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장르의 경계와 오늘의 한국문학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평론집으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이 있다. jatw19@moiza.chonnam.ac.kr

 

 

1. 머리말

 

장르문학이 우리 문단에서 화제다. 특히 게임이나 영화로 호환되기 쉬운 판타지와 SF, 팩션의 성가(聲價)가 높은 편이다. 그 성가는 실제로 문학 출판시장의 판매지수로 반영되고 있다. 바야흐로 장르문학이야말로 21세기 문화콘텐츠의 근간을 이루는 창의력과 상상력의 보고(寶庫)라는 주장도 왕왕 제기된다. 이는 문화연구에 치중하는 논자들의 비교적 일치되는 입장인 듯하다. 다른 한편 중간문학 또는 제4문학으로도 일컬어지는 장르문학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무척이나 분분한 편이다.1 ‘본격문학’과의 관계설정에서 때론 날선 긴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문학에서 장르는 창작양식을 규정하는 범주를 말한다. 창작의 갈래를 가리키는 장르는 근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전통이 있는데, 기법이나 형식, 어조, 내용, 분량 등이 장르의 경계를 획정하는 요소들이다. 이 장르 개념과 달리 장르문학 자체는 근대의 문화적 산물이다. 장르문학은 시장의 수요·공급 원칙에 상대적으로 긴밀하게 조응하는 특정한 독자층을 주로 거느린다. 이런 장르문학을 정의한다면 특정한 서사적 코드를 활용하여 서사의 주제와 범위를 집중화·전문화함으로써 출판시장에서 나름의 점유율을 확보한‘기획상품들’이라 할 수 있겠다. 주요 고객은 장르문학의 관습적 이야기내용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데 이들이 바로 마니아 독자다.

다른 한편 장르서사들과 대중문학의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중에는 후자를 추리나 공포소설, SF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는 논자도 있다. 즉 대중문학을 복수의 장르문학‘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매기는 것이다. 물론 개념설정이야 하기 나름이겠지만, 본격 또는 순수문학의 경우 대중문학과의 관계설정이 시빗거리가 되곤 한다. 장르문학을 탈근대의 해방적 서사로 규정하면서 그 해방적 의의를 한껏 사주는 논자라면 애초에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도 문제시할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장르문학, 대중문학, 본격문학을 분별하거나 서열화하는 것 자체를 고답적인 문학주의로 간주할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일단 서열화가 안고 있는 문제는 장르문학의 근대적 전통이 풍부한 서양문학을 통해서도 제기할 수 있다. 가령 귀족과 평민을 한 공간에 모아놓고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나 글을 모르는 대중도 듣고 즐길 수 있는 낭송의 시대를 열기도 했던-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소설로 계승했다고 평가받는-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의 작품이 대중문학이냐 본격문학이냐라고 묻는다면 둘 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때도 그것이 어떤 차원의 대중문학이며 본격문학인가 하는 분별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판타지나 SF, 추리문학, 탐정소설 같은 새로운 대중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들인 호프만(E. T. A. Hoffmann)이나 포우(E. A. Poe)도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관계를 논하는 데 결코 간단치 않은 쟁점을 제기할뿐더러, 실제와 허구를 넘나들면서 미국의 역사적 현실을 천착한 호손(N. Hawthorne)의‘로맨스소설’은 장르 변용의 한 귀감이기도 한 것이다.2

이 작가들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제각각이겠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는 본격문학이나 대중문학이 독자적이지 않으며 그 이분법적 구도 역시 역사적으로 만들어졌음을 깨닫게 한다. 그 역사적 구성에 유의한다면 장르문학에 대해서도 근본주의적인 접근은 금물이다. 서양에서도 디킨즈를 배출한 19세기 영국의 경우처럼 다양한 하위장르의 이야기방식들을 창의적으로 종합·활용함으로써 장편소설의 전성기를 연 역사적 사례가 엄연한 것이다. 다만 근본주의적 문학주의를 경계하다가 정작‘비주류 장르문학’과의 긴장을 통해 이룩된 문학의 창의적인 성취에 눈머는 일은 행여 없어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도 장르문학으로 시야를 활짝 여는 동시에‘본격문학적 지평’에 대한 신실한 물음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2. 게토화된 장르문학을 넘어서

 

