능동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적응은 제약조건하에서 생존공간을 확대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맹아들의 형성을 촉진하는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근대기획의 틀 내에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근대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9 물론 적응이라는 실천에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환경 속에서 가능하면 바람직한 삶의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와 지구적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해방적 비전 사이에 모순과 긴장이 나타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양자의 과제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근대기획과 근대극복의 해방적 비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모순만을 인정하고 양자가 통일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근대를 모순과 균열이 내재되지 않은 동일성으로 규정하고 근대와 근대 이후를 단절적 단계로 파악하는 발상이다. 우리는 특정한 근대성 기획, 계몽과 이성의 억압적 사용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이를 근대성 일반과 동일시하는 것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근대성 자체가 모순적이고 균열적 요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극복의 전망도 근대가 소멸된 이후의 단계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균열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근대 자체 내의 균열을 활용하여 근대와 근대극복의 과제를 결합하려는 모색이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무페(Chantal Mouffe)는 합리주의·보편주의·계몽주의에 반대하고 탈중심적 주체와 차이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탈근대적 전망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근대 이후로의 도약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급진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 그런 전망들을 실현하는 정치기획을 추구했고 이를 ‘근대적이자 탈근대적’인 기획이라고 규정했다.10 또한 월러스틴이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실패한 근대기획으로 간주하지만 동시에 “자유주의 중도파로 하여금 그들이 애용하는 이론(자유주의-인용자)들을 이행하도록 만들자”고 제안하는 것도 이러한 균열적 요소를 활용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적 요구의 확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한계에 직면하도록 만들거나, 최소한 자신의 약속을 실천할 수 없는 자유주의세력의 허구성을 보여주고 새로운 대안에 대한 모색의 가능성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11 이들 모두 추수나 탈출과는 달리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경제체제의 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는 ‘시장’과 ‘지구화’에 대해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4. ‘반시장-반지구화’ 프레임 넘어서기
현재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반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모호성은 다양한 정치적 지향의 사람들이 이 구호를 함께 외치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이 대안을 가진 운동으로 그리고 의미있는 정치세력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효과도 가지고 있다. 최근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은 보수세력에까지 받아들여질 정도로 널리 확산되었지만, 진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선택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12
이러한 경향은 사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변화에 따른 대안의 부재가 초래한 현상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삼았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에 기초한 경제사회체제를 더이상 전면에 내걸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진보진영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보다는 일단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문제점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실천전략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전략은 시장이나 지구화와 진보세력의 관계를 매우 모호하게 만들고, 진보적 상상력을 ‘반시장-반지구화’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반대가 반드시 ‘반시장-반지구화’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반부터 표면화한 케인즈주의의 위기를 배경으로 사회민주주의와 케인즈주의적 정책하에서 자신의 이윤추구가 사회·정치적으로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위계급이 이러한 제약을 제거하고 자본의 이윤추구 활동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채택한 정책패키지이다.13 이는 사회와 경제의 구분을 부정하고 시장을 경제문제만이 아니라 사회문제의 해결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시장근본주의로 불리기도 한다.14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더욱 본질적인 특징은 자본과 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을 자본에 기울게 하고, 국가를 자본의 무제한적 이윤추구의 도구로 만드는 것에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이미 지구적·일국적 차원에서 상위계급으로의 부의 집중과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와 무모한 투자에 따른 경제·금융위기를 주기적으로 발생시켜 오히려 시장경제의 기반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이 매우 유용하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와 구분되는 영역이며(그는 여기에 일상생활이라는 영역을 추가한 삼층도식을 제시했다), 자본주의는 (경쟁적이고 투명하고 개방적인 교환영역으로서의) 시장경제에 대한 배제가 실현되는 영역으로 반(反)시장적인 것이며, 따라서 반드시 권력의 위계구조,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15 브로델은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가 모두 창조성과 혁신의 원천인 개인들의 생산과 교역의 자유를 제거하여 자본의 독점이나 국가의 독점을 결과했다고 본다.16 월러스틴은 이러한 접근에 대해 “브로델이 말하는 ‘시장’을 옹호하는 것은 결국 세계의 평등화를 지향하는 일과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 또한 그것은 우리들의 시각을 결국 거꾸로 돌려놓는다. 어쩌면 (브로델이 뜻하는 바) 시장의 승리는 더이상 자본주의체제의 징표가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의 징표로 판명날지도 모른다”라고 지적했다.17
따라서 신자유주의 반대는 시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독점을 강화하는 정책과 게임의 규칙을 수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즉 독점화 경향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제도와 시장경제를 결합하는 사회경제모델이 신자유주의적 모델이나 현실사회주의의 경제모델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브로델적 의미의 시장경제를 강화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이것이 조절시장경제나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모색이 계속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필요한 이유이다.
지구화의 경우는 더욱 복잡한 측면이 있지만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지구화에 신자유주의적 기획이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구화는 신자유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헬드(David Held) 등은 지구화를 각 지역의 인간들 사이에 상호연결성이 증대되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한 후,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열성적인 지지자 또는 비판자 들이 흔히 시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한 실체가 아니며, 지구화는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의 한계 및 그것에 대한 반발이 점점 명확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18
사실 지구화에 내재한 이러한 모순적 요인들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지구화 추세를 강력히 통제하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우선 신자유주의는 독점적 이윤을 뒷받침하는 정치·군사적 기초로서 미국 패권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러한 패권체제의 동요는 곧 신자유주의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이민문제도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위협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이에 대한 강력한 통제·관리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중심부의 축적구조도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기획은 독점적 국가권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동원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라크전쟁을 전후로 미국 패권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과 불법 이민문제가 미국 대통령선거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부상하는 것 등은 이러한 기획의 운명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음을 보여준다. 지구화 내에 존재하는 신자유주의적 동력과 이에 대한 억제력 사이의 모순관계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지구화는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전지구적 확산이 아니라 인류사회를 더욱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동시에 탈근대의 전망을 확장하는 매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과 지구화가 진보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으며,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은 시장과 지구화에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력, 근대와 근대극복이라는 이중과제를 추구하는 동력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5.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변혁적 중도주의
시장과 지구화의 적극적인 측면을 활용하여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응하는 것은 ‘제3의 길’구상의 핵심적 내용이다. ‘제3의 길’의 구체적 내용들에 대해 적지않은 비판이 제기됐으나, 이러한 접근법 자체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제3의 길’, 특히 블레어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홀(Stuart Hall)도 시장과 공공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데에서‘제3의 길’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인정했다.19
한국에서 최근 들어 ‘제3의 길’이 정치적 수사로 많이 사용되는 것도 이러한 접근법이 갖는 매력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들이 주장하는 제3의 길이 어떤 철학적 기초를 지니는지 불분명하며, 단지 과거의 진보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한 수사로만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수사가 실용주의와 결합될 경우 문제가 더욱 분명해진다. 실용주의의 적극적인 의미는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론에 있는데, 지향과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용주의만 강조하는 것은 진보적 정체성의 상실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3의 길’을 한국에 적용하고 정책목표를 정하는 데에는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제3의 길’은 강력한 복지국가 혹은 사회민주주의 씨스템이 구축된 상황에서 복지국가 씨스템의 경직성을 타파하고 경제의 활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획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제 성장지상주의 발전국가모델에서 벗어나 복지체제를 만들어가는 단계이며 심각한 양극화문제가 빚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즉 복지 강화, 질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의 복지써비스 증대와 소득분배구조 개선이 우선적이고 분명한 정책목표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복지체제 강화를 위한 조세부담률 증가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최근 몇년간 ‘증세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도 전에 좌초된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세저항 심리가 강한 상황에서 이는 결코 구호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을 먼저 투입하여 복지혜택을 증가시킨 후 증세를 추구하는 역발상도 제기됐다.20