실제로 우리 동시대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도 장르문학의 서사적 자산을 활용하여 탁월한 작품을 써낸 작가들은 적지 않다. 그중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은 장르의 경계 문제를 논하는 데서도 적절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필자는 2007년에 한국을 방문한 도르프만의 강연을 온라인 지면에서 독자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3 거기서 다음과 같은 그의 물음들을 인용했다. 즉 “정치적이지만 정치 팸플릿과는 다른 언어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대중적인 동시에 애매한 이야기들, 다수의 청중이 이해하지만 양식상의 실험이 담겨 있고 또 신비하지만 동시에 피부에 와닿는 인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낼 것인가?”(「죽음과 소녀」 작가 후기) 이어서 필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 집에 불났어』를 비롯한 도르프만의 다채로운 소설도 그런 물음에 대한 그 나름의 열정적인 탐구의 결과다. 요컨대 「죽음과 소녀」를 읽고 보는 독자·관객은 거기서 더 많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대중문화의 유혹적인 형식, 즉 써스펜스, 스릴러나 탐정소설적 묘미를 느끼게 되지만, 다른 한편 그런 형식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차용하고 전복하여 상투적인 도식에 자족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의 진실 모색으로 바꾸는 작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묘미를 서술의 변화를 통해 절묘하게 살린 도르프만의 『마스카라』(Mascara, 1998)에서도 바로 그런 차원의 진실 모색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장편에서도 확인되는 바는, 장르의 경계와 범위를 창의적으로 확장하거나 변용하면서 상투성에 도전하는 문학이 되지 않는 한 장르문학의 가능성도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 작품이 작품다운 경지에 도달할 때 장르들간의‘교섭’이 이루어지면서 관습적인 서사장치들도 해체되기 마련이라면, 다음과 같은 하나의 명제가 성립한다. 즉 장르문학 고유의 성취는 게토화된 장르문학 자체의 극복에 다름아니다. 그렇다고‘게토’에서도 꽃이 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문화적 해방구로서의 게토야말로 문학 본연의 창조성이 발화되는 지점이라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요는, 서로 다른 서사적 구조와 관습을 내장한 개별 장르들의 통합적 진화가‘작품’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탐구가 장르문학론에서도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 탐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배타적인 서사의 형식과 관습을 창출함으로써 마니아 독자를 확보하는 장르문학이 우리 문단에서 의미심장한 진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건대 추리, 로맨스, 호러, 무협, SF, 판타지 등 특정한 서사적 코드를 전문적인 방식으로 가공·특화하는 장르문학이‘상위문학’의 영토를 접수하고 있다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불분명한 과장된 풍문이었지만, 포스트모던 사조들이 급격히 밀려든 세기말에는 체제 및 반체제 문화 전체에 침투한 80년대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부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장르들의 서열과 위계는 물론이고 그 문화적 구분도 희미해졌고, 2000년대 들어서는 마니아를 확보한 장르문학이 지금까지 본격문학으로 간주된 영역과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대중문화의 활력에 힘입은 고전적인 작품들을 창출해온 서구문학에 비해 한국의 장르문학 전통은 아직 일천하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대략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나름대로 거들어온 필자는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흐려지면서-그와 동시에 각각의 문학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새로운 형태의 형식실험이 활발해지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르문학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입장일수록 특정 연령이나 성, 계급에 집중된 독자층의 성공적인 확보가 오히려 게토화로 이어져 장르문학의 지평을 왜소화하는 것에는 비판적인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본다. 되돌아보면 가령 1980년대 당시의 민족문학담론에서도 그런 거리두기는 기본에 속했다. 물론 여러가지 사정으로 기본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 점을 인정한다면 소재주의에 함몰된 노동소설을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장르화 현상으로 판단하고 그에 대해서 공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 것도 사실이다.‘작품’에 무게를 둔 민족문학이 그런 현상을 장르문학으로서의 한계 이전에‘좋은 문학’의 기준에 미달하는 예로 판단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장르문학을 특정한 심미안으로 굳어진‘문학주의’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피해야 옳겠지만, 그렇다고 작품의 작품다움을 엄밀하게 파악하는 비평적 자세를 포기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 점을 환기하면서 강조하고픈 바는, 지구화시대에 대응하는 창의적인 형식실험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왕년 민족문학의 문제의식4이 현재 활발하게 창작되는 장르문학을 통해 심화·확장될 수 있는-역으로 장르문학들의 지평이 현실참여적 민족문학의 자산을 활용함으로써 풍요로워질 수 있는-가능성이다. 다만 이 경우 우리 작가들이 감행하는 다양한 장르실험도 2000년대 후반 달라진 현실의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특정한 형식과 내용을 내장한 글쓰기로서의 문학 장르도 당대 역사적 현실과의 길항관계 속에서 태동하고 발전해왔음을 보여주는 예는 서양문학에도 무수하다. 우리의 경우 민중의 생명력을 창의적으로 수용한 장르문학의 전통이 빈약하다고 앞서 말했지만, 그럴수록 북돋움이 필요한 실정이기도 하다. 우리 현실에 개입하는 근래의 장르서사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가령 근년에 부쩍 활발하게 씌어지는‘백수문학’은 1997년 IMF사태 이후 심화된 양극화 현실과 분리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이홍(李虹)의 『걸프렌즈』(2007), (그보다 더 발랄한) 정이현(鄭梨賢)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2003)나 『달콤한 나의 도시』(2006), (전작들보다 의미심장한 장르적 발전 양상을 드러내는) 『오늘의 거짓말』(2007)은 소위 한국판 칙릿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전문직 미혼여성이 급격히 증가한 남한 대중사회의 실태는 여기서 확인된다. 이와 대조적으로‘씰버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박완서(朴婉緖)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이나 『친절한 복희씨』(2007)는 급증하는 노인들의 일상에 뿌리를 두고 형성된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김사과의 『미나』(2008)나 이명랑(李明娘)의 『날라리 on the pink』(2008)는 청소년들이 당면한 억압적인 제도권 교육과 피폐한 현실을 태반으로 삼아 탄생한 이야기다. 특정 연령이나 계층 또는 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형성되는 이런 작품들이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를 형성할 것인가는-형성과정에서 다른 장르들과의 교집합 범위를 창의적으로 넓힐 수 있을 것인가는-지켜볼 일이겠지만,‘장르의 정치학’이라고 할 만한 징후가 우리 작단에서도 두루 관찰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일정한 양식의 글쓰기가 하나의 문학적 장르로 성립하는 현상을 문학 자체의 자율성에 기인하는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문학주의의 고질이다. 장르문학의 장르적 특성을 그것이 생산되는 현실의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중요한데, 좀더 적극적으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어떤 실천적 대응으로서의‘장르문학’을 상정해볼 수도 있겠다. 기왕이면 외국문학에서 SF장르를 창조적으로 활용한 사례가 되면서 우리 작가들에게도 자극이 될 만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3. 장르문학의 경계 해체와 현실참여: 『제5도살장』