그러나 이는 적어도 다음 두가지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과 함께 제출되지 않을 경우, 무책임한 대안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첫째, 복지에 대한 강조가 성장이나 혁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복지와 성장, 혁신이라는 목표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북유럽 국가의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21 그런데도 이들이 서로 대립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객관적 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목표설정이나 시장에 대한 규제만을 강조하는 접근이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양자를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대안들이 논의되거나 검토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둘째, 예산의 증가가 곧 써비스의 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수요자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복지써비스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수요자가 자신에게 써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민간기관 포함)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바우처(voucher)제도의 도입이 복지써비스의 시장화로 귀결되고 여러 부작용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복지체제 강화와 결합될 수 있다면 무조건적 반대로 일관할 일은 아니다. 이는 단순히 보수세력과의 타협 가능성만이 아니라 복지 수요자에게도 선택권을 준다는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제3의 길’구상이 한국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단체제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야 한다. 분단체제는 진보적이고 현실 가능한 정책들을 만드는 데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변수이다. 고용정책, 복지정책 등이 분단체제라는 상황과 연관 없이 논의되기는 어렵다. 예컨대 현재 이주노동자 50만 시대가 고용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앞으로 북한 노동력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는 한국의 고용정책을 수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복지의 목표를 정하는 데서도 북한과의 사회통합의 수준과 경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22
더욱 중요한 것은 진보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분단체제를 극복해가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복합국가론’ ‘어물어물 통일론’등이 제기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세한 논의를 피할 것이다.23 다만 분단체제가 변혁적 전망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두가지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성장전략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진보가 반성장주의가 되어서는 안되며 한국 내에서 어떻게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낼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과의 경제협력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진보진영 내에서 더욱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분단체제의 극복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변혁적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우선 신자유주의의 정치·군사적 기초인 미국 패권주의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내고 변혁적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동북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신자유주의적 담론이 빠르게 확산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만약 분단체제의 극복이 동북아 내에서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넓힐 수 있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대응의 기반을 만드는 데 유리할 것이다.
백낙청(白樂晴)은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그리고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으로 민중주의세력, 민족해방세력 그리고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의 3자결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안했다. 3자결합만이 이러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할 수 있으며, 어느 한 세력이나 양자결합만으로는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24 실제로 앞의 두가지 주요 목표 모두 폭넓은 세력의 연합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기든스(A. Giddens)도 제3의 길을 설명하며 ‘급진적 중도’(radical middle)라는 접근법을 제시한 바 있다.25 양자는 공허한 급진주의를 거부하고 현실적 제약하에서 실현 가능한 진보적 노선의 탐색을 강조한다는 점과 급진주의적 혹은 변혁적 목표의 달성은 소수의 선도적 투쟁이 아니라 폭넓은 합의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든스의 급진적 중도에서 급진이라는 표현이 좌파적 가치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본다면, 변혁적 중도주의에서 변혁성은 단순히 좌파적 가치와의 연속성이 아니라 분단체제에서 한국의 중도주의가 가질 수 있는 역동적 작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제3의 길’이 근대적 기획을 넘어서는 전망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변혁적 중도주의는 분단체제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에 더욱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변혁적 실천공간을 확대할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근대극복의 전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6. 이명박정부의 등장과 진보세력
최근 진보진영의 진로 모색과 관련한 토론에서 ‘창조적’ 분화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진보진영이 자유주의적 개혁세력과의 차별성을 강화해야만 진보세력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정부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로 규정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가 제도권 내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 한미FTA등 신자유주의적 경향에 투항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나 지역주의·연고주의적 정치행태를 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사용된다면 긍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 분화가 중도의 지혜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이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를 부를 것이다. 진보에 필요한 것은 세력의 분화와 분열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킬 수 있는 노선을 정립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창조적 분화론을 통해 선을 긋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세력과 진보 사이에 구분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제도권 내에서만 보아도 통합신당과 민주노동당의 구분이 존재해왔으며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도 이러한 차이를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문제는 통합신당 등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에 실망한 국민들이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세력의 지지로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진보적인 의제의 부재, 진보와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의 미분화가 문제가 아니라, 진보세력이든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든 신자유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부족했던 것이 문제이다. 다만 이러한 실패는 민주노동당, 통합신당 혹은 다른 정치세력들 사이에 새로운 진보를 주도하기 위한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러한 과제에 대처하는 진보 내의 논의는 ‘창조적’ 분화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새로운 방향에 대한 논의가 ‘종북주의(從北主義)’냐 ‘반북주의(反北主義)’냐 하는 퇴행적 논쟁으로 전락했는데, 이러한 논쟁구도는 앞으로도 진보진영의 발목을 잡을 소지가 많다. 종북주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는 당연히 비판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그 극복은 또다른 편향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남한 내의 개혁과제와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과제를 통일시킬 수 있는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고 이러한 목표를 위해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방안은 변혁적 중도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보세력은 시장과 개방이 진보적 가치와 충돌한다는 자신들에게 내재하는 선입관을 극복하는 동시에, 분배, 복지, 분단체제 극복 등이 성장 및 혁신과 충돌한다는 보수적 프레임을 깨는 두가지 방향으로 진보이념을 재구성하고 이를 위해 단결 가능한 모든 세력과의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물론 그 안에서 여러 목표들 사이의 충돌을 피하기는 어렵고, 또한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변혁적 중도는 이러한 긴장을 견디며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유토피아를 지금 이곳에 실현하고자 했던 실천이 신자유주의라는 더욱 극악한 형태의 자본주의 출현의 길을 열었던 것과는 반대로, 중도적 길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근대극복의 토대를 만들어나가는 데 더욱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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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극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성장이 고용을 증가시키지 못하는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라는 점에서, 성장을 통한 양극화 해소라는 논리는 매우 취약한 것이다. 지난 1월 16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5~2006년 사이의 취업자수 증가율은 7.4%로 연평균 0.6% 증가한 것에 머물렀다. 이는 같은 기간의 평균 경제성장률 4~5%와 커다란 차이가 나는 것으로, 양극화가 성장정책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 이 글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 나타난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생산과정에서의 국제분업의 빠른 발전, 금융자유화로 촉진된 지구화와 함께 출현했고,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중국 등의 개혁정책을 통해 지역적으로 그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켜왔다. 이는 1970년대 후반부터 영향력을 증가시킨 신자유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된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기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와는 구별하여 사용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한기욱·정범진 옮김 『미국 패권의 몰락』, 창비 2004, 322~23면.↩