 

작년에 작고하면서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는 보네거트(Kurt Vonnegut)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제5도살장』(Slaughterhouse-Five, 1969)은 장르문학의 현실참여를 생각해보는 데5 풍부한 암시를 준다.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드레스덴을‘석기시대’로 되돌린 미국의 화염대폭격에서 살아남은 한 인간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서 흔히 차용되는 메타적 형식을 띠는 이 소설은 첫 장에서 작가이자 화자인‘나’가 『제5도살장』을 어렵사리 쓰게 된 경위를 기술한다.6 나머지 장의 주인공은 작가가 전쟁포로로서 겪은 체험을 반영하는 허구의 인물인 빌리 필그림(Billy Pilgrim)이다. 그러니까 가공의 분신(分身)을 내세운 자전적 소설인 셈이다. 특이한 것은 빌리의 삶이 반영되는 양상이다. 보네거트가 1장 말미에서 선언하듯이, 빌리의 전쟁체험은 “들어라: 빌리 필그림이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새의 지저귐 “짹짹?”으로 끝난다. 빌리는 문자 그대로 무시로 시간도약을 하는 주인공이다. 작품은 사실주의 소설의 문법과는 전혀 맞지 않는 플롯과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황당하기로는 1967년에 비행접시가 빌리를 트라팔마도어라는 외계인 행성으로 데리고 간 사건일 것이다. 그는 트라팔마도어의 동물원에서 포르노스타 몬타나 와일드핵과 동거하면서‘외계의 복음’(The Gospel from Outer Space)을 접한다.

그 복음의 요점인즉, “내가 트라팔마도어에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을 때 그는 단지 죽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23면, 강조는 원문) “그는 여전히 과거에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우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지구인들은 언제나 일어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101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은 잊고 현재의 즐거운 순간에 삶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복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결정론이 가미된 낙관주의가 된다. 실제로 작품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발언을 곳곳에 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우주의 행성에서 자유의지를 말하는 곳은 지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지의 부정을 골자로 하는 외계의 복음을 말 그대로 결정론의 신봉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그보다는 빌리가 주창하는 낙관적 결정론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20세기에 저지른 극악한 야만에 대해 보이는 하나의 아이러니한 반응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실제로 이 해석은 이 글의 각주 5에서 제시한 보네거트의 창작 신념에도 부합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SF장르의 관습적 이야기장치에 해당하는 트라팔마도어라는 행성과 외계인의 존재가 작품의 의미지평을 얼마나 풍부하게 해주는가는 생각해볼 만한 쟁점이다. 보네거트가 플롯을 운용하는 데 그런 장치를 활용한 것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의문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드레스덴 같은 도시에서 자행된 엄청난 만행을 단순히 인간을 다시 중심에 세워놓고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으로는 해명할 길이 없다는 인식이 작동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전쟁체험을 통상적인 서사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음을 거듭 밝히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너무 짧고 뒤죽박죽이고 소란스러워, 쌤. 왜냐하면 대학살에 대해서는 이성적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어떤 것을 말하거나 어떤 것을 결코 다시는 원할 수 없기 때문이지. 대학살 이후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지기 마련이지. 언제나 그래, 새들만 빼놓고. 그런데 새들이 뭘 말하지? 대학살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란 “짹짹?” 같은 것밖엔 없어.(17면)