- 이러한 변화를 이끈 주요 동력 중 하나가 신보수주의였다. 신보수주의의 대부인 크리스톨(Irving Kristol)은 신보수주의가 회고적이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활기찬 미국식 보수주의라며 버크(Edmund Burke)류의 대륙식 보수주의와 구별했다. 그리고 감세정책에 대해서는 감세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감세를 개인의 재산권 보호라는 측면에서 접근했던 자유지상주의와의 차별성도 강조했다. 이는 감세-경제성장-소득증가 및 재정능력의 강화라는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는 레이거노믹스의 핵심논리였다. Irving Kristol, “The Neoconservative Persuasion,” The Weekly Standard, August 24, 2003.↩
- 한미FTA에 대한 반대론을 모은 보고서에서도 “국익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개방이라는 말도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면 그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개방, 무엇에 대한 개방이냐다”라고 강조했는데, 한미FTA추진세력만이 아니라 진보세력에도 정말 어떤 개방이냐가 문제되고 있다.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한미FTA국민보고서』, 그린비 2006, 9면.↩
- 미국의 대표적 다국적 금융기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The Financial Service Forum Report”에서도 소수에게 과실이 집중되는 지구화의 부작용에 대해 강한 경계신호를 보냈고, 지구화로 더 큰 수익을 얻은 사람들에 대한 과세 강화, 재교육 강화, 의료보험 개선 등 적극적인 보완정책을 제안했다. The Wall Street Journal, July 26, 2007.↩
- 아리프 딜릭 지음, 설준규·정남영 옮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눈뜨기』, 창비 1998, 102면.↩
- 유재건 「역사적 실험으로서의 6·15시대」,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283면.↩
- 백낙청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에 대해 “두개의 동시적 과제들이 아닌 양면적 성격을 가진 단일과제”를 뜻하며 ‘적응’과 ‘극복’사이의 선후관계도 없다고 설명했다. 백낙청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115면 각주 13. 필자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며, 동시에 실천전략을 설명하는 경우 적응과 극복을 구분하기보다는 ‘적응’이라는 개념을 이 양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이중과제는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근대(화)와 근대극복’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샹딸 무페 지음, 이보경 옮김 『정치적인 것의 귀환』, 후마니타스 2007, 25면.↩
- 월러스틴, 앞의 책 344~46면.↩
- 중앙일보 1월 17일자 「실용주의 과잉을 경계한다」라는 김영희(金永熙) 기자의 칼럼에서는 “새 정부가 자유경쟁과 적자생존의 신자유주의로 후퇴한다면 지난 10년 동안 평등의 선악과를 맛본 많은 한국인들은 또 한번 혼란에 빠질 것이다”라며 신자유주의를 현재의 주된 문제로 언급했다.↩
- 하비(David Harvey)는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타협’을 통하여 국가가 완전고용, 경제성장, 복지 등을 위해 시장에 개입할 수 있었던 정치-경제적 조직을 ‘착근된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로 간주하며 그것과 신자유주의를 구분했다.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신자유주의-간략한 역사』, 한울 2007, 27~28면.↩
-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신자유주의보다는 시장만능주의라는 개념을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김기원 「김대중-노무현정권은 시장만능주의인가」, 『창작과비평』 2007년 가을호 173~75면.↩
-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 옮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I-1: 교환의 세계 上』, 까치 1996, 323면.↩
- 브로델 지음, 주경철 옮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II-2: 세계의 시간 下』, 까치 1997, 868~70면.↩
- 월러스틴 지음, 성백용 옮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창비 1994, 269면.↩
- 데이비드 헬드 외 지음, 조효제 옮김 『전지구적 변환』, 창비 2002, 679면.↩
- 스튜어트 홀 「무엇이 변했는가」,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노대명 옮김 『제3의 길은 없다』, 당대 1999, 54~55면.↩
- 정승일 「신자유주의와 대안체제」, 『창작과비평』 2007년 가을호.↩
- 조영철 「미국모델, 라인모델, 노르딕모델의 경제성과 비교평가: 미국모델은 따를 만한 모델인가?」, 『동향과전망』 2007년 여름호.↩
- 작년 진보정치연구소에서는 ‘사회국가’라는 지향을 기초로 정책 제안을 담은 책을 발간했다. 이는 논의가 이념과 가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 영역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개별 쟁점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토론거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전체적으로 남북한의 평화체제 문제만을 간단하게 언급할 뿐 남북관계의 변화가 남한 내의 사회경제체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 남북관계의 변화를 계기로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가 사회·경제적으로 더욱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도록 만들 수 있는 제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러한 문제점은 과연 사회국가에 담긴 정책들이 향후 10년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보정치연구소 엮음 『사회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 후마니타스 2007.↩
- 상세한 논의는 백낙청, 앞의 책 참조.↩
- 백낙청 「변혁적 중도주의와 한국의 민주주의」, 앞의 책.↩
- 앤서니 기든스 지음, 한상진·박찬욱 옮김 『제3의 길』, 생각의나무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