 

원자폭탄으로 인해 인류가 절멸된 공상과학적 상황은 이미 『실뜨기놀이』(Cats Cradle, 1963)에서 선보인 바 있지만, 『제5도살장』의 시도때도 없는-‘의식의 흐름’이나 현란한 시공간 전도 기법으로 짜여진 본격 모더니즘 문학과도 실감이 현격히 다른-시간도약을 SF물의 서사적 관습과 연관지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즉 “짹짹?”이라는 말 이외에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주제의 압도적인 무게가 서사의 통상적인 형식에 과부하를 걸었고, 그 과부하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SF장르의 관습적 서사를 차용·변용했다는 것이다. 트라팔마도어라는 소재는 인간의 세계를 상대화하는 인식상의 근본적 전환-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이른바 우주적 관점-을 시도하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제5도살장』을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실현한 20세기 서구의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독특한‘무구(無垢)’의 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자로서도 『제5도살장』을 휴머니즘적‘반전(反戰)소설’로 상찬하는 것조차 상투적인 수사로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독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의 역사는 물론이고 2차대전 당시 드레스덴 대폭격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고 미국의 정치가들이 그 폭격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등에 관한 사실 차원의 많은 정보를 가감없이 접하게 된다. 그렇다고 작품이 반전평화를 표나게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빌리라는 연약한 인간의 망가진 인생과 어지러운 몽상을 통해 극악했던 과거를‘잊고’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함을 설파하고 있을 뿐이다.

이쯤 해서 『제5도살장』이 출간된 시대를‘근대문학 종언론’이 횡행하는 2000년대 중후반 한국의 문단현실과 겹쳐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1960년대는 20세기 미국문학사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국면으로 기억될 법하다. 그 시대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 규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발흥하던 때다. 당시 한편에서는 문단 안팎의 비평가와 소설가 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매체의 득세로 인한‘소설의 죽음’을 공언하고 다닌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대세를 거슬러 기존 소설양식의 혁신을 시도한 수많은 문학적 재능들이 등장했다. 50년대를 무명작가로 보낸 보네거트도 그런 재능들 가운데 하나였음은 두말할 것 없다. 그의 작가적 위상은 기성 SF물의 창의적인 활용으로 확보되었는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평가받는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이나 존 바스(John Barth) 등과 구분되는 지점도 주로 거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포스트모더니스트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초점은 역시 보네거트가 품은 전통적인 소설형식에 대한 의문이다. 가령 그가 서구의 고전문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는 로우즈워터(Eliot Rosewater)라는 작중인물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즉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표도르 도스또옙스끼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있지만 “이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87면) 그 연장에서 그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멋진 새로운 거짓말”을 발명해내야 할 필요를 언급하기도 한다.(87~88면, 강조는 원문) 물론 격동의 60년대를 진지하게 대면하고자 한 미국 작가들 대다수가 그런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드레스덴에서 “13만 5천의 헨젤과 그레텔 들이 생강과자 인형처럼 불에 구워진” 것을 목격한 보네거트는 “멋진 새로운 거짓말”을 치밀하게 운산하여 좀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구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생각’을 요구하는 대중성이다. 첫 작품인 『자동기계 피아노』(Player Piano, 1952)에서부터 SF장르에 강한 정치성을 불어넣기 시작한 보네거트의 평생 화두는 한편으로는 기술과 인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온전한 관계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살려내는 데 그의 과학소설들이 얼마나 그 장르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가를 필자는 전체적으로 판단할 만큼 읽지 못했다. 다만 『제5도살장』의 “멋진 새로운 거짓말”이 담고 있는 윤리적 진실이 오히려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들려주는 19세기 서구 리얼리즘 문학의 현재성을 확인해주는 바가 있음을 환기하고자 한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보네거트 문학의 새로움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SF물이 흔히 드러내는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탐닉과 매혹을 『제5도살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보네거트가 SF물의 장르적 소재를 차용했으면서 그 경향성, 특히 유토피아적 판타지에 탐닉하지 않은 데는 과학기술이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며 인간이라는 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그토록 파국적이고 자멸적인 대량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한 인간의 진실을 재현하는 이야기에 인간 혐오가 전혀 실리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1960년대 시점에서 케네디, 마틴 루터 킹 등의 암살을 환기하는 것으로 시작한 마지막 장은 드레스덴이 파괴되고 이틀이 지난 때로 돌아가 빌리가 시체더미들을 치우는 노역에 동원되는 장면으로 담담하게 끝난다. 빌리의‘우주적 천로역정’을 마무리하는 최종 발언은 “짹짹?”이다. 그러나 새의 은유적 언어와 함께 독자의 뇌리를 끝내 떠나지 않는 것은‘외계의 복음’이 가리키는 지상의 지혜, 즉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이다. 그것은 포르노스타 몬타나 와일드핵의 두 젖통 사이에 걸린 목걸이에 새겨져 있는데, 보네거트는 그것을 마지막 장이 시작하기 직전에 그림으로 표현했다. 기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안을/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그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허락하소서.”

 

 

4. 박민규의 장르실험에 관하여

 

이 기도문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도 대중문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문화는 어느 한 개인이 총체적인‘인식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하나의 제국이다. 오늘날 개별 민족국가 고유의 문화는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소비주의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때로는 그런 소비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작가들의 좀더 의식적인 개입을 바라게 된다. 예컨대 백화점이라는 소비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의 다양한 욕망을 해부한 서유미(徐柳美)의 『판타스틱 개미지옥』(2007)도 그런 개입의 산물인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21세기의 노동소설에 해당하기도 하는데,‘본격문학’의 성취로 분류되는 텍스트도 바로 그 소비문화의 자장을 통과하면서 시간에 대한 내구성을 획득했음을 역사적으로 성찰해봄직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도 박민규(朴玟奎)는 하나의‘시범 케이스’다. 지금 우리 문학에서 시와 소설 분야를 통틀어 박민규만큼 대중문화에 철저하게‘오염’된 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이 나왔을 당시 소위 3S정책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프로야구 같은 대중스포츠를 소설로 써서 제도권 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슈퍼맨, 배트맨, 아쿠아맨, 원더우먼 등을 총출동시켜 만화에 방불한 방식으로 미국의 세계지배를 풍자한 『지구영웅전설』(2003)은 어떤가. 가히 보네거트를 능가하는 능청스런 언어다. 그 능청의 수위가 위태로워서 그랬는지, 당시에도 “과연 박민규의 이러한 시도가 소설사적으로 그리고 세대론적으로 의미있는 징후인지, 아니면 다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때의 에피소드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평가가 있었다.7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작품의 미덕과 가능성을 정당하게 사주는 비평이었는데, 4년이 더 흐른 지금은 박민규의 시도가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굳혀도 좋다고 본다.

그 일차적인 증거는 소설집 『카스테라』(2005)를 비롯해 1997년 IMF사태 이후 사람살이의 속내를 간절하게 그려낸 사실주의 계열의 근년 단편 「낮잠」 「아치」 「누런 강 배 한 척」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다른 한편 새로운 실험적 발화도 간과할 수 없는데, SF의 서사적 형식이나 발상을 차용한 『핑퐁』(2006), 「크로만, 운」(『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 「깊」(『문학동네』 2006년 겨울호) 등과 함께 무협소설을 가공한 「111」으로 만들어진 해구(海丘)에 “의지와 탐구라는 양 갈래 고리가 달린 스스로의 닻을”(286면) 내리는데, 이야기는 육체가 소멸되고 마음만이 남은‘디퍼’들의‘대화’로 끝난다. 작가는 사실주의적인 SF라고 할 만큼 정교하게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서 인류가‘삶의 의미’를 개척하는 모험을 부각한다. 금성에서 채취한 광물과 심해 해삼의 체액을 연구하여 과학자들은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는바, 인간은 티모 합금의 감압복(減壓服)과 심해 생물의 체액으로 몸을 바꿈으로써 숱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해구의 밑바닥에 도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역시 결말이다. 해구의 끝에 착지한‘디퍼’들은 거기서 지상과 연결된‘탯줄’을 끊어버리고 마음만이 남은 채 그 밑바닥에 난 또다른 틈새 속의 심연을 향해 도전한다.

이 도전의‘인간적 여운’이야말로 장르문학으로서 「깊」이 갖는 미묘함이자 독특함이다. 「깊」은 SF장르의 관습적 도식인 인간 대 과학이나 자연 대 인공 등에서 말끔하게 벗어남으로써 장르문학 자체로도 본격문학의 지평에 진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일깨우고 그런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는가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현함으로써, 수백년 후 미래의 상황이 바로 오늘날 인간이 직면한 문명적 위기에 대한 은유적인 논평이 되는 것이다.

111」은 SF의 정공법을 구사한 「깊」과는 전혀 다르다. 무협 장르다. 능청스런 풍자를 장풍처럼 날리는 이야기다. 이런 「111」을 읽는 시간은 일찍이 김현(金炫)이 비판한, 무협지를 읽는 “동면의 시간”과는 양립할 수 없다.‘말 많을 절(111)’의 용 룡(龍)자 4개는 무림의 절대고수, 즉 대천권왕 김일해, 청룡검제 최일우, 운무천마 선우진, 빙해천수 조인덕을 가리키는바, “절대 무림의 사천왕, 중국 중원을 떨게 했던 동방四룡”이 펼치는 초절정 무공은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명암을 무협 형식으로 드러낸다. 물론 이들의 행적은 일종의 의장(擬裝)에 불과하다. 그런 의장의 틈새에 넣는 변죽, 이게 진짜다.

 

어허, 고얀지고.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내 오늘 세 분 무신께서 모이신다 그리도 일렀거늘! 울먹이던 도제가 결국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四룡께서 모이면 뭘요… 뭘… 정부라도 엎을 겁니까? 네 분이 힘 합치면 뭐… 삼성한테 이길 수 있습니까? (193면)

 

박민규의 촌철살인이 단순한 재담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오늘날 민중의 실감과 정확히 일치하면서도 그런 실감을 곱씹어보게 하는 익살스런 풍자의 현실성 때문이다. 무협지 특유의 어법과 표현을 통해 굴곡 많은 우리네 현대사와 서민들 삶의 진한 비애를 은근히 자아내는 박민규의 장르실험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핑퐁』(2006)은 그런 궁금증을 어느정도 해소하면서 또 한편 유발하기도 하는 작품이다. 장르문학의 관점에서 『핑퐁』을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역시 장르적 정체성이다. 이 경장편은 두명의 중학생이 지독하게 겪는‘따’의 악몽을 다뤘지만, 앞서 언급한 김사과의 『미나』나 이명랑의 『날라리 on the pink』처럼 청소년의 일탈을 내세운 사회(비판)소설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탁구라는 비근한 소재를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끌고 가면서 독서의 재미를 높여주지만, 『해리 포터』 같은 판타지와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SF적 상상력이 발동되면서 묵시록적 분위기가 작품을 지배하기는 하지만, 딱히 SF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계통이 불분명한‘잡종’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잡종 대 순종이라는 구도는 피하는 것이 옳다. 앞서 강조했다시피 박민규는 어느 누구보다도 대중문화의 다양한 소재들을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활용한 작가다. 『카스테라』에서도 그 점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그중 SF의 소재를 도입한 사례로는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나 「코리언 스텐더즈」를 들 수 있겠다. 두 단편 모두 아직은 실험적인 시도에 머무른 느낌인데, 전통적인 사실주의 문법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이같은 단편을 제대로 분별하며 읽기 위해서는 독자도 특정한 독법에 길들여진 자신의 독서습성을 문제삼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더욱이 관성적 읽기를 교란하는 박민규의 작품이 딱히 SF적 발상을 차용한 단편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표제작인 「카스테라」만 해도 사실적 인과관계를 가볍게 무시하는, 냉장고에 연관된 온갖 정보와 연상(聯想)과 상상을 종횡무진으로 펼쳐놓는 이야기다. 이 단편은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나 「코리언 스텐더즈」와도 구분되는 기발한 발상의 집약이다. 화자 자신의 부모를 포함한 세계의 물상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쟁여넣는 황당한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냉장고 속에 넣어둔‘세계’가 문득 카스테라로 바뀌고 “그 따듯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를 씹으며/나는 눈물을 흘렸다”(35면)로 끝나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독자는 “한 채의 공장이 내뿜을 만한 소음을 내는” 냉장고를 벗삼아 생활하는 자의 고단한 일상을 실감하기도 하는 것이다.

산문적인 설명으로 잘 환원되지 않는 「카스테라」의 그러한 실감에 무게를 둘수록 이 단편을 어떤 장르의 문학으로 보아야 하는가도 결국 부차적인 문제다. 그건 『핑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때도 초점은 역시 『핑퐁』의 복합장르적 특성이 독자의 읽기 방식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이다. 『핑퐁』에 관한 그간의 평가에서 흥미로운 역설은, 평자들이 왕년의 민족문학 및 리얼리즘에서 상대적으로 중시한 사실주의 기율에 맞춰 작품을 읽고 있다는 점이다. 『핑퐁』을 두고 “자본주의 체제에 투항한 자의 체념과 냉소에 머무르고 있다”는 단정도 흔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에서 희망의 부재를 지적하는 것도 그러하다. 상당수 논자들이 비관과 낙관의 구도에 『핑퐁』을 구겨넣으려 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8

결과적으로 이들의 신중한 또는 중도적 읽기는 『핑퐁』 같은 잡종적 서사의 어느 한 면에만 모아진다. 즉 『핑퐁』을 부지불식간에 사실주의 소설의 범주에 넣고 생각하면서 박민규가 이런저런 방식으로‘드리블한’현실 또는 문명 비판에 집중하는 (다소 고지식한) 읽기인 것이다. 앞서 제시한 것처럼 그러한 비판은 『핑퐁』의 잡종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인에 불과하며, 그 비판의 의미나 효과도 나머지 두 요인, 즉 판타지 및 SF적 면모와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게다가 낙관이냐 비관이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작품은 세계가‘언인스톨’된 후‘못’이 깨어나 학교에 등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가. 그렇게 학교로 돌아오는 못에 대해서 박민규 자신은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어쨌든 『핑퐁』 같은 작품을 논하는 데 평자들이 비관과 낙관의 틀에 얽매여서는 곤란하지 싶다.

필자는 『핑퐁』이 재난의 “상상력에 발동을 걸면서도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 세계를 심문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작품임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면서 “소름끼치는 핵전쟁을 무색하게 하는 (왕)따들의 수난 같은‘진부한 일상’에 생기 넘치는 발상으로 헌신하는 작가가 우리 문단에 더 많아지기를” 희망했다.9 그 글이 짤막한 온라인 지면에 발표되었던만큼 이 자리를 빌려 희망의 근거들을 좀더 제시해도 좋겠다.

장르의 고정된 경계를 창의적으로 해체·활용하여 새로운 형태의‘물건’을 만드는 데서도 기계적인 원리에 충실한 엔지니어로서의 작가보다는 원리를 응용하고 심지어 바꾸기도 하는‘브리꼴뢰르’(bricoleur)로서의 작가가 더 유리할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기존 장르들의 유기적 분산과 통합을‘작품’으로 이루는 경지가 관건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핑퐁』은 주목할 만하다. 가령 못과 모아이 및 치수 패거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어떤 면에서는 성장소설로도 범주화할 수 있는‘따’의 견딜 수 없는 삶이 현실도피 충동이 깔린 공상과학적 환상으로 연결되는 것도 그럴 법할뿐더러‘방사능 낙지’나‘실버스프링의 핑퐁맨’에피소드도 『핑퐁』의 우주적 상상력에 나름의‘지구적 의미’를 더해주는 데 기여한다. 그 과정에서 고도의 암시적 효과를 내는 장면도 적지 않다. “스키너의 박스에서 길러진 쥐와 새”가‘인류의 집약’으로서의 라인홀트 메스너 및 말콤 X와 벌이는 무한 탁구경기가 바로 그러하다. 이 장면은 자본의 이윤 쥐어짜기가 절정에 이른 신자유주의적 지구시대에 대한 저항적 우화로 읽을 여지마저 있다. 물론 『핑퐁』의 재미가 반드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작가의 의식적인 비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요는, 그 비판도 청소년의 일탈, 공상과학, 판타지, 사회비판 등 다양한 서사적 요소들을 모으고 흩뜨리는 서사실험의 효과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다만 그 효과가 그런 다양한 갈래의 장르적 형식과 내용을 총체적으로 종합하는-이를테면 특정한 장르로 특화하기 어려운 장편소설 특유의 효과에 비견할 만한-경지에서 발산되는 것인가는 더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박민규의 문학이‘시간을 죽여주는’기성 대중소설의 오락성과는 분명히 다른 발상과 재미를 도발적으로 제기하고 느끼게 하기 때문에 의문이 더해진다고 하겠는데, 이는 『핑퐁』의‘추상성’이 안고 있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핑퐁』에서 임기응변으로 구사되는 탁구인(卓球人)이나 탁구계(卓球界)라는 알레고리보다는 우리 삶을 휠씬 구체적으로 압박하는 정밀한‘사실적 상징’을 독자는 바라는 것이다. 이 바람은 대중성과 정치성을 좀더 정교하게 결합함으로써 장르문학의 게토적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문과도 통한다.

 

 

5. 맺음말

 

사실 이런 요구는 박민규 자신의 발언에 근거를 둔 것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지난 수십년간 그나마 우리가 일군 것은 리얼리즘 하나밖에 없”다면,10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장르문학의 실험에서도 리얼리즘 유산을 활용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물론 그가 뭘 가지고‘리얼리즘’이라고 하는지도 궁금해지지만, 한국문학사에서‘모더니즘’문학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간단히 일축될 수는 없다. 아무튼 장르문학들 사이의 교집합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도 양대 문학의 자산을 동원해야 맞다. 그러나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더 중요한 점은 한국문학 유산의 창의적 상속이 갖는 참뜻을 장르문학의 서사적 실험이라는 관점에서도 되새겨보는 일이다. 장르문학 고유의 성취도 게토화된 장르문학의 극복에 있다는 명제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서 그 상속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기 힘들다면 더욱 그렇다.

호손이나 도르프만, 보네거트 등 외국의 탁월한 장르실험 사례를 눈여겨보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은 딱히 2000년대에만 국한되는 과제가 아니다. 다만 그런 수용도 이제는 단순한 따라잡기를 넘어서서 2008년 한국문학의 지형에서 박민규와 여러 작가들이 모색하는 장르문학의 창의적 활용 가능성을 구체화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는 점은 강조할 만하겠다. 한국문단에서 활발한 장르실험도 외국의 훌륭한 성취를 모아들이면서 우리 현실의 새로운 모순들과‘문학적인 싸움’을 견지할 때에야 비로소 장르문학의 파편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싸움과 극복이라면 4·19 이후 한국문학을 견인한 민족문학의 뜻있는 계승으로, 민족문학 너머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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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내 논의는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 특집‘장르문학의 현재와 미래’; 『문예중앙』 2007년 겨울호 특집‘제4의 문학을 위하여’; 『작가세계』 2008년 봄호 기획특집‘장르문학 혹은 라이트노블’등 참조.
  2. 필자는 이 가운데 호손의 로맨스양식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논한 바 있다.「회통의 상상력과 역사의식: 호손의 로맨스론」,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창비 2007, 300~33면. 호손을 호프만 및 포우와 비교한 대목은 322~23면 참조.
  3. 졸고 「도르프만의 경계 넘기와 한국문학」, 『창비주간논평』(magazine.changbi.com) 2007.7.24.
  4. 장르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생각거리가 적지 않은 그러한 형식실험을 요구한 작품비평 사례를 하나만 든다면, 백낙청 「『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참조.
  5. 작가가 어떤 자세로 창작에 임했는가는 『플레이보이』지와 한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왜 쓰는가”라는 인터뷰어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의 동기는 정치적입니다. 나는 작가들이 자신의 사회에 복무해야 한다고 한 스딸린, 히틀러 그리고 무쏠리니에 동의합니다. (그러나-인용자) 나는 작가들이 어떻게 복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독재자들과 생각을 달리하지요. 주로 나는 그들이 변화의 주체(agent)가 되어야만-생물학적으로 그런 주체가 되어야만-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컨대 더 나은 변화 말이지요.” “Playboy Interview,” Kurt Vonnegut: Wampeters, Foma & Granfalloons (Delta Book 1999) 237면, 강조는 원문.
  6. 인용 텍스트는 Kurt Vonnegut, Slaughterhouse-Five, or The Childrens Crusade (Delta Book 1969)로 한다. 이하 인용은 이 책에 의거하여 필자가 번역한 것으로서, 최근 우리말 번역본으로는 『제5도살장』(아이필드 2005)이 있다.
  7. 염무웅 「생태적 유토피아의 꿈」, 『창작과비평』 2003년 겨울호 406면.
  8. “체념과 냉소”에 관한 부분은 권유리아 「지구촌 실향민」, 『오늘의 문예비평』 2007년 봄호 참조. 낙관과 비관의 구도와 연관해서는 각각 차미령 「환상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서는가」,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268면; 진정석 「사회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214~15면.
  9. 졸고 「‘재난의 상상력’과 『핑퐁』」, 『창비주간논평』(magazine.changbi.com) 2006.10.17.
  10. 이기호 정이현 박민규 김애란 신형철 좌담 「한국문학은 더 진화해야 한다」, 『문학동네』 2007년 여름호 104면.

유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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